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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브 해밀턴: 오늘의 에세이-"좋은 인류세"의 신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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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7. 15.

 

"좋은 인류세"의 신정론

The Theodicy of the "Good Anthropocene"

 

―― 클라이브 해밀턴(Clive Hamilton)

 

그것을 처음 제안한 사람들이 경악하게도, 인류세는 한탄하고 두려워하기보다 축하해야 할 사건으로 재구성되고 있다. 기술산업적 오만에 의해 저질러진 피해에 대한 최종 증거 대신에, '생태근대주의자(ecomodernist)'들은 새로운 시대를 자연을 변형시키고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징표로서 환영한다. 그들은 인류세를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결함에 대한 증거도 아니고 인류의 근시안과 탐욕에 대한 증거도 아닌 것으로 간주한다. 그 대신에 인류세는 인간들이 마침내 독자적인 시대로 진입할 기회로서 도래한다.

 

몇 년 전에 얼 엘리스(Erle Ellis)는 '좋은 인류세'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는데, 그런 있을 법하지 않은 병치는 이제 <생태근대주의자 선언(An Ecomodernist Manifesto)>에서 "위대한 인류세"라는 관념으로 증폭되어 제시되었다. 인구의 지속적인 성장과 경제적 발전을 제한할 행성적 경계들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역사가 우리의 유연성을 증명하기 때문에 '인간적 체계들'은 더 온난한 세계에서 적응하여 번성할 수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인류세에 진입함에 따라 우리는 자연적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인류에게 위대한 새로운 시대에 대한 유일한 장벽은 자기의심이다. 엘리스는 우리로 하여금 인류세를 위기가 아니라 '인간주도적 기회로 무르익은 새로운 지질 시대의 시작'으로 간주하도록 촉구한다. 낭만주의적 기술비평가들(그리고 그들이 기대는 우울한 과학자들)은 그런 전망의 실현을 가로막고 있다. 엘리스 및 그와 비슷한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들의 경우에, 인류가 행성적 중요성의 더 고등한 수준으로 전이한 것은 '멋진 기회'이다. '인류세' 옆에 '좋은'이라는 형용사를 병치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그들은 '우리는 인류세에 우리가 만들어내는 지구를 자랑스러워 할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스튜어트 브랜드(Stewart Brand)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신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잘하게 될 것이다.'

 

생태근대주의자들은 인간주의자처럼 글을 적을지라도, 그들은 구조적으로 신정론, 즉 신의 궁극적인 자비를 증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신학적 논변에 해당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를 해석한다. 기독교 호교론에서 고통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신의 선의에 대한 증명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최초로 시도되었고, 나중에 계속해서 라이프니츠가 (<<신정론>>이라는 책에서) 더 큰 시각을 취하면 사악한 행위들이 전체가 작동하는 데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우리에게는 신이 묵인하는 끔찍한 범죄로 보일지도 모르는 것이, 불가사의할지라도, 신의 더 큰 자비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라이프니츠의 명쾌한 아포리즘에 따르면, '모든 것은 최선의 것을 위해 일어난다.' 또는 알렉산더 포프의 당혹스러운 말에 따르면, '존재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옳다.' 그것은 볼테르가 매독에 걸린 거지의 지위로 전락한 후에 낙관주의적 전망에 매달렸던 팡글로스 박사의 모습으로 풍자한 정서이다. 남에게 사랑 받는 그의 개성적 특질은 기만적인 삶의 철학이 되었다.

 

그러므로 신정론은 자비로운 신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 속에서 나타나는 악의 현존에 대한 반응이다. 격렬한 신학적 논쟁이 세속화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헤겔의 철학적 체계는 악을 세계 역사의 더 큰 운동 속에 포섭된 것으로 간주했는데, 세계 역사의 목적과 종점은 정신의 완전한 실현이다. 이런 견해를 취하기 위해 헤겔은, 지금처럼 그때도 일반적이었던, 세계는 어떤 '궁극적인 설계'―헤겔의 경우에는 자기의식의 전개―에 따라 움직인다는 관념을 고수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아무리 세계의 특수자들로부터 뒷걸음을 치더라도, 세계는 예정대로 영광스러운 대미에 이르는 경로를 따라 전개된다. 이런 식으로, 악은 형이상학적 권역으로 격상되어 더 이상 도덕적 의문에 불과한 것이 아니게 된다. 헤겔 이후에, 마르크스도 고통에 대한 도덕적 설명을 거부했지만, 그는 악을 형이상학적 권역에서 물질적 권역으로 끌어내렸는데, 프롤레타리아트의 궁핍화는 계급 없는 유토피아의 실현에 필요한 단계가 되었다.

 

'좋은 인류세' 주장은 전체의 궁극적인 선, 즉 결국에는 위협이 되는 듯 보이는 구조적 걸림돌, 고통 그리고 도덕적 과실들을 초월하고 패배시키는 선에 대한 믿음에 정초하고 있다. 이런 믿음이 드물게 표명된다는 점이 그것의 은밀한 힘에 대한 증거가 된다. 그 주장의 신정론과의 유사점들을 탐구하는 것은 그것을 헐뜯기보다는 이해하기 쉽게 해 주는 것이다. (나는 모든 유형들의 신정론의 기저에 놓여 있는 역사적 전개에 대한 감각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좋은 인류세의 세계에서 새로운 지질 시대는 임박한 위험이 아니라, 엘리스의 표현대로, '지구에 대한 앞을 내다보는 전망'으로서, 또는 <생태근대주의자 선언>의 표현대로, '인간 역량과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적 견해', '생명다양성을 갖추고 번성하는 행성에서의 보편적인 인간의 품위'의 위대한 인류세로서 환영받는다.

 

기후 파괴는 근대화 과정의 해결 가능한 부작용―성장 과정 자체가 해결할 성장통―으로 간주된다.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에서는 신의 의지가 모든 것이 선을 위해 존재한다는 점을 보증하는 반면에, 생태근대주의자들의 경우에는 선이 지배할 것이라고 보증하는 것은 인간의 창의성과 개선 충동에 의해 추동되는 진보이다. 그래서 그들은 (神)정론의 자리에 인간주도적 진보가 신의 자리를 차지하는 (人)정론을 위치시킨다. 널리 보급될 선은 남성과 여성들의 마음이 아니라 사물의 질서, 인간들의 창의성과 임기응변의 재능을 동원하는 질서 속에 존재한다. 결국 좋은 인류세에 대한 생태근대주의자들의 신념은 섭리라는 종교적 관념의 세속적 표현인데, 신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의 운명을 인도한다. 우리는 미래를 보았고, 그것은 좋다.

 

그러므로 '좋은 인류세' 논증의 구조는 본질적으로 헤겔적 신정론인데, 악―여기서 생태 파괴로 해석되는―은 절대적인 것―여기서 보편적 번영을 향한 멈출 수 없는 진보로 해석되는―의 실현을 향하여 역사를 전진시키는 데 필수적인 모순으로 해석된다. '사유하는 정신이 현존의 부정적 양태들과 화해할 수 있도록 우리로 하여금 악의 현존을 비롯한 세계의 모든 질병을 파악할 수 있게 하기 위해' 헤겔은 그의 신정론을 논리의 과정, 합리적 질서의 전개 속에 새겨 넣었다.

 

오늘날의 생태근대주의자들의 경우에, 기술적으로 정교한 인간들은 일시적인 환경 실패를 전적으로 초월할 수 있다. 엘리스의 경우에, '인간들은 지구를 공학적으로 조작하여 변형시킴으로써 급증하는 인구를 계속해서 전적으로 부양할 수 있는 듯 보인다.' 진보의 고유한 동학에 도움이 되도록 생태 파괴의 부정성은 변화를 위한 긍정적인 힘으로 동화되거나 지양된다. 사실상 그 결과는 지배권을 부여받은 창의적 종과 강인한 자연 사이의 협력의 산물이다. 신정론의 구조에서 인간은 신이 자신의 모습대로 만든 피조물이고, 그래서 항상 더 큰 힘의 지배를 받는다면, 생태근대주의자들의 인정론에서 인간은 자연이 최상위의 생명 형태로 만든 피조물이다. 그런데 자연은 인간를 지배하는 권력자가 아닌데, 상황이 반전되어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생태 위기로 드러나는 인류세의 표현은  퇴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극복을 통한 더 높은 단계로의 도약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것은 이 세상의 고통이 저 세상의 보상으로 보답받을 것이라는 주장이 아니라, 단기적으로 견뎌야 할지도 모르는 고통이 좋은, 위대한 인류세에서 우리가 만들어낼 경이로운 세계에서 정당성을 입증받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우리는, 생태근대주의의 주요 대변인들의 표현대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고, 자유로우며, 창의적인 삶을 영위할 만큼 충분히 유복할' 행성 정원을 조성할 것이다. 체계 비판가들이 스스로 부과한 낙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들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대립은 화해시킬 수 있고, 그래서 기후 변화는 기술로 대처하여 이기게 될 재판이라는 점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태근대주의자들은 말한다. 유토피아를 단념하기에는 너무 이를 뿐 아니라, 인류세는 우리가 마침내 유토피아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실패이다.

 

18세기와 19세기에 신정론은 격렬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임마누엘 칸트는, 신정론이 우리가 신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을 넘어서기 때문에 비도적적이고 신성모독적인 것이라고 신정론을 공격했다. 우리는 신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없고, 그래서 '전체에 대해 무엇이 최선인지 판단할 수 없다'. 좋은 인류세에 반대하는 어떤 칸트적 논증은, 지구 체계의 거동을 예측하는 것은 우리 능력을 초월하며, 그리고 더 중요하게도, 그것을 통제하는 것은 우리 능력을 초월하기 때문에 우리는 인류세의 궁극적인 결과를 알 수 없다는 것일 것이다. 지구는 불가사의하고 파악할 수 없는 것(셸링의 '나눌 수 없는 잔여')을 언제나 보유하고 있고, 그래서 우리가 불완전하게 이해할 수밖에 없고 거의 조절할 수 없는 힘들이 충적세로부터 인류세로의 전환에서 촉발되었다.

 

또한 좋은 인류세 논증의 신정론과 유사한 구조는 그것의 본질적인 정치적 결함과 도덕적 결함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킨다. 비판가들이 신정론을 비난한 까닭은 그것이 정적주의(quietism)를 낳았기 때문이다. 고통이 신의 더 큰 목적에 기여하기 때문에 정당화된다면, 우리는 고통을 조용히 받아들여야 하고 세상을 바꾸려고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을 섭리에 맡겨야 하고, 인간의 운명을 신의 인도 아래 맡겨야 한다. 생태근대주의자들은 사색하면서 좋은 인류세의 도래를 기다리고 앉아 있는 정적주의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것의 경로를 매끈하게 하기를 바란다. 그들의 정치적 참여는 정해져 있는 것의 달성을 촉진하는 쪽으로 정향되어 있다. 그들의 과업은 체계가 자체의 약속을 실현할 기회를 갖도록 체계를 보호하고 방어하는 것이다.

 

<<근대 사상에서의 악(Evil in Modern Thought)>>이라는 신정론에 관한 뛰어난 연구서에서 수잔 니먼(Susan Neiman)은 '섭리는 자신들이 억압하는 자들을 속여서 침묵의 인내 상태로 빠뜨리기 위해 부자들이 발명한 도구이다"라고 주장했다. 좋은 인류세의 발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체계에 항의하는 경향이 있는 희생자들에게 새로운 새벽에 대한 황금빛 약속은 그들을 속여서 침묵의 인내 상태로 빠뜨린다. 현재와 미래에 인간이 초래하는 가뭄, 홍수 그리고 열파에서 비롯되는 현재와 미래의 고통에 대한 좋은 인류세의 메시지는 이렇다. 당신은 더 큰 선을 위해 고통을 겪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다면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도울 것이지만 당신의 고통은 정당한 이유가 있다.

 

좋은 인류세, 나쁜 과학

 

18세기 말과 19세기 전체에 걸쳐서 지질학이라는 새로운 과학은 균일론(uniformitarianism), 즉 지구가 매우 오랜 시간 동안 점진적으로 지구를 변형시키는 느리게 움직이는 힘들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관념이 지배적이었다. 그 새로운 과학을 순간적인 무로부터의 창조에 관한 성서적 설명으로부터 분리하기로 결정한 신흥 전공자들은 지구 역사의 한 시기에서 다음 시기로의 전환은 어떤 자연적 발작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격변론(catastrophism)이라는 이론을 수용하기를 꺼렸다.

 

결국 격변적 변화들에 대한 증거는 더 이상 견뎌낼 수 없었고, 그래서 지질학자들은 점진적 변화가 때때로 격변들에 의해 교란받을 수 있다는 점을 수용했다. 오늘날 지질학적 시간 척도는 격변적 사건들에 의해 초래된 한 시대로부터 다음 시대로의 여러 전환들을 포함한다. 그것들이 '격변적'인 까닭은 변화가 매우 빨라서 현존하는 대부분의 생명 형태들이 적응하지 못하고 멸종하기 때문이다.

 

생태근대주의자들은 19세기의 균일론으로 후퇴해 버렸다. 그들의 주요한 과학적 주장은 피터 카레이바(Peter Kareiva)와 동료들에 의해 이렇게 표현된다. '자연은 매우 탄력적이어서 가장 강력한 인간의 교란들로부터도 빨리 회복할 수 있다.' 생태계들이 '회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인류세에 대한 그들의 해석으로 이어진다. 엘리스는 다음과 같이 평이하게 서술한다. '지금까지 인간들은 자연적 체계들을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 그럼에도 지구는 생산력이 더 풍부해져서 인간 개체군을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커졌다. ... 오늘날까지 이런 동학이 근본적으로 바뀌어 버렸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이런 진술들은 인류세에 관한 과학에 대한 전면적인 오해를 반영한다. 인류세를 제안한 지구과학자들이 제기한 기초적인 주장은, 지난 이 내지 삼 세기 동안 인간들과 지구 사이의 동학이 근본적으로 바뀌어 버렸다는 것이다. 인류세 과학의 본질적인 요점은 엘리스의 이해와 정반대되는 것이다. 인류세는 인간들이 풍경이나 생태계들에 미치는 영향의 추가적 확산에 관한 서술이 아니라 지질학적 시간 척도에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시대, 즉 지구 체계 전체의 작동에 있어서의 위상 변화로서 제시된다. 그것은 과거의 연속이 아니라 지질학적 기록에서 불연속적인 변화이다.

 

이전의 불연속적인 변화, 즉 홍적세에서 충적세로의 변화는 지구 평균 온도에서 8℃의 변화, 해수면 높이에서 35미터의 변화 그리고 광범위한 멸종을 나타냈다. 지질학적으로 말하자면, 대단히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나고 있는 인류세 사건은 균일론이라기보다는 격변론의 사례이다.

 

이런 견지에서, 자연의 탄력성에 대한 증거로서 농경 체계들의 적응성에 관한 엘리스의 조사는 그 낱말의 정확한 의미에서 시대착오적이다. 엘리스와 다른 사람들이 '좋은 인류세'라는 관념을 옹호하는 데 사용하는 충적세 조건은 과거로 밀려가 버렸다. 충적세에서 그것의 타당성이 어떻든 간에, 생태계들이 취약하지 않고 탄력적이어서 인간의 교란으로부터 '회복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인류세와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는 연속적인 변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동을 목격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지구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파열―영구적인 새로운 지질 시대로의 빠른 전환―을 목격하고 있다.

 

지구 역사 전체를 통해서 지구는 한 시대에서 이전 시대로 결코 '회복한' 적이 없다. 이제 지구는 귀환할 수 없는 지점을 건너가 버렸다. 지구의 거대한 순환들은 바뀌어 버렸고, 대기와 대양의 화학적 조성들은 돌이킬 수 없는 식으로 변해 버렸다. 21세기말 경에 지구는 이전 1500만 년 동안보다 더 더울 개연성이 매우 높을 것이다.

 

요약하면, 이제 지구 체계는 다른 양식으로 작동하고 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심지어 단기간 내에 화석 연료의 연소를 중단하는 것도 지구를 충적세로 '회복'시킬 수 없다. 지구는 결코 다시는 충적세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충적세 조건에 기반을 둔 주장들은 정말 현혹하는 것들이다. 국소적인 수준에서 그것의 타당성이 어떻든 간에, 생태근대주의자들의 생태계 사유는 지구 체계 사유로 대체되어 버렸고, 그래서 그런 사유를 인류세에 적용하는 것은 양자 세계에 대하여 뉴턴주의적 주장을 제시하는 것과 유사하다.

 

캘리포니아는 눈 녹은 물의 고갈로 초래된 거대한 가뭄에 갇혀 있다. 그것은 점점 더 빈번해지고 심각해질 것으로 예상되는 그런 종류의 극단적인 날씨이다. 그것은 IPCC의 '영향' 보고서들에서 무섭도록 초연하게 공표된다. 나는 생태근대주의자들이 이런 이야기들을 읽거나 텔레비전에서 영상들을 볼 때 어떤 종류의 생각이 촉발되는지 자문한다. 거대한 가뭄 또는 허리케인 샌디 또는 물에 잠기고 있는 몰디브를 보여주는 영상들을 좋은 인류세에 관한 서사로 어떻게 뒤덮는가? 내게는 이것이 여전히 불가사의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