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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게니 모로조프: 오늘의 서평-기술 비평의 길들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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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8. 25.

 

기술 비평의 길들이기

The Taming of Tech Criticism

 

―― 에브게니 모로조브(Evgeny Morozov)

 

오늘날의 미합중국에서 기술 비평가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기술 비평은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가? 첫 번째 의문은 쉬운 듯 보이는데, 현재 미국에서 기술 비평가라는 것은 통속적인 파괴의 요새, 실리콘 밸리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반대가 저절로 비평가의 정치―두 번째 의문에 대답하는 것을 더욱더 어렵게 만드는 누락된 것―에 관해 말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도대체 왜 정치적 소심함인가? 실리콘 밸리에 대한 비판적이거나 대립적인 태도가 비평가의 진보적 의제를 결코 보증하지는 않는다. 자체 기원이 이십 세기 초 독일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현대 기술 비평은 지금까지 흔히 보수적 대의들을 포용했다. 또한 대부분의 기술 비평가들이 정치적 범주들을 피할 것을 주장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반적인 좌파/우파 구별짓기 대신에 그들은 인간주의/반인간주의 구별짓기를 더 잘 구사한다. "생각하는 기계들의 비용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어쩔 것인가?"라는 의문―몇 년 전에 기술 저자 조지 다이슨(George Dyson)에 의해 제기된 영리한 수사법적 의문―은 이런 종류들의 우려를 멋지게 포착한다. 일반적으로 해당 "기계들"은 부실하게 교육받은 기술론자들의 정신을 납치하는 터무니없는, 비인간화하는 관념들을 구체화한 것들에 불과한 것으로 환원된다. 결국 "인간들"은 신자유주의적 제국의 시민 주체라기보다는 지구촌으로의 추상적인, 몰역사적인 망명자로 간주된다.

 

대부분의 현대 미합중국 기술 비평가들―재론 레이니어(Jaron Lanier)에서 앤드류 킨(Andrew Keen)과 셰리 터클(Sherry Turkle)에 이르기까지―은 문화적-낭만적 진영 또는 보수적 진영에 속한다. 기술적 사유가 인간의 전통들과 충돌할 때 그들은 기술적 사유의 오만한 추진력을 한탄하며, 영구적 파괴의 에토스가 자유주의적 자기의 구성 또는 대학에서 신문에 이르기까지 지표적 제도들의 생존에 대해 의미하는 바로 초조해 한다. 그래서 실리콘 밸리를 공격하는 문학적 에세이 또는 소설 작품들을 쓰는 간헐적인 동료 여행자들―조너선 프랜즌(Jonathan Franzen), 데이브 에거스(Dave Eggers), 자디 스미스(Zadie Smith) 그리고 레온 위셀티어(Leon Wieseltier)―은 모두 기술의 공격으로부터 인간주의적 가치들을 옹호하고자 하는 격정적인 소책자들을 저술했다. 그들은 인터넷 기업들을 공격하는 데 꽁무니를 빼지 않지만, 마치 기술 기업가들이 세계에 초래하고 있는 파괴를 저지르지 않도록 그냥 설득당할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의 공격들은 대체로 그런 회사들의 창립자들의 가치와 신념들에 집중된다. 마크 주커버그(Mark Zuckerberg)가 진행 중인 그의 독서 마라톤을 위해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이나 칼 크라우스(Karl Kraus)의 대작을 정말로 놀랍게도 선택한다면, 모든 것은 여전히 정상으로 복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로 대학 교수들에 한정되어 있는 기술 비평의 더 급진적인 한 가닥은 대중적 레이다에 거의 잡히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틀 내에서 기술, 매체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에 관해 작업하는 사람들―로버트 맥체스니(Robert McChesney) 또는 댄 실러(Dan Schiller) 또는 빈센트 모스코(Vincent Mosco) 같은―은 거의 아무 주의도 끌지 못한다. 기술에 관한 더 넓은 공적 논쟁을 풍성하게 한 마지막 급진적 비평가들은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과 루이스 멈퍼드(Lewis Mumford)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에게 기술은 투쟁을 위한 핵심 현장이었지만, 사회생태학을 옹호하기 위해서든 위계적 관료 지배에 맞서기 위해서든 간에, 그들의 투쟁은 기술 자체와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

 

미합중국에서 급진적인 기술 비판이 중단되어 버렸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그것에 결부되어 있는 해방적인 정치적 전망만큼 강할 수 있을 것이다. 전망이 없다면, 비판도 없다. 센서, 알고리즘 그리고 데이터뱅크가 비신자유주의적 의제에 도움이 되도록 활용될 수 있는 방식에 관한 어떤 관념도 결여하고 있는 급진적인 기술 비평가들은 난처한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 그들은 미합중국 쇠퇴의 다양한 측면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경험적 기획(예를 들면, 텔레콤 로비스트들의 권력이나 NSA의 데이터 중독을 밝히는 것)을 계속할 수 있거나 아니면 실리콘 밸리의 장미빛 수사법이 어떻게 현실에 부합되지 않는지 증명할 수 있다(그러므로 계속해서 신경제 거품을 폭로할 수 있다). 대체로 이런 것은 도움이 되지만, 그런 실천은 재빨리 수익 체감에 부닥치게 된다. 결국, 미합중국 쇠퇴는 잘 알려져 있고, 실리콘 밸리의 빌어먹을 제국은 비판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어떤 종류의 기술 비평을 실천하려고 열망하는가? 나는 설득력 있는 해답을 갖고 있지 않을까 불안하다. 사실상 미합중국에서 역사가 종말에 이르렀다면―기밀에 대한 유일한 입구를 수호하는 신자유주의적 군국주의 국가(NSA로 대표되는)와 벤처 자본(실리콘 밸리로 대표되는)이 등장함으로써―급진적인 기술 비평가가 직면하는 유일한 실제적 과업은 역사를 소생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확실히 이것은 기술의 담론 내에서 행해질 수 없으며, 그리고 터무니없이 비싼 입장료를 감안하면 기술 비평가는 패배를 인정함으로써 가장 논리적으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기술에 대한 대중적 태도를 변화시키는 것―기술이 부추길 수 있는 급진적인 정치적 기획들이 결여되어 있는 시대에―은 무의미하다. 기술에 관한 급진적 사유가 확실히 가능하지만, 참된 급진파는 더 중대한 다른 투쟁들을 이론화하고―그리고 그것들의 선봉이 되며―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술에 관한 몇몇 성찰을 적어 두는 것이 더 낫다.

 

자기추동적 비평가

 

미합중국 최고의 기술 비평가들 가운데 한 사람인 니콜라스 카(Nicholas Carr)는 어떤 종류의 패배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는 자기 작업의 적실성과 효용에 관한 어떤 의심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유리감옥(The Glass Cage)>>이라는 최근의 책에서 카는 지금까지 우리는 자동화의 숨은 비용을 고려하지 못했고, 평범한 과업들을 기술에 위임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기호는 오도된 것이며, 세계 속에서 조작하는 것에 대해 인간들이 더 많은 책임―도덕적 책임 및 지각적 책임―을 지게 되는 그런 식으로 우리의 선호 기술들을 재설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The Shallows)>>이라는 이전의 책에서 연마된 그의 전형적인 분석 양식을 사용하여 이런 주장을 펼친다. 신경과학의 최신 발견들과 다양한 철학자들(마르틴 하이데거는 존 듀이의 다음에 위치한다)의 영원한 성찰에 의지하여 카는 처방하기보다는 진단하려고 한다. 경성 과학과 인문학의 병치는 흔히 신경에 거슬린다. 모리스 메를로-퐁티와 로버트 프로스트를 인용하는 대단히 시적인 절이 갑자기 중단되고 다음과 같은 정보를 제공한다. "2013년 <사이언스>지에 실린 설치류에 대한 연구 결과를 보면, 동물들이 실제 세상에서 길을 찾아다닐 때보다 컴퓨터가 인위적으로 만든 환경 속에서 길을 찾아다닐 때 뇌의 장소 세포들은 훨썬 덜 활성되었다."(322)

 

<<유리감옥>>의 부제는 "자동화와 우리(Automation and Us)"이고, 카는 자신의 비판을 기술 자체라기보다는 자동화 과정을 향해 정향시키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그렇지만 그의 재료는 거듭해서 그런 프레이밍을 거부한다. "자동화" 아래에서 나타나는 많은 사례들 가운데 세 가지만 살펴보자. 스스로 운전할 수 있는 자동차를 통한 운전의 자동화, 생물측정학적 기술들을 통한 얼굴 인식의 자동화 그리고 겨우 몇 초 동안 "청취"한 후에 노래 제목을 알려주는 샤잠(Shazam) 같은 앱들을 통한 노래 인식의 자동화. 그것들은 얼마간 유사한 듯 보이지만, 차이점도 많이 있다. 첫 번째 사례에서는 운전자가 불필요하게 된다. 두 번째 사례에서는 기술이 얼굴을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의 역량을 증진시킨다. 세 번째 사례에서는 진정으로 새로운 능력이 창출되는데, 왜냐하면 인간들은 미지의 노래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다양성을 감안하면, 왜 자동화―이른바, 증강이라기보다는―가 이런 변화들을 이해하기 위한 올바른 틀인지 명백하지 않다. 노래 식별 앱과 관련하여 우리는 무엇을 자동화하고 있는가?

 

카의 기본 전제는 탄탄하다. 약간의 기술과 자동화는 인간 해방을 가능하게 하는 데 크게 이바지할 수 있지만, 일단 과도하게 사용되면 그것들은 "솜씨의 손상, 지각의 둔감화 그리고 반응의 둔화"를 초래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업무들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할 뿐 아니라―카는 조종실에 거의 완전한 자동화가 도입됨으로써 조종사들이 긴급 상황에 반응하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에 관해 한 개의 장 전체에 걸쳐 검토한다―주변 세계의 어떤 특징들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도 상실할 것이다. GPS는 게으름뱅이들에게 친구가 아니다. "한때 철자 검색 프로그램이 교사 역할을 수행했다"고 그는 한탄한다. 현재 우리가 갖게 되는 것은 멍청한 자동교정이다. 여기에 제1세계 문제들의 진정한 계관 시인이 존재한다.

 

카는 그의 적들과 교전하려고 매우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다. 디지털 기술의 비진정성과 우리의 인지적 및 미학적 솜씨의 손상에 관해 불평하는 것은 대단히 좋지만, 또한 동일한 바로 그 기술들이 진정성의 새로운 형식들(그러므로 3D 프린트 기기와 사물 인터넷을 둘러싼 흥분. 마침내 우리는 가상의 것에서 유형의 것으로 이행하고 있다)과 심지어 심미적 감상의 새로운 형식들(예술계는 "신미학"―컴퓨터 문화에 의해 고무된 영상이 예술과 기성 환경 속으로 침입하는 것―의 등장과 관련하여 웅성거리고 있다)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널리 찬양을 받는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왜 모터사이클을 수리하는 것이 3D 프린트 기기를 수리하는 것보다 더 유쾌하거나 진정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가?

 

카는 대부분의 다른 현대 기술 비평가들(이 글의 저자를 포함하여)이 대면하는 문제에 빠르게 부딪치게 된다. 우리식 비평은 본질적으로 반동적이기 때문에―우리는 모두 실리콘 밸리가 발표하는 어리석은 언론 보도문의 수인들이다―우리는 "기술적 논쟁"를 벗어나서 모든 통신 서비스는 시장에 의해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전제하지 않은 내용에 관해 무언가를 말할 동기가 거의 없다. 그것은 마치, 어떤 프로그램을 명확히 표명할 때, 실리콘 밸리가 모든 가능한 대항 프로그램들도 명확하게 표명해 버려서 그것의 반대자들도 결코 초월할 수 없을 사유의 지평을 규정하는 듯 하다.

 

그러므로 카는 대안적 배치―해당 기술의 특색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가 어떤 모습일 것인지 상상하는 대신에 그가 문제가 있다고 깨닫게 되는 그런 기술들을 비판하기를 선호한다. 무인 자동차에 대한 그의 검토가 적절한 사례이다. 카는 첫 번째 장을 청년 시절에 수동 변속기가 장착된 스바루를 운전하는 경험이 어떠한 것이었는지에 관한 반추로 시작한다. 일반적인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재간으로 그는 운전의 자동화가 결국 우리에게서 충실한 삶을 영위하는 데 중추적인 중요하지만 과소평가된 인지적 솜씨를 어떻게 박탈할 수 있는지 지적한다.

 

선택이 일반적인 자동차와 무인 자동차 사이에 이루어졌다면 이 논증은 일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정말로 우리의 유일한 선택지들인가? 뛰어난 공공 교통 체계들을 갖춘 나라들이 완전히 자동화된 지하철을 탈 때 그들의 뇌가 불충분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느끼는 정신적으로 탈숙련화된 불행한 오토마톤들로 가득차 있다는 어떤 증거가 있는가? 니콜라스 카가 덴마크에 관해 들어본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여기서 기술 비평의 카의 계보가 성취한 것을 인식하자. 공공 교통의 정치와 관련된 논의―교통의 모습과 그것에 대한 지불 방법에 관한 대안적 관념들을 포함해야 하는 논의―를 수행하는 대신에 우리는 현존하는 체계의 자동화로 인한 인지적 및 정서적 비용을 그대로 두었을 때(즉, 일반적인 자동차를 고수했을 때)와 비교할 필요성을 대면하게 된다. 현실적인 정치적 투쟁과 사회적 비평으로부터 단절된 기술 비평은 현 상태에 대한 정교하지만 긍정적인 주석에 불과하다.

 

카의 접근 방식의 잠재적인 내재적 보수주의는 그가 일의 자동화에 관한 글을 적을 때 훨씬 더 쉽게 알 수 있다. 카는, 우리 모두는 아무튼 소외된 채로 태어나고, 그래서 우리가 이런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일을 하는 것이라는 우울한 전제에서 시작한다. 카는 심리학의 연구―'몰입'에 관한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의 관념이 그의 논증에 중요하다―에 의존하여 몰두하게 하는 어려운 일이 우리가 깨닫는 것보다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든다고 상정한다. 반면에, 그런 일의 부재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하지만 일을 하고 있지 않을 때, 우리의 원칙은 약해지고 생각은 흔들리곤 한다. 우리는 퇴근 후에 벌었던 돈을 쓰고 즐길 수 있기를 바라겠지만, 대부분은 여가시간을 그냥 낭비해버린다. 고된 일을 기피하면서 도전적인 취미에 참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보다 TV를 보거나, 쇼핑을 하거나, 페이스북에 접속한다. 우리는 게을러지고, 그러다가 지루하고 초조해진다. 외부에 집중할 게 없어지니 우리의 관심은 우리 내부로 쏠리고, 결국 에머슨이 말한 '자의식의 감옥' 속에 갇혀버린다. 칙센트미하이는 "사실 아무리 하찮은 일조차 자유시간보다 더 쉽게 즐길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일에는 몰두하고 집중할 수 있게 동기를 부여하는 목표와 도전들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39-40)

 

그러므로, 우리의 일이 자동화됨에 따라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구제되지 않은 소외 쿠폰들이 달라 붙게 될 개연성이 높다! 카의 논증은 대담함에 있어서 두드러진다. 일은 우리를 우리의 깊이 소외된 조건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깉은 소외를 발견하지 않도록 더 많이 그리고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진정한 스타하노프주의자인 카의 경우에는 일이 학슬리의 <<멋진 신세계>>의 소마보다 훨씬 더 나은 약물이다.

 

교통 사례에 관해서는 여기서 무언가가 꽤 앞뒤가 맞지 않다. 왜 우리는 현 상태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시민들로 하여금 그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새로운 윤리를 발달시키도록 고무해야 하는가? 일의 경우에는, 우리에게 그런 모든 일에서 벗어난 자유 시간이 더 많이 있다면, 우리가 다른 힘든 것들―외국어 학습이나 체스 경기―을 행하는 것으로부터 마찬가지로 많은 "몰입"과 행복을 얻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그럴 듯하지 않는가?

 

자신이 기술 비평가가 아니었다면 카는 이런 전제를 훨씬 더 쉽게 수용했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은 그로 하여금 일, 생산 그리고 삶 자체의 대안적 조직들에 관한 오랫동안 진행 중인 논쟁에 합류하도록 촉구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카는 이런 논쟁을 진전시키는 데 거의 아무 관심도 표명하지 않으며, 또 다시 현 상태로 퇴각한다. 일은 수행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현재 조건에서는 다른 어느 것도 우리에게 그러한 정신적 만족을 전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을 지지하거나 아니면 반대하는 것은 그의 게임이 아니다. 그는 역사로 알려져 있는 전지구적 허공에서 튀어나오는―겉보기에 자동화된 형식으로―대로의 기술적 추세들에 관해 논평할 뿐이다.

 

그리고 그런 역사의 행진은 점점 더 탈정치화된 기술 용어로 서술되고 있기―"불안정성"은 "나눔 경제"로 변환되고 "부족"은 "똑똑함"으로 변환된다―때문에 기술 비평이 정치 비평과 사회 비평을 대체하게 된다. 계급에서 착취까지 일반적인 분석적 범주들은 더 흐릿하고 덜 정확한 개념들을 위해 제거된다. 자동화된 거래에 관한 카의 시각은 알고리즘이 거래자들에게 무엇을 행하는지에 관심이 있으며, 그리고 거래자 및 알고리즘이 나머지 우리들에게 무엇을 행하는지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 "자동화에 대한 의존은 금융 전문가들의 기술과 지식을 손상시키고 있다"(124)고 그는 무뚝뚝하게 지적한다. 기술 비평가―오늘날 "금융 전문가들"이 수행하는 실제 역할에 대해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만이 기본적인 후속 질문을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좋은 소식이 아닌가?

 

니콜라스 카는 심리학과 신경과학의 세계에서 편안하다는 것을 알게 되며, 그리고 그가 진지하게 다루는 유일한 철학은 현상학이다. 그는 제도, 사회 운동 그리고 새로운 표상 형식들에 의거하여 생각하는 데에는 피상적인 노력만 기울일 뿐인데, 그의 출발점을 감안하면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간헐적으로, 기술 기업들은 돈에 의해 추동되고, 그래서 자신이 그것들에게서 기대하는 그런 종류의 인간주의적 사유에 관여하지 않을 듯하다고 반복해서 적고 있을 때, 카는 유사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을 이용한다.

 

그런데 카가 어떻게 이런 현실주의적 입장을 인간중심적 자동화에 대한 그의 유일한 구체적인 실제적 제안―우리 기술의 설계자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자동화할 용역을 구축하는 대신에 어떤 사소한 인지적 또는 창의적 부담을 우리 사용자들에게 지우는 용역을 구축하여 우리의 지성적 및 감각적 경험을 축소시키기보다는 확장시키도록, 그들이 어떤 상이한 인체공학적 설계 패러다임를 수용하게끔 독려하는 것―과 일치시킬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오피스 드론들에게 좋은 뉴스인데, 여러분의 지루한 자동화된 작업은 여러분이 버튼을 누름으로써 수동적으로 파일을 저장해야 할 것―파일이 자동적으로 백업되게 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이라는 사실에 의해 약간 덜 지루하게 될 것이다.

 

이런 사용자-생산자 축이 카의 정치적 상상을 포괄한다. 또한 그것은 그의 기술 관념론의 한계점들을 드러내는데, 왜냐하면 그가 제안한 개입책은, 첫째로, 오늘날의 사용자들은 무엇이 자신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전적으로 자동화된 기술들을 선호한다고 가정하고, 둘째로, 이런 사용자들은 카의 제안에 따라 현존하는 생산품들을 재설계하는 것이 수지가 맞을 것이라고 기술 기업들을 납득시킬 수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카가 기술 기업들은 이윤에 의해 추동된다고 진지하게 믿고 있다면, 그것을 우회하는 다른 길은 없다. 그는 자신이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고 있는 어떤 해결책을 옹호하는 냉소주의자이거나, 아니면 그는 소비자들이 자동화에 대한 자신들의 사랑을 단념하고 기술 기업들에게 다른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다고 정말로 생각한다.

 

카는 자동화에 대한 우리의 수용은 이른바 필요라기보다는 혼동, 열병 또는 게으름에서 비롯된다고 확고하게 믿고 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자동화와 관련된 문제는 그것이 흔히 우리가 행하는 것을 희생하는 대가로 우리가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론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현대 기술의 경이로운 것들에 전혀 의존하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는데, 우리는 GPS 기기들을 버리고, 우리 자신의 정교한 음식들을 요리하고, 우리 자신의 의복을 만들며, 앱에 의존하는 대신에 우리 아이들을 지켜봄(지난 세기에 부부들이 그런 것처럼)으로써 우리 자신의 인지적 및 심미적 솜씨를 계발할 수 있다. 자동화―인지, 감정 그리고 지성의―는 점점 증가하고 있는 일상 생활의 기업화에 대하여 지불해야 하는 견딜 수 없는 비용이다.

 

그러므로 카의 작업에서 도출될 수 있는 매우 불길하고 심란하게 하는 함의―즉 가난한 사람들은 평범한 가상적 대체물에 한정되는 반면에, 부유한 사람들만이 자신의 솜씨를 계발할 수 있고 자신의 삶을 완전히 향유할 것이다―가 존재하지만, 카는 그것을 도출하지 않는다. 여기서 또 다시 우리는 일단 기술 비평이 사회 비평과 단절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게 된다. 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것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자동화 형식을 택한 사람들을 도덕화하고 비난하는 것이다. 한 주에 한 권의 책을 읽고 중국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고무적인 일인지 우리가 어떻게 파악하지 못하겠는가? 마크 주커버그가 그것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무슨 핑계 거리가 있는가?

 

"우리가 행해야 하는 일의 양을 줄여준다고 제안함으로써, 우리의 삶에 더 큰 용이함, 편안함 그리고 편리함을 주입할 것이라고 약속함으로써 컴퓨터와 다른 노동 절약 기술들은 우리가 고역으로 지각하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은 우리의 열렬하지만 오도된 욕망에 호소한다"고 카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엘리트주의적인 어조로 언급한다.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진정하라. 여러분의 고역은 지각일 뿐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자동화를 수용하는 더 평범한 다른 한 이유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 카에게는 실례지만, 인지적 자극에 대한 모든 교란과 새로운 방안들을 갖춘 자동화가 왜 그들에게 매우 흥미로운 것이 될지 명료하지 않다. 덜 지능적인 마이크로웨이브 오븐은 자신의 음식을 요리하고 싶지만 그냥 그럴 시간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좋지 못한 해결책이다. 그런데 현학적인 강단인들을 매혹시키는 비문제들에 더 사로잡혀 있는 카에게는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직면하는 문제들이 일시적으로 흥미로울 뿐이다. 예를 들면, 그는 룸바, 즉 로봇 진공 청소기의 도덕성에 관해 상세히 고찰한다.

 

카의 전작은 그것이 제기하는 의문과 그것이 회피하는 쟁점 둘 다에 있어서 현대 기술 비평의 대표적인 전형이다. 그러므로, 디자인 문제들과 그것들의 일반적으로 손쉬운 해결책들에 대한 전형적인 몰입이 존재하지만, 가장 터무니없는 착상에 정초하는 신규 업체들이 왜 그렇게 쉽게 벤처 자본을 끌어들이는지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이것은 미합중국 경제의 심대한 구조적 변환들―예를 들면, 항상 확대되고 있는 금융화―과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점은 오늘날의 기술 비평이 도대체 이를 수 있는 결론이 아니다.

 

그때 그곳에서 지금 여기까지

 

니콜라스 카 같은 사상가들의 단점들을 조사함에서 있어서 지금까지 나도 얼마나 많은 점들을 공유했는지 너무 신경이 쓰이기 때문에 개인적 언급을 하는 것이 적절하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기술 비평가로 자처했다. 그러므로 나 역시 패배를 인정해야 한다. 미합중국에서 현대의 기술 비평은 공허하고, 헛되며, 불가피하게 보수적인 과업이다. 기껏해야 우리는 경력을 쌓을 뿐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유용한 멍청이들에 불과하다.

 

참으로 급진적인 기술 비평은 대중적 청중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접근 금지 구역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남게 되는 유일한 것은 약화시키는 모조 급진주의이다. 일부 비평가들은 자신들의 작업에 반기업적 포퓰리즘과 심지어 시장에 대한 암묵적인 반대의 분위기를 부여하는 기술 기업들에 정확하게 초점을 맞춘다. 그렇지만 이것은 멋지게도 이런 사상가들을 급진주의자로 바꾸지는 못한다.

 

사실상 급진주의적인 비평가들과 모조 급진주의적인 비평가들을 구별짓는 것은 그들이 실리콘 밸리를 이해하는 데 사용하는 렌즈이다. 전자 집단은 그런 기업들을 경제적 행위자들로 간주하여 역사적 및 경제적 맥락 속에 처하게 하는 반면에, 후자 집단은 그것들을 문화적 힘, 사회와 정치에 관한 나쁜 관념들의 집합체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급진주의적 비평가는 이런 기업들―하버마스적 공론장에서 또 하나의 합당한 참여자일 뿐인 것처럼―을 사리에 맞게 설득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점을 파악하는 반면에, 모조 급진주의적 비평가는 그런 자각을 나타내지 못하면서 그것들의 천박함을 한탄하는 에세이를 연이어 저술하고 그것들이 궁극적으로 윤리적이고 책임감을 갖게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유물론과 관념론 사이의 오랜 전투의 연속일 뿐이다. 기술 비평가로서 내 경력을 막 시작한 시기에 나는 관념론적 덫에 빠져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좋은 관념들이 나쁜 관념들을 몰아낼 수 잇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리콘 밸리가 자체 영토를 정보 기술에 의해 가볍게 다루어졌을 뿐인 영역들―교통, 보건, 교육에 관해 생각하자―로 확장함에 따라 이 분야들은 갑자기 설익고, 어리석으며, 간헐적으로 위험한 관념들로 흘러 넘치게 되었다. 그런 관념들은 문서화되고, 연구되며, 이의가 제기될 수 있었고 제기되어야 했었다. 이것이 기술 비평의 참된 소명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진지한 기술 비평은 디지털 전문가들의 혀를 묶고서 값싼 찌꺼기에 대한 그들의 매우 단순한 구호 이용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십대의 소박함의 기미가 보이는 실리콘 밸리의 종합 계획에서 많이 나타나는 무마찰성과 영원한 축복에 대한 갈망, 편의성과 전적인 투명성에 대한 숭배, 자기 신뢰와 직접성에 대한 무심한 찬양. 앱들의 효용성에 관해 열중하는 대신에 기술 비평가는 그것들이 발제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정치적 프로그램과 경제적 프로그램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정치와 경제를 계속 전면에 내세우고 중심에 위치시키면서 낭만적이지도 않고 보수적이지도 않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내 자신의 작업에서 일례를 들자. 자체 내용물의 스냅 사진을 페이스북에 업로드하는 스마트 쓰레기통―그렇다. 그것은 존재한다―은 우리의 온라인 친구들이 우리 행동을 감시하게 하는 실험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정치적 소비주의가 가장 평범한 가사로 확대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올바른 이론적 렌즈 아래 위치시키면, 평범한 객체들도 당대의 조건을 조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객체들과 이데올로기들 사이에서 움직임으로써 기술 비평가는 중요한 결정적인 의문들이 어떻게 제기되지 않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주변적 관심사들이 어떻게 열외 취급을 받고 있는지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실된 시각들을 회복시켜서 그렇지 않다면 조기에 종결될 논쟁을 지속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최선의 종류의 기술 비평이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에 작별을 고하라. 오늘날, 사회적 전환에 관한 어떤 급진적 계획과도 단절된 기술 비평이 결코 좋지 않다는 것은 내게 명백하다. 세계를 확연히 다른 두 개의 권역―기술적 권역과 비기술적 권역―으로 절단함으로써 그것은 재빨리 최악의 종류의 유아론적 관념론으로 퇴행하게 되고,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실제 투쟁들보다 기술에 관한 요란한 이론적 관념들에 훨씬 더 많이 주목하게 된다.

 

요햑하면, 문제는 이렇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면, 노련한 기술 비평가는 그저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기술에 관한 관념들을 애매하게 만들었다고 가정함으로써 사실상 무엇이든 설명할 수 있다. 사람들이 기술에 관한 관념들을 애매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가끔 맞는 일일 것이지만, 그것은 결코 당연히 여길 것이 아니라 논증되어야 하는 것이다. 페이스북으로 구동되는 쓰레기통의 현존이 그것을 제작하고 사용하고 사람들은 심각한 형태의 기술적 허위 의식을 겪는다는 점을 반드시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식으로, 왜 그들의 문제는 어떤 사려 깊은 프랑스 또는 독일 철학자의 텍스트들을 숙독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가?

 

그런데 허위 의식 설명은 어떤 기술 비평가도 지나치고 싶지 않은 그런 종류의 따기 쉬운 열매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정치와 경제의 위험한 분야들에서 심리학과 철학의 더 안전한 영토로 마법처럼 이동시키기 때문이다. 해당 발명가들이, 예컨대, 유럽 위원회에서 제공되는 유용한 보조금을 이용했을 뿐인지 여부를 조사하는 것보다 하이데거와 메를로-퐁티를 숙독할 수 없는 인류의 무능력 때문에 그런 쓰레기통이 현존한다고 가정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

 

그런 조사들은 귀찮은 일이며, 그리고 최소한 무시무시한 다른 유형의 비평가, 급진주의적 비평가가 될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다면 제기하지 않은 채로 두는 것이 더 좋은 불편한 의문들―자본, 전쟁, 국가의 역할에 관한―을 궁극적으로 재촉할 것이다. 모든 행위 또는 산물이 기술에 관한 오류가 있는 어떤 개인적 믿음이나 집단적 믿음, 결함이 있는 지적인 시각에서 비롯된 것처럼 해석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

 

카를 비롯한 많은 현대 비평가들이 선호하는 주제, 즉 이른바 앱에 대한 우리의 과도한 의존을 고찰하자. 인간들이 어떻게 현대 기술의 대단히 소외시키는 효과들을 그렇게 간과할 수 있는지 비평가들은 묻는다. 그들의 잠정적인 대답―우리는 기술적으로 매개되는 편리가 좋아서 견딜 수 없는 게으른 인간들일 뿐이다―은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참을 수 없는 오만한 도덕론자들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더 그럴듯한 테제―우리 시간에 대한 수요의 증가는 앱들의 흡수 및 실재적인 것(예컨대, 육아)의 가상적인 것(예컨대, 아이들을 원격으로 지켜볼 수 있게 하는 많은 앱들)으로의 대체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유 시간의 축소에 관해 말하는 것은 또한 자본과 노동에 관해 말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고, 이것은 기술 비평가를 "엄밀한 의미의 기술"로부터 너무 멀리 데려갈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기술 비평가들이 당연히 여기는 것은 이런 "엄밀한 의미의 기술"이 현존한다는 점이다. 사실상 현대 기술 비평의 바로 그 체계는 비평가들이 모든 기기 또는 앱은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경제적 관계들의 훨씬 더 넓은 매트릭스의 종점일 뿐이라는 점을 인정하기를 꺼려하는 것에 의존한다. 그리고 이런 기기와 앱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우리의 기술 공포 또는 기술 애호에 의해 심대하게 형성된다는 것은 참이지만, 왜 우리는 그것들이 자극하는 종점과 행동들에만 주목해야 하는가? 여기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그런 문제의 프레이밍에서 비롯되는 공격은 무엇이든 간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데, 이 점이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매력적이기도 하다는 것을 설명한다.

 

기술 비평이 심미적 고려 사항들과 관련되어 있을 뿐―이 기기는 잘 만들어졌는가? 이 앱은 아름다운가?―이라면, 그런 이론적 협소함은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기술 비평가들은 이중 구속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심미적 차원을 넘어서야 하지만―그들은 단연코 설계의 평가자에 불과하지 않다―매트릭스의 나머지 부분의 현존을 드러낼 여유가 있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또한 그들을 전적으로 다른 무언가로 변환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해결책은 실재적인 기술적 객체들―이것들은 우리가 뉴스에서 보게 되는 기기와 앱들이다―로 조작하는 것이지만, 그런 객체들의 사용자와 제작자들은 가상의 이론적 구성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들의 근거가 민족지학적으로 또는 분석적으로 파악되기보다는 기술 비평의 설명적 한계들에 의해 그들에게 부과되는 한에 있어서 그들은 "가상적"이고 "이론적"이다. 기술 비평가들의 손에서 역사는 기술에 관한 현명한 관념들과 어리석은 관념들의 연쇄에 불과한 것이 되는데, 방해가 되는 구조들―사회적 구조 또는 경제적 구조―은 일반적으로 전혀 없다.

 

놀랍지 않게도, 모든 문제가 불공정하고, 결함이 있으며, 착취적인 사회적 조직 양태들이라기보다는 기술에 관한 나쁜 관념들의 지배에서 비롯된다고 가정함으로써 출발한다면, 모든 제안된 해결책은 상당히 많은 더 나은 관념들을 포함할 것이다. 그것들은 더 나은, 더 인간적인 기기와 앱들에서 구현될 수 있을 것이지만, 개입 양식은 여전히 주로 관념적인 것이다. 기술 비평가의 슬로건―그리고 나는 그것을 한 번 이상 외쳤다고 고백한다―은 이렇다. "소비자와 기업들이 더 잘 알고 있기만 하다면!" 소비자와 기업들은 고칠 수 있지만, 시장 자체는 신성하며 이의가 제기될 수 없다. 이것이 오늘날 작성되고 있는 대부분의 대중적인 기술 비평의 배후에 놓여 있는 진술되지 않은 가정이다.

 

그런데 소비자와 기업들이 정말로 더 잘 알고 있다고 가정하자. 이것은, 추정컨대, 소비자들이 자기 행동을 변화시킬 것이고 기업들이 자체의 생산품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점을 의미할 것이다. 후자는 매우 유망한 듯 보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우리는 스타벅스에서 판매 중인 공정 무역 라테―부자와 회의적인 사람들을 위한 현대판 면죄부―의 기술적 등가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선택지―소비자들로 하여금 자기 행동을 변화시키도록 만드는 것―가 훨씬 더 그럴 듯하다. 그런데 해당 문제가 애초에 기술적 문제가 아니었다면, 왜 그것을, 예컨대, 시민과 제도의 층위에서 정치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의 층위에서 다루는가? 기술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구획하는 선은 기술적 패러다임 내에서 생각하는 것에 영원히 한정된 사람들에 의해 그려질 수 없는데, 기술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쟁점을 구조화하는 것의 정치적 비용 및 대안적 설명들을 살펴 보기 위해서는 기술적 패러다임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낭만주의적 계보와 보수주의적 계보의 기술 비평가들은 더 인간적인 스마트 에너지 계측기를 설계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스마트 에너지 계측기들이 기후 변화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그들의 검토 사항이 아니다. 우리가 도대체 그것들을 설계하지 말아야 한다면 왜 그것들은 인간적으로 설계하는가? 그런 의문은 비시장적 견지에서 그리고 비국가주의적 견지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아직 상실하지 않은 비평가들만이 대답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기술적 전문 지식은 이런 의문에 대답하는 데 대체로 주변적인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기술 비평가들은 도대체 그런 의문들에 대답하는 것에 정말로 아무 관심도 없다. 어떤 급진적인 성향으로부터도 해방된 그들은 제도적 현실과 정치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간주하지만, 무언가가 적절하지 않다고 지각하게 되면 그들은 독창적인 해결책을 고안한다. 시민들을 둘러싼 공포는 자기 통제의 결여 또는 기기에 대한 조악한 취향에서 비롯될 것이기 때문에 시민들에게 그런 모든 공포의 비용을 내재화하도록 요청하면 어떻겠는가? 기술 비평이 신자유주의적 기획의 이론적 선봉이 되는 것은 바로 사회적 및 정치적 문제들을 오로지 개체적인 것의 층위로 귀속시키는 이런 행위이다(어떤 사회도 존재하지 않으며, 개인들과 그들의 기기들이 존재할 뿐이다).

 

니콜라스 카의 기획이 성공하더라도―즉, 카가 사용자들에게 소외의 증가는 자동화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믿음의 결과라는 점을 납득시키더라도, 그래서 결국 사용자들이 기술 기업들로 하여금 새로운 유형들의 생산품들을 생산하도록 설득한다 하더라도―이것이 성공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이유는 명백하지 않다. 확실히 이것은 진보주의적 정치를 위한 승리가 아닐 것이다(카는 스스로 대단히 애매하다). 정보 기술이 사실상, 그렇게 멀지 않은 과거에 많은 정치적 전장들의 핵심에 놓여 있었고 결국에는 법률 속에 고이 간직된 그런 종류의 자유 시간(일일 노동 시간에 대한 제한, 보장된 휴식, 주말의 휴무)을 생성하기 위한 주요한 수단이 되어버렸다. 그런 정치적 전장은 사라진 지 오래 되었다.

 

과거에는 노동자들이 한정된 휴식들을 얻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하는 것은 정치적 제도―노조와 좌파 정당들―였다. 오늘날에는 이런 과업들이 바로 기술 기업들에 귀속된다. 구글이 여러분에 관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여러분은 매일 더 많은 시간을 절약하게 될 것인데, 왜냐하면 구글은 모든 것을 개인화하고 심지어 여러분을 위해 어떤 과업들(항공권 검색 같은)을 완수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카의 기획은 또 하나의 구글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할 것이다. 그런데 야망의 부족 자체가 오늘날 정치의 슬픈 상태에 대한 증언이다. 우리가 우리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들을 찾는 것은 주로 기술 공급자들의 시장―정치적 영역이 아니라―에서 이루어진다. 더 인간적인 구글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닌데, 최소한 구글을 인간화하는 기획이 우리로 하여금 눈 앞에 놓여 있는 더 근본적인 정치적 과업들로부터 주의를 딴 데로 돌리게 하는 한 좋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기술 비평가들은 개의치 않는다. 그들의 일은 구글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