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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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히크먼: 오늘의 에세이-새로운 프로메테우스들: 기술 그리고 이성의 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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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8. 2.

 

새로운 프로메테우스들: 기술 그리고 이성의 꿈들

The New Prometheans: Technology and the Dreams of Reason

 

―― 스티븐 히크먼(S.C. Hickman)

 

시간과 관련하여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 레이 브래시어(Ray Brassier)

 

내가 다른 한 블로그 글에서 다룬 적이 있는 <<가속주의 선집(The Accelerationist Reader)>>이라는 책에서 레이 브래시어는 새로운 "융합 기술들"(NBIC)에 맞서는 장-피에르 뒤피(Jean-Pierre Dupuy)의 적대적인 태도의 신학적 기반에 대한 비판을 제시한다. 자신의 변론에서 뒤피는 현존재(Dasein)와 유한성이라는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관념에 영향을 받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이라는 책에 의지한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자세히 돌이켜 보지 않은 채 나는, 만들어진 것과 주어진 것 사이에 균형 또는 평형이 유지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이성의 꿈들이 기괴한 것들을 산출하고 비평형을 생성할 것이라는 뒤피의 강력한 주장를 다루는 브래시어의 논변의 핵심에 돌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 관념에 맞서서 브래시어는 이렇게 진술한다.

 

내가 완곡히 말하고 싶은 것은 평형에 관한 바로 이런 가정이 신학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세계의 길'이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궁극적으로 불가해한, 외면할 수 없는 소여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질서를 갖춘 기성 세계가 존재한다는 주장, 즉 불쾌하게도 신학적인 주장이다.(p. 485)

 

이런 소여의 신화―또는 세계는 어떤 신성한 존재자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래서 우리가 초래하는 어떤 오만한 파멸로 난잡하게 되지 말아야 한다는 관념―에 맞서서 브래시어는 이렇게 말한다. "프로메테우스주의(Prometheanism)는 신의 청사진을 좇을 필요가 없이 세계의 창조에 참여하려는 시도이다. 그것은 알고 싶어하는 우리의 욕망을 통해서 우리가 세계에 도입하는 비평형이 세계에 이미 존재하는 비평형보다 더 불쾌하지도 않고 덜 불쾌하지도 않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된다"(p. 485). 그런 프로메테우스주의는 주의론적 가정들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하이데거의 두려움에 맞서서 브래시어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할 것인데, 프로메테우스주의는 생기론적 의지 또는 작용에 관한 어떤 관념에 기반을 두기보다는, 칸트의 경우처럼, 규칙 지배적인 작용[즉, "규칙들을 생성하고 그것들에 의해 한정되는 능력으로서의 합리성"(p. 485)이라는 관념]에 기반을 둘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런 형식의 합리성은 "물리적 패턴들에서 규칙이 비롯될 수 있게 하는 자연적 질서 속 구조들의 얽힘과 더불어 내재성의 층서화를 파악하는 것에 놓여 있다"(p.486). 이런 합리성이 철학적 사변 속 자체의 요새에서 지향주의를 축출한다는 것은 이 새로운 프로메테우스주의의 결과일 뿐 아니라, 그런 실험주의가 우선 이런 사회적 기획의 역동성에 스며들 수 있게 할 "기술적 창의력"이라는 바로 그 원리의 발제이다.

 

브래시어의 경우에 우리는 낡은 신학적인 소여의 세계를 받아들여 유한성과 그것이 인간적 및 기술적 독창성과 진보에 가하는 제한 및 제약을 수용할 수 있거나, 아니면 "더 흥미롭게도 우리는 마르크스에 내재하는 프로메테우스적 기획―더 합리적인 기초에 의거하여 우리 자신과 우리 세계를 개량하려는 기획―의 철학적 토대를 재검토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p. 487). 브래시어는 이것을 어떤 집단적 기획, 즉 "주체화의 필연성에 대한 바디우의 설명을 합리적 주체화를 조건짓는 생물학적 과정, 경제적 과정 그리고 역사적 과정들에 관한 분석으로"(p. 487) 재연결함으로써 사건과 주체성에 관한 바디우의 관념들(정확히 바디우가 서술하는 대로는 아니지만)의 한 양태를 출발점으로 삼는 연구 프로그램의 일부로 간주한다. 그 에세이에서 브래시어는, 이성은 상상에 부과된 한계를 재구성할 수 있는 동시에 상상에 의해 가열되기 떄문에 이성은 상상에 의해 조율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브래시어가 깊이 고찰하지 않은 한 양태는 미래가 취할 수 있는 두 가지 갈림길이다. 그는 인공 지능, 복제, 생명공학을 이용하여 인간 이상의 능력을 갖추게 된 인간들이 현재의 인류를 초월할 수도 있게 될 트랜스인간주의적 기획에 의거하여 사회를 개량할 미래에 투자하는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 등과 같은 사람들의 자본주의적 견해를 언급하는데, 그런 기획은 다른 사람들은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 등이 이미 매우 잘 기록한 슬럼 세계들과 거의 흡사한 '배제 지역들'로 배치되는 한편으로, 지성적 역량과 물리적 역량에서 뛰어나게 될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새로운 계급의 분화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두 가지 미래에 관한 관념은 이렇다. 하나는 사회적 정의에 관한 평등주의적 견해에 의거하여 인간들과 사회를 재구성한다는 마르크스의 탈인간주의적 전망에 기반을 둔 미래이다. 그리고 나머지 다른 하나는 니체의 위버멘쉬에 관한 신자유주의적 전망에 기반을 둔 미래이다. 그것들은 윌리엄스와 스르니체크의 선언이 발표된 이후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천천히 섭렵하게 된 프로메테우스주의의 가속주의적 정치의 일부이다. 그 정치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은, 브래시어가 언급했듯이, 이런 프로메테우스주의의 양면을 특징짓는 "생물학적 과정, 경제적 과정 그리고 역사적 과정들"을 재평가할 필요성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적 프로메테우스주의를 과학, 기술 그리고 사회를 통한 자연의 지배와 통제로 이해할 수 있는데, 제1차 산업혁명에서는 증기와 자동화에 기반을 두었고, 포드주의적 전환에서는 효율성과 조립 라인의 테일러주의에 기반을 두었으며, 그리고 경제와 통신에 있어서의 컴퓨터적 전환은 우리의 금융 연결망 사회를 초래하였다. 게다가 자본의 새로운 체계들은 21세기의 NBIC 기술들로 이행하고 있다. 제1차 산업혁명에 대한 마르크스의 최초 비판을 비롯하여 이것들은 모두 자세히 그리고 심층적으로 탐구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기본적 통찰은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다른 자본 형식들에 대해 갱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십 세기 동안 좌파는 산업적 정치경제와 기계 문명에 대한 마르크스의 기본적인 경제적 통찰에서 벗어나서 문화로 전환했다. 나는 이런 전환이 끔찍한 오류는 아니었다고 믿고 있지만, 그것은 마르크스의 분석에 의해 제시된 본래의 전망을 잊어 버리게 되었고, 그래서 경제-군사-산업 복합체들에 동조하는 다양한 과학적 및 기술적 전환들에서 자본주의가 취하고 있었던 프로메테우스주의의 형식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루카치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스탈린주의의 실용적 몰락과 사회주의 극가 전제의 소멸과 더불어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우리는 과거 실패들에 관해 곰곰히 생각할 여유가 더 이상 없지만, 우선 그런 실패들을 가능하게 만든 역사적 양태들을 탐구하면서 미래에 대한 우리 전망을 재조정해야 한다.

 

근자에 좌파는 내파하고 있었으며 자체 구성원들 간에 서로 파괴하는 전쟁에 빠져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절망과 자기패배 의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것은 종식되어야 한다. 마르크스를 진지하게 고려하여 그의 최초 통찰에서 다시 시작할 시기이다. 동시에 마르크스의 통찰을 우리가 토라처럼 철저히 추종해야 할 어떤 종류의 동결된 역사적 문서로 간주하지 말아야 한다. 마르크스는 변화, 역동성 그리고 인간과 사회의 미래 개량에 관해 말했다. 나는 마르크스가 정말로 그것을 의미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마르크스가 오늘날 여기에 존재한다면, 그는 좌파 저널들에서 노골적인 절망과 서로에 대한 자기비하적인 공격을 수반하면서 대체로 나타나는 패배주의를 보고 머리를 흔들었을 것이다. 슬프게도 공격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마르크스가 실제로 말한 것에 대해 부적절하게 알고 있다. 연대 대신에 좌파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정치적 및 사회적 관련 문제들을 극복하는 것과 거의 아무 관계도 없는 인종, 젠더 그리고 성 차별 전쟁들의 정체성 요법들로 원자화되어 버렸다.

 

쟁점들의 기저 집합은 다음과 같다.

 

1. 기후 변화와 파국론 일반(진행 중인 여섯 번째 멸종 등)

2. 자원 고갈(물, 토양, 에너지, 식량 등. 지속 가능성의 필요성)

3. 지역적 및 국제적 층위에서의 불평등. 일회용 인간으로 불리는 사람들의 배제 등.

4. 경제적 자원 전쟁. 석유, 광물 등 자원 등에 의해 초래되는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다른 국가들에서 벌어지는 전쟁.

5. 제1세계의 긴축.

6. 지구 전역에서 일어나는 인종차별주의와 경찰의 야만 행위(감옥 행성 등)

 

좌파에 의해 조직될 필요가 있는 영역들의 목록은 계속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우리는 저널과 출판물에서 내분과 학술적인 꼼수만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책들이 연이어 출판되지만, 직접 행동주의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 채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이런 문제들은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실제로 상황을 바꾸기 위한 계획을 실제로 구성하기 위해서는 이성에 의해 조율된 상상이 부족할 뿐인가? 바퀴를 공전시키는 것이 아닌 무언가를 할 시기이다.

 

진행 중인 내 자신의 작업에서 나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적 전망이 바로 우리 눈 앞에서 자체의 유토피아적 미래를 어떻게 구성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는 한편으로, 이 세기에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조직하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유토피아적 미래는 생물학적 구별짓기, 경제적 구별짓기 그리고 계급적 구별짓기에 의거하는 포함/배제 원리들에 기반을 두는 것일 것이다. 미시적 서사들로 분할되어 있는 인종, 젠더 그리고 성 차별 관련 쟁점들에서 우리가 지역적 층위에서 보게 되는 많은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더 큰 틀에서 그것들을 볼 수 있게 하는 메타 서사들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나는 푸코의 기본 전제들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신자유주의 또는 후기 자본주의에 대한 우리 비판의 일부로서 이런 다양한 쟁점들을 편입시킬 수 있는 더 큰 틀에 대한 필요성을 거부한 점에 있어서 그가 목욕물과 함께 아이를 버렸다고 생각한다.

 

[...]

 

기업주의는 이런 저런 식으로 인간들에 관해 더 이상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 자본의 비물질화 또는 기호화로 특징지워지는 최근 판본의 자본주의에서 모든 인간들은 위험과 실패로 처분 가능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가 이 기계를 정지시키기 위해 집단적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면 세계는 파멸될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하지 않는다면 누가 할 것인가? 신자유주의적 트랜스인간주의 의제는 엘리트와 부호 계급이 새로운 형태들의 우생학(그렇게 부르지는 않겠지만, 국제 보건 프로그램들을 활용하는)을 통해서 과잉 인구를 지구에서 서서히 제거하면서 기술적 계획들로 그들의 미래를 향상시킬 그런 것이다. 이런 신자유주의적 프로메테우스주의는 약제, 의료, 기술 등을 통해서 인간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그런 식으로 인간을 극복하고자 한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것인가?

 

트랜스인간주의 정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인 졸탄 이츠반(Zoltan Istvan)이 서술하듯이, "트랜스인간주의는 과학과 기술로 인간 육체를 개선하기를 바라는데, 말하자면 그것은 사람들이 진화하는 것을 돕고 싶어한다. 그것은 어떤 운동에 대한 기묘한 문화적 및 철학적 입장이다. 그래도 진화가 바로 트랜스인간주의가 시작되게 하려고 겨냥하고 있는 것인데, 트랜스인간주의자들은 빙하기에 걸친 자연 선택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진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점만 제외하고 말이다." 그들은 인류를 신자유주의적 의제에 알맞게 개량할 수 있는 신의 역할을 수행하기를 바란다. 이것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은 고통, 죽음 그리고 인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관념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누구인지, 또는 우리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에 기반을 둘 뿐 아니라,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지와 우리가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도 기반을 두어야 하는데, 과학과 기술이 우리와 관련된 매우 많은 것들을 변화시키기 시작하고 있는 21세기에는 특히 그렇다. 트랜스인간주의의 목적은 모든 사람을 그들이 바란다면 그들이 될 수 있는 가장 강한 최선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그들이 바라지 않는다고 선택하면 고통, 죽음, 능력 부족 그리고 복지 부족이 다시는 결코 누구에게도 닥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평등과 정의에 기반을 둔 세계의 건설과 관련된 것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사실상 대부분의 우파 트랜스주의자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고, 그래서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길이 유일한 길이다. 그들의 유토피아적 체계를 공유하면서 부호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능력이 향상된 인간들의 새로운 전지구적인 코스모폴리탄적 세계에 편입될 것이다. 여타의 사람들은 그들의 진주빛 궁전들과 사악한 낙원들의 대문 밖에 남겨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마니교적인 이분법적 전망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오늘날 세계에서 볼 수 있다. 우리의 빌어먹을 눈을 뜨기만 하면 미래는 우리 주변 전체에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