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물질적 무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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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8. 14.

물질적 무의식

The Material Unconscious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그것을 물질적 무의식으로 부르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잘 알려져 있게도 프로이트는 인간의 자기 도취증에 세 가지 타격이 가해졌었다고 말했다. 코페르니쿠스와 지구의 탈중심화, 다윈과 진화 이론 그리고 정신분석과 무의식의 발견. 첫 번째의 타격으로 인류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두 번째 타격으로 인류는 인간이 동물과 두드러지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 번째 타격으로, 인류는 인간의 내면성이 책임을 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물적 사유, 객체에 관한 사유로 우리는 인간의 자기 도취증에 대한 네 번째 타격을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사물들에 의해 매개되어 있는 방식. 우리는 사물, 객체 또는 내가 어딘가에서 기계라고 부른 것들의 환경 속에 거주한다. 우리가 우리의 독자적인 행위주체성, 우리의 독자적인 자유 선택으로 간주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작용하는 이런 사물 또는 기계들의 행위주체성인 것으로 매우 많은 사례에서 판명된다. 확실히, 나는 어느 통로를 지나갈지 선택하지만, 내가 선택하지 못하는 것은 통로, 또는 도로, 또는 경로들 자체에 의해 결정된 선택 형식―지젝의 표현을 바꿔 말하면―이다. 이런 것들은 그것들 중에 내 선택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이미 선택된 매우 많은 선택지로서 내 앞에 놓여 있다. 나는 끝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내 존재가 매개되어 있는―내 존재의 능력이 부여되고 제약받는―세계 속에서 살아 간다.

 

자신이 물 속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물고기와 마찬가지로, 이런 사물, 객체 또는 기계들은 우리 현존의 얼개를 매우 철처히 구성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비가시적이다. 그 대신에 우리는 담론적인 것과 규범적인 것에 집중하는데, 항상 그렇듯이 물과 마찬가지로 기계들은 배경에서 조용히 윙윙거리고 있어서 우리가 무시해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하만의 표현을 사용하면, 그것들은 물러서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물들의 제국은 물질적 무의식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 우리의 등 뒤에서 조잡한 농담과 말장난을 실행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욕망과 결정들을 의식하지 못하게 구조화하는 라캉적 무의식과 마찬가지로, 물질적 무의식은 우리의 행동, 행위 주체성, 인지,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 그리고 욕망들이 외부로부터 조직되는 별난 궤도로 우리를 몰아넣는다. 그래서 언제나 이런 것들을 우리 자신의 것들이라고 오인하게 만든다. 정신분석적 무의식과 마찬가지로, 물질적 무의식은 우리가 깨닫지 못한 채 명령하는 호문쿨루스처럼 우리 내부에 있는 한 덩어리, 우리 내부에 있는 다른 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은 표면에서, 내재성의 평면에서, 어떤 친밀성보다도 더 친밀한 친밀성으로서의 외부성의 장에서 드러난다... 물질적 무의식을 알기 위해서는 브랜덤주의자나 현상학 철학자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태학자, 설계자 또는 건축가처럼 생각해야 한다. 설계자와 건축가들은 물질적 무의식의 위대한 지도 작성자들이다. 또한 그들은 물질적 무의식의 대부분을 산출한다.

 

사물적 사유가 시의적절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객체들, 모든 종류의 사물들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호학자들을 매우 매혹시킨 그런 유혹적인 사물들, 즉 상품에 사로잡혀 있다. 물론 상품은 마르크스에 의해 대단히 뛰어나게 분석된 전체적 착취 체계로 우리를 포획한다. 그런데, 보들리야르가 가르쳐 주었듯이, 또한 상품은 우리의 욕망을 관리하여 무질서한 탈주선들이 될 그런 욕망들을 길들이는 욕망의 미끼인 한편으로, 정체성, 지위, 계급 등의 기호학적 표지들로서도 작동함으로써 자기 및 사회적 관계들의 정치의 현장으로 기능할 것이다. 지젝이 주장하듯이, 랜드 로버를 운전하는 도시적 경영자는 그저 실용적, 공리주의적 사고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 하여금 자본의 세계를 견딜 수 있게 할 어떤 무의식적인 환상을 드러낸다. 상품은 타자에 대한 일종의 광채로서 표출되고, 그래서 어떤 사회적 관계들을 알리게 된다. 한계를 벗어나는 대항문화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상품들도 존재한다. 여기서 또한 우리는, 제인 베넷에 의해 매우 잘 분석되었듯이, 상품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병리 현상들에 관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의 사회적 관계들, 인지 그리고 정동성을 변형시키고 새로운 욕망과 욕구들을 창출하는 기술들의 끝없는 행진이 존재한다(인터넷은 점점 더 사치품이 아니라 하나의 권리가 되고 있는데, 왜냐하면 인터넷이 없다면 제1 세계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육체의 바로 그 얼개를 변형시키고 우리 기분에도 영향을 미치는 모든 음식과 보조 식품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것들은 우리 행성의 생태도 변형시킨다. 스테이시 알레이모 같은 이론가들에 의해 매우 멋지게 탐구되었듯이, 과학에 의해 창출된 무시무시한 혼성 객체들도 존재한다. 예전에 과학은 퓌시스, 즉 자체로부터 그리고 자체를 통해서 발생하는 것(외부에서 형태를 부여하는 테크네에 대립되는)의 영역을 탐구했지만, 이제는 유전자 변형 유기체들, 자연에서 이전에 결코 만나본 적이 없는 원자적 원소들, 살충제, 탄소 배출 등과 같은 것들의 형태에서 퓌시스와 테크네의 뒤섞임을 보게 된다.

 

도처에서 사물들이 우리에게 밀려들면서 우리의 삶, 다른 유기적 존재자들의 삶을 구조화하고 행성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일종의 기묘한 역능을 행사한다. 도처에서 가시적인 비가시적 사물들의 장이 바로 물질적 무의식이며,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사유을 요청한다. 물질적 무의식이 우리의 행위 주체성을 매개한다는 점을 인식한다는 것은 패배주의적 사유가 아니라, 진정한 행위 주체성, 즉 사유의 질서에 불과한 것이 아닌 행위 주체성을 발달시키는 첫 걸음이다. 우리는 사물의 정치, 즉 그저 입법과 설득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 설계 그리고 구성을 포함하는 정치를 발달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