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윌리엄 라지: 오늘의 강의-과학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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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4.

 

과학이란 무엇인가? 강의 1

What is Science? Lecture 1

 

―― 윌리엄 라지(William Large)

 

이것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과학이 차지하는 지위에 관한 강좌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과학자가 아니며 과학자가 될 계획도 없지만, 그럼에도 과학은 세계에 관한 우리의 관념을 지배한다. 또한 나는, 우리들 대부분은 과학이 세계에 관한 진리를 말해주며, 일반적으로 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은 신뢰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고 추측한다. 무언가 또는 어떤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알고 싶다면 우리는 과학에 의지하게 된다. 이것은 과학이 자연뿐 아니라 우리 자신과 관련될 경우에도 그렇다. 그런데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과학을 수행하지 않거나 과학자들이 행하는 일에 관해 거의 알지 못하는 데도 우리는 왜 과학을 그토록 신뢰하는가?

 

이것은 우리에게 과학이 종교와 같은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인가? 대부분은 아닐지라도 많은 과학자들이 무신론자이고(모든 과학자들이 그렇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지만) 과학을 종교적 믿음에 정반대되는 것으로 간주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대단히 역설적일 것이다. 예를 들면,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의 출판과 그 책에 쏟아진 관심에 관해 생각하자. 여기에 과학과 종교는 완전히 대립적인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누군가가 존재한다. 사실상 종교적인 사람들은 모두 비합리적이며, 그리고 더 나쁘게도 폭력적이라는 점을 예증함으로써 세계에서 종교를 전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과학의 의무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종교적인 사람들이 많이 존재할지라도, 과학과 종교가 동일한 주장들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종교가 과학이라면, 나는 종교는 사이비과학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적절한 과학적 주장을 결코 제시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그런데 꼭 마찬가지로, 종교가 과학이 아니라면―나는 종교가 과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종교는 사이비과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종교과 과학은 상이한 것들을 행하며, 상이한 주장들을 제시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과학은 무엇을 의미하며, 그리고 과학은 종교가 행하지 않는 어떤 일을 행하는가? 그 대답은, 과학은 사실과 관련되어 있고 종교는 믿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와 사실들이 어떻게 과학의 기초가 되는지에 대해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는가? 사실은 내가 관측하는 무언가인 듯 보인다. 나는 '내 앞에 탁자가 있다'라고 말하고, 정말로 내 앞에 탁자가 있다. 나는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내가 내 눈으로 그것을 볼 수 있기 떄문에 나는 알 수 있다. 사실은 감각―이 경우에는 시각―으로 입증되는 것인 반면에 믿음은 그렇지 않은 듯 보인다. 어느 기독교도가 예수는 셋째 날에 부활했다고 말한다면, 그저 바라봄으로써 그것이 어떻게 입증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보고에 지나지 않지만, 나는 그것을 몸소 입증할 수는 없다. 종교는 결코 사실에 관한 것이 아닌 듯 보인다. 그것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무언가이고 이성이라기보다는 신념의 문제이다.

 

그런데 이런 대립은 반박할 여지가 없는 것인가? 우리가 종교과 과학 사이의 차이점은 과학은 사실과 관련되어 있고 종교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반박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사실은 정말로 그렇게 단순한가? 사실에는, 예컨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더 이상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가? 내가 의자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를 갖추고 있지 않다면, 나는 도대체 의자를 알아볼 것인가? 의자를 마주치게 되는 일이 꽤 흔한 내 문화의 구성원이 아니라, 이전에 결코 의자를 본 적이 없거나 그 점에 대해서는 서양 문명도 결코 마주친 적이 없는 가장 깊숙한 아마존 지역 부족의 일원으로 내가 태어났다고 상상하자. 게다가 어떤 미지의 이유 때문에 수송기가 운반하고 있던 의자가 비행기에서 벗어나서 내가 매일 사냥하는 숲의 빈터에 떨어졌다고 상상하자. 나는 의자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틀림없이 나는 내 망막 위에 의자의 영상을 가질 것이고 그 영상은 내 시신경을 거쳐서 내 뇌로 이동할 것이지만, 나는 의자에 관한 개념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의자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사물에 관한 개념을 포착하는가? 그저 사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데,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또 다시 동일한 역설에 처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사물들에 관한 개념들은 우리 세계를 구성하는 개념적 배경의 일부이며, 그리고 이런 개념적 배경은 무엇이든 어떤 주어진 문화에서 우리가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 오로지 이런 식으로 나는 무언가를 밀림의 빈터에 떨어진 의자처럼 내 세계에 갑자기 나타난 불가사의한 객체에 불과한 것이라보다는 무언가로 인식할 수 있다. 의자의 의미, 내가 그것을 의자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은 그것의 용도의 맥락에 의해 주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이것을 과학에 관한 우리의 관념에 적용하게 된다면, 과학적 실천은 이런 사실들을 설명하고자 하는 연구 자체에 선행하여 사실이 무엇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규정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론은 사실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실제로는 이론이 사실에 선행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과학자들의 실천을 바라볼 때의 상황이다. 과학자들은 그저 사물들을 별개로 바라본 다음에 그것들에 그들의 이론들을 정초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이론들이 이미 그들이 적실한 사실들이 무엇인지 알도록 어디를 바라보아야 하고 무엇을 찾고 있어야 하는지 말해준다. 정말로 사실은 그저 사실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사실은 그저 지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각 더하기 오성이고, 그래서 지각이 먼저 온 다음에 오성이 두 번째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두 가지가 함께 도착한다. 그것들은 동일한 개념적 또는 원한다면, 현상학적 전체, 즉 우리가 과학자이든 아니든 간에 어떤 주어진 맥락에서 우리가 실제로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의 일부이다. 

 

과학은 이미 우리로 하여금 이것을 깨닫게 만드는데, 왜냐하면 어떤 사실에 관해 생각할 때 우리는 그저 어떤 사태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태에 관한 진술들을 제시하며, 그리고 이런 진술들은 그것들을 이해하는 화자들의 공동체 내에서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화성에 물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화성에 물이 있다고 말하며,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관측할 수 있어서 화성에 실제로 물이 있다는 점에 동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이 존재하든 말든 간에, 또는 심지어 인간들이 존재하든 말든 간에, 화성에는 물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가 "화성에 물이 있다"라고 말할 때에만 과학적 이론의 일부가 되고, 그 다음에 다른 누군가가 망원경을 갖고서 이 진술이 참인지 알게 된다.

 

과학은 사실들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과학은 관측을 통해서 입증될 수 있는 진술들에 정초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의자와 관련하여 발견된 동일한 문제들을 직면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어떤 관측에서 적실한 것으로 알아낸 것도 우리가 처해 있는 개념적 배경에 의해 결정될 것인가? 차머스(Chalmers)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과학의 역사에서 비롯된 일례를 사용한다. 17세기의 과학 혁명 이전에는 지구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점은 주어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관측 가능한 현상은 이것을 입증하는 듯 보인다. 위로 뛰어오를 때 나는 지상의 다른 장소로 떨어지지 않는데, 이것은 지구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면 맞는 듯 보일 것이다. 물론 이것이 맞지 않는 까닭은 관성 때문이다. 나와 지구는 동일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고, 그래서 동일한 힘들이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다(동일한 이유 때문에 움직이는 자동차에서 여러분이 공중으로 던진 테니스 공은 여러분에게 되돌아오게 되는데, 왜냐하면 여러분과 자동차가 동일한 방향과 속력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아무도 관성 이론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관측된 것이 지구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는 듯 보였다(그리고 나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여전히 이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추정한다). 우리 관측 결과가 우리 이론을 결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관측 결과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이론이다.

 

이것은 과학은 주관적일 뿐이고 여러분이 보는 것은 여러분이 보고 싶어하는 것일 뿐이라는 점을 의미하는가? 그렇다면 과학과 종교 사이에 아마 차이도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종교가 주관적이라는 것은 분명히 맞기 때문이다. 오히려, 과학을 명료하게 서술하는 데 있어서 요구되는 것은 관측에 대한 더 나은 규정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과학자가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의자를 바라보고 그 영상이 내 망막에 투사되는 경우에, 관측을 수동적이고 사적인 것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이고 공적인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관측이 적극적인 것인 까닭은 관찰자가 항상 자신이 보고 있는 것에 관여함으로써 자신의 이해와 해석에 관련지어 자신의 관측 결과를 교정하고 변화시키기 때문이며, 그리고 관측이 공적인 것인 까닭은 이런 관측 결과는 항상 그 결과를 해석할 수 있는 타자들과 공유되기 때문이다.

 

차머스는 과학자들이 실제로 작업하는 방식에 관한 두 가지 사례들을 제시한다. 한 사례는 후크(Hooke)가 현미경으로 바라본 파리 눈의 영상이다. 무엇보다도 그 눈의 영상은 후크가 사용한 바로 그 장비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는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에 아무 영향도 주지 않도록 광원을 사용하는 방법을 고안해야 했었다(결국, 소금물을 통과시킨 촛불을 사용했다). 그 다음에 후크는 자신이 본 것을 출판했고, 그가 그것을 본 방식을 사람들에게 공개했는데, 그래서 그들도 스스로 동일한 일을 행하여 동일한 결과를 얻게 되는지 살펴볼 수 있었다. 둘째로, 갈릴레오의 경우에, 그는 자신의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들을 보았지만, 동료 과학자들에게 그것들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갈릴레오는 목성의 위성들이 목성 주위를 공전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그것들의 궤적에 대한 정확한 측정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자신의 망원경을 수정해야만 했으며, 그리고 마침내 이런 결과를 얻게 되었을 때 갈릴레오는 그 결과를 출판했고, 그래서 다른 모든 사람이 그 결과의 신뢰성에 대해 시험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관측 결과가 절대로 확실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과학과 종교 사이의 차이점은 과학은 절대로 확실한 것이고 종교는 그렇지 않다(여러분이 아무리 이렇게 이해하기를 바랄지라도)는 점이 아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관측은 틀리기 쉽다.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가 바라보는 방식에 의해 결정되고 우리가 바라보는 방식은 우리 자신이 처해 있는 개념적 배경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누구나 참여하여 이런 개념적 배경이 잘못 되었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를 보지 못하게 막고 있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것을 행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우리가 우리 이론들을 바꿀 때 관측 가능한 것을 지적함으로써 그것을 행하지만, 이런 가설 역시 타자들에 의해 시험될 수 있다. 그들은 그저 무언가에 관한 믿음을 단언함으로써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달은 치츠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차머스는 과학을 이런 식으로 규정할 수 있다. '여기에 제시된 견해에 따르면, 과학적 지식에 대한 기초를 구성하는 데 적절한 관측 결과들은 객관적인 동시에 틀리기 쉽다'. 이것은 객관성은 절대적 진리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는데, 객관적인 것은 관측 가능한 증거를 통해서 교정되고 바뀔 수 있는 반면에 주관적인 것은 그럴 수 없다. 관측에 기반을 둔 종교적 믿음은 결코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저급의 빈약한 과학적 이론일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반증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종교 자체가 저급한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도라는 것은 X, Y, Z를 믿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도로서 행동하는 것이다. 기독교도가 자신의 신앙이 객관적 지식에 의해 뒷받침된다고 생각할 때에만 그는 과학과 갈등에 처하게 되는데, 예를 들면, 창조 이야기가 진화와 경쟁하는 과학적 이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그렇다. 물론 아이러니는 그들이 자신들이 비난하는 바로 그 과학적 방법에 의존하게 된다는 점인데, 왜냐하면 어떤 과학은 다른 한 과학으로만 반증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