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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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브래시어: 오늘의 에세이-프로메테우스주의와 그것의 비판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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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8. 9.

 

프로메테우스주의와 그것의 비판가들

Prometheanism and its critics

 

―― 레이 브래시어(Ray Brassier), <<가속주의 선집(The Accelerationist Reader)>>, pp. 467-87.

 

스스로를 미래로 정향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래는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다시 말해서, 개체들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종으로서 우리는 미래를 향한 어떤 종류의 투자를 집단적으로 가질 수 있는가? 이것은 매우 단순한 한 가지 의문으로 귀결된다. 시간으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시간이, 우리가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우리를 갖고서 무언가를 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으로, 또는 심지어 시간에게 무언가를 하려고 시도해야 하는가? 또한 이것은 미래와 관련하여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 것이고, 미래가 근대성의 기획에서 그것에 부여된 뛰어난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지 여부를 묻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포기해야 하는가? 미래를 포기한다는 것은 계몽주의라는 지성적 기획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부추기는 사상가들은 부족하지 않다. 우파 옹호자들은 이른바 자연적 질서 또는 신성한 질서을 반영하는 고대의 위계들을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한다. 그런데 20세기 전체에 걸쳐 이런 반근대주의―그리고 계몽주의 비판―에는 영향력이 있는 좌파 옹호자들도 많이 관여했다. 지금까지 그들은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정치적 및 인지적 야망의 급진적인 규모 축소를 통해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국소적인 시민적 정의의 고립된 지역들을 구축함으로써 보편적 부정의의 소규모적 교정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정의와 해방이라는 이상들을 신봉하는 사람들에 의한 정치적 야망의 이런 규모 축소가 프로메테우스적 기획으로서의 공산주의가 붕괴한 가장 두드러진 결과일 것이다.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명백히 평등과 정의의 국소적인 고립된 지역들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평등과 정의라는 이상들에 의거하여 세계를 개조하겠다는 관념은 일반적으로 위험한 전체주의적 환상이라고 비난받는다. 좌파든 우파든 간에, 이런 서사들은 갈릴레오 이후의 합리주의 그리고 자연의 합리화에 대한 합리주의의 옹호에서 전체주의의 악으로 직선을 긋는다.

 

나는 계몽주의적 프로메테우스주의에 대한 이런 철학적 비판의 기저에 놓여 있는 전제들 가운데 일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계몽주의의 주요한 지식적 미덕은 시간이 앎 속에 도입하는 비평형을 인식하는 것에 놓여 있다고 제안하고 싶다. 앎은 시간이 걸리지만, 시간은 앎을 수태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계몽주의의 합리주의적 유산은 시간의 비평형을 긍정한다. J.G. 발라드(Ballard)의 최고 서사들에서 분명히 표명되는 파국적 논리는 바로 어긋난 시간을 생성하는 비평형의 인지적 전유와 관련된 것인데,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선형적 연쇄를 재구성한다. 이런 비평형을 긍정하는 것은, 지젝이 유용하게 지적하듯이, 헤겔이 이성, 조정 능력이 아니라 오성, 대립 능력에 귀속시키는 미덕, 즉 헤겔이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라고 부른 것에 관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결국 이성에 의해 절정에 이르게 될 부정적인 것의 역능을 최초로 구사하는 것은 오성, 즉 분할하고 대상화하며 차별화하는 능력이다. 이것은 인지에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우리가 대립을 극복한다고 추정할 수 있기 전에 우리는 먼저 그것을 올바르게 분명히 표명할 수 있어야 한다. 전자는 '좋은' 것으로 지지하는 한편으로 후자는 '나쁜' 것으로 책망하면서, 그것들이 별개의 능력들인 것처럼, 그저 이성을 오성에 대립시키거나, 또는 모순을 판단에 대립시키는 것은 변증법적 단견이다. 오성만이 이성을 오성에 대립시킬 수 있을 것이다. 변증법은 그것들의 불가분성을 확언한다.

 

비평형이 인지적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면,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바로 이 단언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규범적 근거를 옹호할 길을 찾아내야 한다. 사물들은 마땅히 그래야 하는 대로의 것이 아니라는 주장과 사물들은 이해되고 재조직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규범적 지위를 옹호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행하는 데에는 '우리는 우리 자신를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의 명료함을 옹호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프로메테우스주의란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것과 우리가 우리 자신 및 우리 세계를 변형시킬 수 있는 방식들에 대한 미리 결정된 한계를 가정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주장일 뿐이다. 그런데 물론, 이것이 바로 신학적 적절성과 경험주의적 양식이 공동으로 위험한 오만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글은 프로메테우스주의에 몰입할 기획의 기원을 개략적으로 서술하는 소묘이다. 그것은 명백히 불완전하다. 지금 당장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내 생각에 계몽주의의 유산에 대한 어떤 철학적 평가도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는 기본 문제들 가운데 일부를 전개하려고 시도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 평가의 핵심에 놓여 있는 근본적인 의문들은 이렇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가? 모든 사람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야망을 포기하고 겸손해져야 하는가?

 

나는, 프로메테우스주의는 주관론(subjectivism)―그런데 주의론(voluntarism) 없는 자율성을 명확히 표명하는 자아 없는 주관론―의 재천명을 요구한다고 제안하고 싶다. 이십 세기 철학적 문헌에서의 프로메테우스주의 비판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가장 중요한 대표자인 형이상학적 주의론에 대한 비판과 결부되어 있다.

 

주관론적 주의론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은 '나노윤리의 철학적 토대에 있어서의 몇 가지 문제(Some Pitfalls in the Philosophical Foundations of Nanoethics)'라는 에세이에서 장-피에르 뒤피(Jean-Pierre Dupuy)에 의해 반영되는데, 그 에세이에서 뒤피는 인간의 능력 향상과 이른바 트랜스인간주의(transhumanism)에 관한 논쟁들과 관련하여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전개한다. 기술과학적 프로메테우스주의에 대한 뒤피의 비판을 하이데거의 주관론 비판과 관련시키는 연결 고리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인데, 아렌트는 뒤피에게 영감을 주는 주요 인물로서 그의 사유는 하이데거에게 직접 빚을 지고 있다. 내가 검토하고 싶은 것은 이런 철학적 계보이다.

 

그런데 왜 프로메테우스주의는 결코 낡아빠진 형이상학적 환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가? 그것은 이른바 NBIC 융합의 형태로 매우 잘 살아 있기 때문이다. 뒤피는 '인간의 수행 능력을 개선하기 위한 융합 기술들(Converging Technologies for Improving Human Performance)'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미합중국 정부의 국립 과학 재단 2002년 6월 보고서로부터 인용하는데, 그 보고서는 나노기술, 생명기술, 정보기술 그리고 인지과학(NBIC)의 융합이 진정한 '문명의 변형'을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옹호되는 프로메테우스주의는 우파의 프로메테우스주의인데, 그것의 옹호자들은 인간 역사의 가능한 것들에 관한 경쟁하는 서사들의 전쟁에서 승자로 등장했다고 그들이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지지자들이다. 그렇다면 왜 NBIC 기술은 이런 급진적인 변형 역량을 갖추고 있는가? 그것의 옹호자들에 따르면 그것 덕분에 인간 본성의 기술적 개량이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뒤피는 자신이 이 주장에서 탐지하는 혼동과 오류들에 대한 정교한 철학적 비판을 시도한다. 뒤피의 경우에, 현대 생명윤리적 담론의 공리주의적 편견들이 NBIC의 활용과 오용에 관한 문제의 고유한 존재론적 차원을 파악하지 못하게 막는다. 뒤피는 NBIC,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인간 능력 향상의 옹호자들은 존재론적 비결정성과 인식적 불확실성을 체계적으로 융합한다. 그들은 사실상 실재의 구조와 관련된 존재론적 문제인 것을 우리 지식의 한계에 관한 인식적 문제로 전환한다. 뒤피가 서술하듯이, '인간의 창조적 활동과 지식의 정복은 양날의 칼인 것으로 판명되[지만...] 그것은 우리가 그런 칼을 사용하는 것이 좋은 일인지 아니면 나쁜 일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창조적 활동의 결과가 그저 불확실한 것이라기보다 존재론적으로 비결정적인 것이라면, 이것은 그것이 초월성의 구조인 인간 실존의 구조에 의해 조건지워지기 때문이다. 초월성에 의거하는 인간 실존에 대한 이런 규정은 주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과 관련되어 있다. 인간들이 세계의 다른 존재자들과 같지 않는 까닭은 그들의 존재 방식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호혜적으로 명확히 표명되는 시간적 투사의 구조에 의해 특징지워지기 때문이다. 인식적 불확실성과 존재론적 비결정성 사이의 융합은 하이데거의 의미에서 실존적이고, 그래서 어떤 고정된 본질도 결여하는 인간의 조건을 다른 존재자들의 본질과 다른 특정한 차이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본질을 갖춘 인간의 본성과 혼동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에 관한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관념은 '동물'이라는 유에 속하지만, 그것이 '합리적'이든, '정치적'이든, '말하기'이든 간에, 어떤 특정한 속성에 의해 다른 동물들과 변별되는 생명체에 관한 관념이다. 그렇지만, 하이데거의 경우에, 인간들은 결코 다른 존재자들과 종류에 있어서 다른 것이 아니라, 다른 한 유형의 차이에 의해 구성된다. 하이데거는 이 다른 한 유형의 차이를 실존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뒤피의 경우에, 그것이 바로 실존과 본질 사이, 즉 조건으로서의 인류와 자연(본성)으로서의 인류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를 표명하지 못하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존재자들의 특성들을 조작할 수 있게 하는 데 있어서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판명된 바로 그 기법들을 사용하여 인간 본성의 특성들을 수정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고무한다. 인간 실존을 경험적 특성들의 고정된 목록으로 균등화시키는 것은 인간들이 되기에 적절한 것과 부적절한 것(하이데거가 '진정성'과 '비진정성'이라고 부르는 것들) 사이의 실존적 차이를 우리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한다. 인간 본성의 본원적인 유연성에 관한 주장들의 근저에 놓여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균등화이다.

 

뒤피는 인간들에게 주어지는 것과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설명과 더불어 실존적 조건과 본질적 본성 사이의 구별짓기를 채택한다. 아렌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지상의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조건에 덧붙여,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그 조건으로부터, 인간들은 끊임없이 스스로 만든 독자적인 조건을 창조하는데, 이것은 인간적 기원과 자체의 가변성에도 불구하고 자연적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조건화 역능을 보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 논쟁에서 아렌트의 사도인 뒤피의 경우에, 인간 조건은 주어진 것들과 만들어진 것들, 인간들이 독자적인 자원을 통해서 생성하고 생산하는 것들과 인간들의 실천적 능력과 인지적 능력들을 초월하는 인간 형성에 대한 제약들의 불가분한 혼합물이다. 뒤피의 진술에 따르면, 이런 요소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다음의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주어진 것과 만들어진 것 사이의 취약한 평형을 여전히 고려하면서 자신을 형성하는 것, 자신을 조건짓는 조건을 상당한 정도로 형성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우리는 만들어지는 것과 주어지는 것 사이의 '취약한 평형'을 고려해야 한다는 이 주장을 프로메테우스주의에 대한 철학적 비판을 위해 기본적인 것이라고 간주한다. 프로메테우스주의가 위태롭게 하는 것은 바로 인간 형성과 이런 형성을 구성하는 것―신에 의해 주어지든 자연에 의해 주어지든 간에―사이의 이런 불안정한 평형이다.

 

인간 본성의 문제, 즉 '나는 내 자신에게 하나의 문제가 되어버렸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개인심리학적으로 이해하든 일반적인 철학적 의미로 이해하든 간에, 해결할 수 없는 것인 듯 보인다. 우리는 우리가 아닌 주변의 모든 사물들의 자연적 본질들을 알고 결정하며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그림자를 뛰어넘는 것과 같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인간이 다른 사물들과 동일한 의미에서 어떤 본성 또는 본질을 갖추고 있다고 가정할 어떤 이유도 부여받지 못했다.

 

인간들은 다른 사물들과 동일한 의미에서 어떤 본성 또는 본질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인간들은 스스로를 대상화할 수 없다는 주장은 명백히 하이데거적인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 인지의 고유한 유한성에 대한 칸트의 설명을 급진화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칸트의 경우에, 우리는 세계를 창조한 신이 세계를 아는 방식으로 세계를 알 수 있다는 것에서 원칙적으로 배제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신과 달리 우리는 자체가 알고 있는 객체를 만들어내는 지성적 직관이라는 능력을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은 각각의 모든 특수한 것에 관한 직관적 지식을 보유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런 것에 관한 그의 사유가 그것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신의 지능은 그것의 만들기가 어떤 주어진 것에 의해서도 제약받지 않는 무한한 생성적 지능이다. 그러므로 세계에 관한 신의 지식은 절대적이고 직접적이며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직관적 지성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실재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우리가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 수용하는 실재에 관한 정보에 의해 부분적으로 제약받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정신이 만드는 것이 세계가 주는 것과 결합하는 한에 있어서 사물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인지를 초월하는 것은 자체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사물들의 창조된 본성일 뿐이다. 이것은 자체의 신성한 창조자가 이해하는 대로의 각각의 모든 사물의 무한한 복잡성이다. 그런데 우리의 정신은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물들을 부분적으로 그리고 불완전하게 표상할 수 있을 뿐이다.

 

하이데거는 유한성을 존재론화함으로써 칸트를 급진화한다. 실존으로서 인간은 자체의 본질에 대한 모든 객관적인 결정을 초월한다. 이런 존재론적 초월성이 유한성의 뿌리에 놓여 있다. 하이데거의 경우에, 인간 실존의 유한성은 인식론적 조건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 소여이다. 하이데거는 우리는 창조자가 알고 있는 대로의 사물들 자체에 관한 어떤 초월적 지식도 갖고 있지 않다는 칸트의 주장을 수용한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경우에 인간 실존은 한 가지 새로운 유형의 초월성의 현장인데, 그것은 무한하고 신성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유한하고 인간적인 것이다. 그리고 현존은 유한한 초월적인 것을 구성하기 때문에 그것은 객체들의 인지 가능성을 조건짓는다. 인지적 대상화는 인간 실존에 의해 조건지워지기 때문에 인간들은 그들이 다른 객체들을 아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알 수는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대상화의 조건을 대상화하는 것을 필요로 할 것인데, 이것은, 아렌트가 말하듯이, 우리 자신의 그늘로 도약하려고 시도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자기 대상화에 관한 이런 금제 때문에 인간 현존은 일련의 객관적 결정들을 통해서 그것의 핵심을 묘사하려는 모든 시도를 초월한다. 사실상, 심리적이든 역사적이든 인류학적이든 사회학적이든 간에, 인간 본성에 관한 모든 실정적 특성 규정은 언명되지 않은 형이상학적―그리고 하이데거의 경우에 이것은 또한 신학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편견들에 의해 궁극적으로 결정된다. 그러므로 과학의 잠재적인 형이상학적 편견들, 즉 과학의 기본 개념들을 결정하지만 과학 자체는 명확히 표명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전제들을 노출시키는 것에의 하이데거적 몰두.

 

이런 하이데거적 시각에서 바라보면, 본질적 가소성을 인간에게 귀속시켰거나, 또는 인간들은 스스로를 본원적으로 개량할 수 있다고 주장한 철학자들은 실존의 초월성을 물화하는 형이상학자들로 비난받을 수 있다. '인간은 존재[...]와 자유로운 의식적 활동이 인간의 종적 특성을 구성한다'는 청년 마르크스의 주장을 고찰하자. 뒤피의 하이데거적 시각에서 바라보면, 마르크스가 인간 종을 '자유로운 의식적 활동'―인간들로 하여금 스스로와 자기 세계를 재형성할 수 있게 하는 활동―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인간을 구성하는 초월성을 물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생산이라는 술어에 암호화되어 있는 퇴적된 형이상학적 가정들에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초월성을 생산으로 물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주의자들의 경우에, 인간이 행위자, 제작자 또는 사물들의 생산자라는 주장은 유한한 초월성으로 적절히 이해되는 인간 실존의 형이상학적 물화로 특징지워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일 뿐이다'라는 사르트르의 주장은 초월성을 사르트르가 "대자"라고 부르는 자기 의식의 무화 능력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초월성을 물화한다는 혐의를 받을 수 있다. 하이데거주의자들은 대상화할 수 없는 초월적인 것으로 특징지워지는 것, 즉 현존재의 초월성의 이런 형이상학적 물화들을 알아채는 것을 경력으로 삼았다.

 

실존의 초월성과 생명의 초월성 사이의 연결 관계는 아렌트에서 인용한 다른 한 중요한 글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인공적 세계를 가진다는 점에서 인간 실존은 모든 동물의 환경과 구별되지만, 생명 자체는 이런 인공적 세계 밖에 있으며, 인간은 이 생명을 통하여 살아 있는 다른 모든 유기체와 관계한다.

 

초기 하이데거에서 '생명'은 현존재 또는 실존을 가리키는 술어이다. 그래서 여기서 '생명'에 대한 아렌트의 언급은 과학적 연구 대상으로 변환시킬 수 없는 실존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다른 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그럴듯하다. 아렌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과학자들이 100년 안에 생산할 수 있다고 말하는 미래의 인간은 이미 주어져 있는 자신의 실존에 대한 인간의 반란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이 미래인은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진, (세속적으로 말하자면) 알지 못하는 곳으로부터 온 이 공짜 선물을 버리고 자신이 만든 것을 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프로메테우스의 죄는 만들어진 것과 주어진 것 사이―독자적인 인지적 자원 및 실천적 자원을 통해서 인간들이 생성하는 것과, 우주론적으로 특징지워지든, 생물학적으로 특징지워지든, 역사적으로 특징지워지든 간에,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 사이―의 평형을 파괴하는 것에 있다. 프로메테우스적 침범은 주어진 것을 만들기에 놓여 있다. 주어진 것과 만들어진 것 사이를 분리하는 존재론적 간극을 연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집함으로써 프로메테우스주의는 유한성의 존재론화를 거부한다. 아렌트와 뒤피 둘 다의 경우에 이것이 프로메테우스적 병리학의 근원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과 주어진 것 사이의 평형의 적절한 지점을 식별할 수 있는가? 우리가 언제 이런 섬세한 균형을 파괴해버렸는지 어떻게 알아내야 하는가? 뒤피가 긍정적으로 인용하는 이반 일리치(Ivan Illich)의 경우에는 그런 일들을 행하기 위한 명쾌한 기준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탄생, 고통 그리고 죽음을 인간 조건의 제거할 수 없는 상수들로 인식하는 것에 있다. 일리치는 이렇게 적고 있다.

 

● 우리는 결코 고통을 제거하지 못할 것이다.

● 우리는 모든 질병을 치료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우리는 확실히 죽을 것이다.

 

그러므로, 감각적 동물로서 우리는 건강 추구가 불쾌한 질병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직면해야 한다. 과학적, 기술적 해결책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상황의 취약성과 우연성을 수용하는 일상적인 과업이 존재한다. 통상적인 '건강' 돌봄에 놓여져야 하는 합당한 한계가 존재한다.

 

일리치에 따르면, 미리 정해진 어떤 한계를 너머 생명을 연장하거나 건강을 개선하기를 바라는 것은 '터무니없다'. 중요한 것은, 이런 한계는 경험적인 것, 즉 생물학적인 것인 동시에 초월적인 것, 즉 실존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고통과 죽음을 감소시키려고 노력함에 있어서 이런 경험적-초월적 한계에 상관하지 않는 합리성은 '불쾌한 질병'이다. 이성은 터무니없다. 이것은 프로메테우스적 합리주의에 맞서서 제기되는 근본적인 반대이다. 합리주의는 병리적인 것으로 간주되는데, 왜냐하면 합리주의는 탄생, 고통 그리고 죽음의 실존적 필연성을 인정하는 것을 척도로 삼는 합당함의 기준에 따르면 터무니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탄생, 고통 그리고 죽음을 불가피한 사실, 즉 주어진 것으로 수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정확히 무엇이 합당하다는 것인가? 그리고 어떤 기준으로 우리는 피할 수 있는 고통과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분별할 수 있는가? 한때 불가피했던 많은 고통이, 전적으로 근절되지는 않았지만, 대단히 감소했다. 그런데 탄생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그것들을 당연히 생물학적으로 절대적인 것들로 간주하는 것과 관련하여 의심스러운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정도까지 변형되었다. 게다가 고통의 불가피성에 관한 주장은 두 가지 기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얼마나 많은 고통을 인간 조건의 제거할 수 없는 특징으로 수용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떤 종류들의 고통을 불가피한 것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지금까지 역사는 참을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고통의 양뿐 아니라 종류에 있어서도 상당한 변동이 있었다고 가르쳐준다. 일리치에 의한 생물학적 사실들의 존재론화에 있어서 양과 질 사이의 관계의 문제적 본성을 음미하기 위해서는 의학의 발달에 의해 완화된 고통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일리치의 메시지의 신학적 색조는 뒤피가 역시 인용하는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 의해 명확하게 드러나게 된다.

 

예수가 신의 왕국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윤리적 규칙도 초월하며, 완전히 에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상 세계를 파괴할 수 있다. 그런데 또한 일리치는 한계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이런 선언 속에서 극단적인 휘발성을 인식한다. 왜냐하면 도대체 이런 자유 자체가 규칙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면, 한계가 없는 것이 참으로 경악스러운 방식으로 인간 생명을 침범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프로메테우스주의의 추정적 병리학에 대한 다른 한 효과적인 표현을 갖게 된다. 프로메테우스적 오류는 아무 규칙도 없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규칙을 구성하는 것이다. 아무 규칙도 없이 존재하는 것은 만들기의 내재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에서 주어진 것의 초월성이다. 프로메테우스적 오류는 개념화할 수 없고 조직의 모든 기록을 넘어서는 것, 다시 말해서, 신에 의해 배치되거나 주어진 것을 개념화하고 조직화하려고 시도하는 것에 놓여 있다. 다음과 같이 적고 있을 때 뒤피는 이런 신학적 협착에 대한 아마도 가장 유창한 표현을 제공한다.

 

인간의 '상징적 건강'은 의식적으로 그리고 자율적으로 자기 환경의 위험을 극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만인이 직면하고 항상 직면할 일련의 대단히 친숙한 위협들, 즉 고통, 질병 그리고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에 놓여 있다. 이 능력은 전통 사회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의 필멸적 조건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든 인간의 문화로부터 인간에게 전래된 것이다.

 

신성한 것이 이것에 있어서 근본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근대 세계는 그것이 자의성과 부조리성을 찾아낼 수밖에 없는 전통적인 상징적 체계들의 폐허 위에서 태어났다. 탈신화화라는 근대적 기획에서 근대 세계는 이런 체계들이 인간 조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한편으로 한계를 고정시키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근대 세계가 신성한 것을 이성과 과학으로 대체했을 때, 그것은 한계에 대한 모든 감각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의미를 부여하는 바로 그 능력도 희생했다. 의학적 팽창은 고통과 장애의 제거 및 죽음의 무한한 유예가 의료 체계의 무한한 발달과 기술의 진보 덕분에 바람직한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목적이 되게 하는 신화를 동반한다. 오로지 근절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 인간 조건의 자연적으로 불가피한 유한성이 의미의 원천이 아니라 소외로 지각된다면, 우리는 덧없는 꿈을 추구하는 대가로 무한히 귀중한 무언가를 상실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무한히 귀중한' 것은 인간 실존의 유한성 때문에 우리는 고통, 질병 그리고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종교의 근원에는 고통은 유의미하다는 주장이 놓여 있는데, 그 주장은 결코 어떤 이유 때문에 고통이 발생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종교는 고통의 합리화와 관련되어 있지 않다―고통은 해석되고 유의미하게 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제기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고통이 무언가를 의미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매우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고통, 질병 그리고 죽음에 대한 우리의 민감성에서 의미를 추출하게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고통, 질병 그리고 죽음은 유의미한 실존을 위한 전제 조건이라는 주장을 승인하지는 않는다. 유한성은 우리의 의미 만들기의 지평선이라는 사실이 유한성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의미―감각, 목적, 정향 등―의 조건이라는 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유의미한 조건으로서의 유한성과 의미의 조건으로서의 유한성 사이의 이런 합선이 프로메테우스주의에 대한 종교적 비난을 보증하는 치명적인 융합이다.

 

NBIC  프로그램에서 감지하는 프로메테우스적 오만에 대한 뒤피의 적의는 데카르트적 합리주의에 의해 탄생된 기계론적 철학에 대한 하이데거 이후의 비판에서 비롯된다. 기계론 철학의 현대 철학적 확장은 뒤피가 계몽적으로 서술한 마음의 기계화라는 시도이다. 자연 자체를 단일한 복잡한 메커니즘으로 간주하는, 기계적 인과 관계에 대한 충분히 정교한 설명과 더불어 '메커니즘'에 대한 충분히 자유주의적인 이해를 감안하면, 계산주의적 패러다임의 렌즈를 통해서 마음을 바라봄으로써 마음을 기계화된 자연에 통합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지금까지 계산주의적 패러다임은 수많은 철학적 비판을 받았다. 뒤피는 이런 비판들을 자각하고 있지만, 연결주의(connectionism) 같은, 고전적 계산주의(computationalism)에 대한 대안들이 계산주의적 패러다임을 너무 많이 인정한다고 간주하는 듯 보인다. 뒤피의 경우에, 마음의 기계화는 다음과 같은 역설을 초래한다.

 

기계화를 수행하는 마음과 그것의 대상인 마음은 시소의 양끝처럼 두 가지 별개의(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더라도) 존재자들인데, 이쪽은 형이상학적 인간주의의 천국으로 언제나 더 높이 상승하는 반면에[인간들은 자신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저쪽은 자기 해체의 심연으로 더 깊이 하강한다[조건에서 메커니즘으로의 인간의 환원은 전통적으로 간주된 인간의 특권들을 파괴한다]. [...]

 

그럼에도 이런 주체의 승리가 주체의 소멸과 동시에 일어난다고 간주할 수 있다. 인간이 주체로서 자신에 대해 이런 종류의 역능을 행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객체의 등급으로 환원되어 어떤 목적에도 어울리게 재구성될 수 있다는 것이 필요하다. 하강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어떤 상승도 일어날 수 없으며, 그 반대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만들어진 것과 주어진 것 사이의 불안정한 평형을 위협하는 것은 주관론의 극단에서 대상화의 극단으로의 이런 시소 타기이다. 뒤피에 따르면, 우리가 스스로를 자연의 일부로 이해하면 할수록, 즉 스스로를 복잡한 메커니즘으로 성공적으로 대상화하면 할수록, 우리는 목표나 목적들을 독립적으로 더욱 더 결정할 수 없게 된다. 일단 인간임이 더 이상 다른 한 종류의 차이―실존―가 아니라 다른 한 유형의 존재, 즉 특별히 복잡한 자연적 메커니즘일 뿐이라면, 위험한 점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설명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의 시도를 정향하는 목표 또는 목적을 투사할 수 있게 한 의미 형성 자원을 우리가 상실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스스로를 미래를 향해 전통적으로 정향시키게 하는 목적들이 자체적으로 무의미하다―유의미한 목적이라기보다는 무의미한 메커니즘이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우연히 생성된 또 하나의 자연적 현상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더욱 더 규정할 수 없게 된다. 우리의 자기 대상화는 우리는 저런 식이라기보다는 이런 식이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 필요한 규범적 자원을 우리에게서 박탈한다.

 

주어진 것과 만들어진 것 사이의 평형의 파괴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은 인간들이 그것을 통제하고 조작할 수 있는 한, 즉 유용한 것인 한에 있어서 인간들에게 참인 것과 존재하는 독특한 것―자체의 본질 덕분에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의 것―으로서 창조된 덕분에 참인 것 사이의 구별짓기이다. 인공적 진리 또는 사실적 진리와 신성한 진리 또는 본질적 진리 사이의 차이가 위태롭게 된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만이 실제로 알 수 있게 되는 시점에서 참된 것과 만들어진 것은 교환 가능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것과 알려지는 것 사이의 차이를 숨긴다는 점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실천의 우위성을 옹호하고 인지를 일종의 실천으로 간주하는 철학―가 책임이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만이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이다.

 

뒤피는 유대-기독교 신학에서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그것이 신의 창조성과 인간의 창조성 사이에 확립한 경계선이라고 주장한다. 프로메테우스주의와 관련하여 이의가 제기될 수 있는 것은 신이 행하는 것을 행할 수 있다고 오만하게 주장하는 인류가 아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뒤피는 유대-기독교는 인간의 창조성과 신의 창조성 사이에 긍정적인 유비가 존재한다는 점을 가르쳐준다고 주장한다. 인간들은 생명, 살아 있는 피조물, 즉 골렘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뒤피에 의해 인용된 판본의 동화에서 골렘은 자신을 해체하라고 즉각적으로 명령함으로써 그를 만들어낸 마법사에 대응한다. 나를 창조함으로써 당신은 본원적인 무질서를 창조에 도입해 버렸다고 골렘은 그의 창조자에게 말한다. 주어질 수만 있는 것, 즉 생명을 만듦으로써 당신은 본질들의 배치를 위반해 버렸다. 이제 분별할 수 없는 본질을 갖춘 두 가지 살아 있는 것들, 하나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 다른 하나는 신에 의해 주어진 것이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과 신에 의해 주어진 것 사이의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골렘은 그의 창조자에게 자신을 파괴하라고 즉각적으로 명령한다. 신의 창조성과 인간의 창조성 사이의 유사성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독특한 별개의 본질―그것의 궁극적 원천은 신이 될 수밖에 없다―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 역능을 획득하게 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 합성 생명의 전망은 바로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차이가 가장 본원적인 의미에서 본질적인 것―그저 종류에 있어서의 차이가 아니라, 다른 한 유형의 차이―으로 간주되는 한에 있어서 식별 불가능한 것들의 동일성이라는 형이상학적 원리를 위태롭게 한다. 이것이 프로메테우스주의와 관련하여 심란하게 하는 것이다. 생명의 제조, 다른 한 종류의 차이의 제조는 규칙 없는 것들에 대한 규칙의 생성일 것이다. 아무리 흥미롭더라도, 우리는 평형의 파괴가 본질적으로 파괴적인 까닭을 듣지 못한다. 뒤피에 의해 인용된 우화에서 신이 정한 평형을 파괴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이의가 제기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당신은 비평형을 실존 속에 도입해 버렸다. 그런데 이것은 자연적인, 말하자면 초월적으로 정해진, 평형이 존재한다고 이미 전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평형이 정확히 어떠해야 하는지 결코 듣지 못한다. 내가 제시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런 평형의 가정이 신학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세계의 길'이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불쾌하게도 신학적인 것은 궁극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 외면할 수 없는 주어진 것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질서를 갖춘 기성의 세계이다. 이것은, 세계는 만들어졌고, 그래서 우리는 왜 세계가 어떤 다른 식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는지 감히 묻지 말아야 한다는 관념이다. 그런데 세계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세계는 아무 이유나 목적도 없이, 창조되지 않은 채로,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깨달음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알아내는 대로의 세계를 단순히 수용하지 않도록 부추긴다. 프로메테우스주의는 신의 청사진을 좇을 필요가 전혀 없이 세계의 창조에 참여하려는 시도이다. 그런 깨달음으로부터 당연히 우리가 우리의 알고 싶은 욕망을 통해서 세계 속에 도입하는 비평형은 세계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비평형보다 더 불쾌한 것도 아니고 덜 불쾌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 도출된다.

 

물론, 합리성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프로메테우스주의는 가장 위험한 형식의 형이상학적 주의론이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주의는 합리성을 초자연적 능력이 아니라 그저 규칙 지배적 활동―합리성은 규칙을 생성하고 규칙에 속박될 수 있는 능력일 뿐이다―으로 간주하는 이해의 견지에서 회복될 것 같다. 이것이 바로 칸트에 의해 제시된 합리성에 대한 설명이다. 이런 규칙들은 사전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이 다른 역사적 현상들이 우연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그런 규칙들을 우연적인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래서, 합리성에 대한 이의 제기는 만들어진 것과 주어진 것 사이, 즉 내재성과 초월성 사이의 신학적 평형을 보존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물리적 패턴들에서 규칙들이 발생할 수 있게 하는 자연적 질서 내 구조들의 뒤얽힘과 더불어 내재성의 층서화를 파악하는 것에 놓여 있다. 합리성에 관한 이런 관념에 따르면, 규칙들은 이질적 현상들을 배치하고 포섭하는 수단이지만, 그것들 자체가 역사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들과 우리가 우리의 이해에 의거하여 세계를 변화시키는 방식들은 영구적으로 재결정되고 있다. 전개되는 것은 평형을 재확립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대립을 파기하고, 그래서 지향의 파국적 전복과 우리의 기술적 독창성의 흔히 파괴적인 결과가 예견하고 통제하고 싶은 충동에 대한 어떤 반대도 구성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과 관련된 역동적 과정이다.

 

발라드는 '모든 진보는 야생적이고 난폭하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사실상 발라드의 주인공들이 겪게 되는 정신적 및 인지적 변형들은 야생적이고 난폭하지 않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진보는 야생적이고 난폭하다는 사실이 반드시 그것을 진보로서의 자격을 박탈하지는 않는다. 사실상 합리성에는 반복되는 만행이 존재한다. 그런데 모든 만행들이 동등하다는 주장, 즉 그것들을 차별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에는 일종의 감상주의가 잠재되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어떤 만행들은 다른 만행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고, 도구화의 양태들을 차별화하며 어떤 것들은 다른 것들보다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감상적이지 않다. 현상을 우회하거나 한정하거나 조작하려는 모든 시도는 본질적으로 병리적인 것이라고 자주 반복되는 주장은 바로 우리 실존의 가장 불쾌한 특성들을 영속화하는 그런 종류의 감상주의이다. 우리는 이런 특성들에 굴복하여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을 수용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그 대신에, 그리고 더 흥미롭게도, 우리는 마르크스에 잠재되어 있는 프로메테우스적 기획―더 합리적인 근거에 의거하여 우리 자신과 우리 세계를 개량하기의 기획―의 철학적 토대를 재검토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 바디우의 탁월한 미덕들에 속하는 것은 지금까지 매우 오랫동안 프로메테우스주의를 책망하는 데 사용된 피상적인 탈근대적 억견에 과감히 이의를 제기했다는 점이다. 내가 그렇듯이, 사건과 주체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바디우의 설명의 철학적 세부 내용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런 주체화의 필요성에 대한 그의 설명을 합리적 주체화를 조건짓는 생물학적, 경제학적 그리고 역사적 과정들에 대한 분석과 다시 연결시키려고 시도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 존재한다. 이것은 명백히 거대한 과업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그것은 그것의 철학적 정당성이 옹호될 필요가 있는 연구 프로그램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오랫동안 위험한 환상으로 일축당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축을 추동하는 전제들은 궁극적으로 신학적이다. 게다가, 프로메테우스주의는 부인할 수 없는 환각적인 잔여물들을 품고 있더라도, 이것들은 진단되고 분석될 수 있으며, 그리고 후속적 분석에 의거하여 변형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다소간 환각적이다. 상상적 영향력을 전적으로 결여할 합리성에 관한 꿈을 은밀히 꾸지 않는다면 그것의 환각적인 잔류물들에 대해 합리적 기획을 비난할 수는 없다. 프로메테우스주의는 이성과 상상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는 것을 약속한다. 이성은 상상에 의해 추동되지만, 또한 이성은 상상의 한계를 수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