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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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슬린 맥아피: 오늘의 에세이-인류세 시대의 자연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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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11.

 

인류세 시대의 자연의 정치

The Politics of Nature in the Anthropocene

 

―― 캐슬린 맥아피(Kathleen McAfee)

 

대략 지난 40년 동안 자연은 전지구적 정치에 진입했다. 기후 변화와 생물 다양성에 관한 논쟁적인 조약 협상들에서 정부들은 지구의 생태적 위기에 대응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강요받는다.

 

더 폭넓게 보호론적 담론에서 이런 대문자화된 구성물은 사회에 의해 포위된 단일한 자연으로 표상된다.

 

자연은 훼손되었고 위험하게도 희소해지고 있다고 하는데, 넘쳐 흐르는 탄소 싱크와 임박한 기후 파국, 사라지고 있는 종들과 소멸하고 있는 생태계들, 급증하고 있는 인류을 위한 불충분한 토지, 물 그리고 식량을 보라. 그런데 누구를 위해, 그리고 왜, 이 자연은 희소해졌는가?

 

자연의 정치는 중립적일 수 없다. 모든 정치와 마찬가지로 생태정치(eco-politics)는 궁극적으로 누가 무엇을 가질 자격이 있고,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빚지고 있고, 그런 권리와 자격은 어떻게 부여되어야 하며, 누가 결정하게 되는지와 관련된 것이다. 지리적으로 매우 다양하고 사회적 차이가 방대한 세계에서 국가와 다른 기관들에 의한 결정과 조치들, 또는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무조치는 불가피하게도 어떤 사람들과 장소들에 매우 상이하게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낳는다.

 

관념과 언어도 중요하다. 자연 세계와 그 속에서의 인간들의 역할이 개념화되는 방식은 바람직하거나 가능하거나 상궤를 벗어난 것으로 간주되는 선택들의 목록을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희소성이라는 관념 자체가 엄청난 낭비, 터무니없는 부의 집중 그리고 끝없는 경제적 성장의 자기패배적인 추구를 은폐하는 정치적 고안물이다.

 

새로운 시대?

 

대략 지난 10년 동안 지구 온난화와 이른바 '생태적 공간'의 부족을 수용하고자 하는 학자들은 '인류세 시대'라는 관념을 포용함으로써 인류가 초래한 전지구적 변화의 규모와 전례없는 속도을 인정했다.

 

몇몇 설명들은 인류세 개념을 사회 연구와 문화 연구에 있어서 탈인간주의적 전환과 관련시키고 사회와 비인간 자연 사이의 이원론적 구별짓기를 거부한다(예를 들면, 해러웨이, 무어, 윌크). 그런데 인류세에 관한 많은 서사들에서 나타난 자연-사회 연결망과 자연에 관한 표상들은 일단의 특수한 선택지와 이해관계들을 너무 쉽게 뒷받침하는 반면에 다른 것들은 가리게 된다.

 

차크라바티의 네 가지 테제: 자유와 인류세

 

디페쉬 차크라바티(Dipesh Chakrabarty)의 네 가지 테제에서 인류세는 현재 "인간들"이 하나의 "지질학적 힘"이라는 것을 알린다. 인류세의 수용은 250년 동안의 "자유" 추구와 관련된 '이성'이 전지구적인 집단적 행위에 대한 열쇠로 간주되는 갱신된 보편주의의 기초가 된다.

 

인간들의 새로운 지위는 자연과 사회라는 별개의 범주들을 폐기한다―대부분의 비판적 사회 이론가들에게는 오래된 뉴스―고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보편자들에 대한 탈식민주의의 의문 제기를 넘어서는 듯 보인다.

 

그런데 종 차원의 인간 행위가 가능한가? "인간들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만 지질학적 행위자가 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불가피하게도 사회적 및 정치적 과정인데, 여기서 행위주체성은 특수한 인간 집단들에 의한 집단적 행위들을 통해서 행사된다.

 

차크라바티는 자연의 심문자들로서의 저명한 자연과학자들의 의견을 좇는데, 그들은 전지구적 변화의 불확실할지라도 개연적인 궤적에 대한 유일하게 자격을 갖춘 목격자이자 안내자들이다. 계몽적 이성의 힘을 환기하면서 차크라바티는 하버드의 곤충학자이자 최근의 또 하나의 구성물인 생물 다양성의 전기 작가인 E. O. 윌슨(Wilson)을 인용한다. "이제 우리는 그 문제에 관해 더 많이 알고 있다...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차크라바티는 화학자이자 노벨 상 수상자인 폴 크루첸(Paul Crutzen)과 생물학자 유진 스토머(Eugene Stoermer)―이 두 사람은 일반적으로 인류세 개념을 도입했다고 인정받는다―도 인용한다. "인류를 전지구적인 지속 가능한 환경 관리를 향해 인도하기 위한 흥미를 불러 일으키지만 어렵고 벅차기도 한 과업이 전지구적 연구 및 공학 공동체의 앞에 놓여 있다."

 

자연과 정복

 

크루첸, 스토머, 윌슨 그리고 비슷하게 관련된 자연과학자들이 자연을 대변하는 최초의 사람들은 아니다. 탈식민주의의 학도로서 차크라바티는 지난 500년 이상 동안 당대의 전지구적 연구 및 공학 공동체들에 의해 자연 이상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확실히 자각하고 있다. 정복과 탈취에 대한 정당화 수단으로서 말이다.

 

흔히 심원한 지역적 지식과 경험에 위배되는 우수한 과학적 지식에 대한 주장들은 풍경을 재구성하기 위한 주요 계획들을 뒷받침했는데, 빈번하게 파괴적인 영향을 끼쳤고 거의 언제나 불평등한 결과를 초래했다.

 

사례들을 간단히 살펴보면,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의 불운한 수력공학적 재구성, 과학적으로 관리된 제국의 식림지에 의한 공동체 숲의 대체, 데카르트적 그리드로의 교체, 지역적 토양과 강우에 적응된 토착적 다경작을 대체하는 단일 곡물 재배, 전적으로 남성으로 구성된 의료 엘리트에 의한 여성의 실용 치료 지식의 폭력적 억압, 오늘날의 효율적 농경 공학자들에 의한 풍경과 숲의 새로운 엔클로저, 그리고 '인류'의 최선의 이익과 자연의 미명 아래 행동하는 장래의 '전지구적' 환경 보호 조직체들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불특정한 '우리'가 소유하는 지식―그리고 강하게 함축되듯이, 우수한 가치들―으로 '인류를 인도하기'라는 의제들을 정당하게 의심하기 위해서 계몽적 이성의 힘을 부인하거나, 또는 과학적 방법이 공학과 의학에서 이룬 성취들을 일축할 필요는 없다. 명백히 윌슨의 '우리'는 그가 '행성적 살해자'로 서술한 '인류'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속하는, 인간 종의 한 작은 부분집합이다.

 

나는 차크라바티가 앞에 언급된 것의 대부분에 동의할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아마도 인류세에 관한 새로운 행성적 담론을 채택함에 있어서 차크라바티는 기후 변화에 관한 '전지구적인' 보호주의와 정책 입안의 틀을 규정한 독특한 전문성에 대한 요구와 권력적재적 자연 사용으로부터 비판적 응시를 돌려버렸다. 놀이 공원을 위한 대량 이주를 정당화한 독특한 서양식 자연 이해라는 관념은 오늘날 생물권 보전지역, 탄소 은행, '기후 스마트' 산업형 농장, 그리고 비판가들이 그린 그래빙(green-grabbing)이라고 부르는 것의 다른 형태들을 뒷받침하는 데 동원된다.

 

현대의 환경 보호 담론에서 가장 널리 영향력이 있는 관념은 여전히 '공유지의 비극'인데, 그것은 정식 미생물학자, 자칭 생태학자, 인구 조절을 위한 십자군이자 과학적 인종차별주의에 잠시 관여했던 가렛 하딘(Garrett Hardin)의 견해였다. 자신의 생활 터전을 파괴하는 이기적 목축인이라는 하딘의 은유는 지역적 집단 행위의 학자들과 생태론자들에 의해 충분히 논파되었지만, 자연이 인류 또는 최소한 무가치한 대다수의 인간들에 복수할 것이라는 그의 관념은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의 가이아 가설 같은 자율적인 자연에 관한 신맬서스주의적 상상들의 근저에 놓인 텍스트로서 계속 작동한다.

 

성장의 한계와 행성적 경계들

 

하딘의 견해와 러브록의 견해가 사이비과학적인 예외적 견해로 무시될 수 있다면, 자연 자체가 인간 활동에 측정 가능한 한계, 공식적 과학만이 내밀히 관여하고 있는 한계를 설정했다는 관념은 기후 변화 및 '자원' 축소와 관련된 우려가 심화되는 맥락에서 새롭게 활기를 띠게 되었다.

 

수십 년 동안 '성장의 한계'에 관한 1970년대의 이론들은 신자유주의적인 1980년대, 1990년대 그리고 2000년대의 경쟁적 성장에 대한 병적인 집착과 기술적 낙관주의에 의해 배경으로 밀려나 버렸다.

 

그런데 한계 테제는 부활했고, 2009년에 요한 록스트롬(Johan Rockstrom), 빌 스테펜(Will Steffen) 등이 '행성적 경계들: 인류를 위한 안전한 조작 공간을 탐색하기(Planetary Boundaries: Exploring the Safe Operating Space for Humanity)'라는 논문을 출판함으로써 두드러지게 인류세 개념과 연결되었는데, 그 논문은 그것들을 넘어서면 '비가역적이고 급격한 환경적 변화가 거의 확실하게 발생하게 되는' 9개의 생물물리학적 티핑 포인트를 가정한다.

 

지금까지 그런 한계의 매개변수들에 관한 후속 논쟁들에는 경제학자들―추정컨대 사회과학자들 가운데 가장 과학적인―과 다른 환경 정책 옹호자들 외에 주로 지구과학자들이 관여했다.

 

환경 정책 옹호자들 중에는 계몽된 인간들은 이제, 좋든 나쁘든 간에, 인간 및 비인간의 세계에 대한 공동 창조자로서의 우리의 역할을 인식하고 우리가 만든 것을 가장 잘 이용하기로 결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탈환경주의자들이 포함된다. 이런 새로운 보호주의의 신조들은 자연적 한계가 고정되어 있거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과 목적은 모든 종과 개체군의 생존이 아니라 오히려 지구공학이라는 수단을 비롯한 생태적 '탄력 복원성'의 유지와 적응 능력의 향상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지속 가능성은 어느 장소에 어느 종이 보존되어야 하고 어느 종이 잉여적이어서 합당하게 포기될 수 있을 것인지와 관련하여 과학에 의해 특징지워진 결단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정확히 어떤 목적을 위한, 그리고 누구를 위한 결단인가?

 

생태근대주의

 

브레이크스루 인스티튜트(Breakthrough Institute)에 의한 이런 접근 방식의 2015년 회람인 생태근대주의적 선언은 '기후 완화는 근본적으로 하나의 기술적 난제이다'라고 주장한다.

 

그 선언은 전 세계에 걸친 도시화, 하이테크의 식량 생산 능력, 집약적 농경, 탄소 포집 기술들의 잠재력 그리고 지구화된 자원 채굴의 효율성을 경제적 성장과 생태적 파괴를 단절시키는 추세의 증거로 찬양한다. 이런 추정적 단절은 핵분열과 핵융합, '차세대 태양 기술' 그리고 대기에서 탄소를 제거하는 기술에 의해 더욱더 재촉될 수 있는데, 그래서 인간들은 "자연을 위한 더 많은 여지를 남기게 되"고 "좋은 인류세"를 초래할 수 있게 된다.

 

공공 부문의 규제와 보조 정책들은 어떤 역할을 수행하지만, 주로 민간 부문 기업가들이 기술적 혁신들을 "시장에" 내어놓는 데 도움을 준다.

 

그 선언에 따르면,

 

"오늘날 전 세계의 생태계들은 위험에 처해 있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것들에 과도하게 의존하기 떄문이다. 연료용으로 땔나무와 목탄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나무를 베어 숲을 파괴하고, 야생 동물을 식용으로 먹는 사람들은 포유류 종을 사냥하여 지역적으로 절멸시킨다. 이익을 얻는 것이 지역적인 토착 공동체이든 외국 기업이든 간에, 자연 보호에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들이 자연 환경에 지속적으로 의존한다는 점이다."

 

인간들이 "자연 환경"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이중적으로 이원론적인 함의와는 별개로, 내가 우려하는 것은 그 진술의 인간 종의 자기중심적인 균일화이다. 숲이 화전 경작, 땔나무 수집 그리고 지속적인 사냥에 의해 파괴되든 구리 광산과 팜유 농장에 의해 파괴되든 간에,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들'이다.

 

자본주의, 산업화 그리고 제국

 

정확히 그렇지는 않다고 인류세의 다른 옹호자들은 대응할 것이다. 인간들이 은총에서 타락하게 된 것은 18세기 중반에 시작된 석탄을 동력으로 이용한 것인데, 증기, 강철 그리고 석유로 이어졌다.

 

그런데 어떤 환경 아래에서, 그리고 누구의 손에서 화석 연료 기술들이 획기적인 동력을 획득하게 되었는가? 인류세 관념의 비판가들인 안드레아스 말름(Andreas Malm)과 알프 호른보그(Alf Hornborg)는 "증기에 투자하여 화석 경제의 초석을 놓은 사람들은 서양 세계의 작은 한 구석에  거주한 자본가들"이었다―어떤 유권자들도 아니었고, 인간 종은 더욱더 아니었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이런 "영국 백인들의 도당"은 특수한 생태사회적 질서 속에서 차지한 그들의 위치 덕분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그들의 기술들의 수익성과 변형력은 "대단히 불공평한 전지구적 과정들"―아메리카 대륙의 인구 감소, 노예제, 영국 광부와 공장 노동자들의 착취 그리고 저렴한 의류에 대한 전지구적인 수요―에 의존했다. 게다가 "산업화가 의존하는 생물물리학적 자원의 비대칭적인 교환"은 여전히 "근대적인 화석 연료 기술의 바로 그 현존을 위한 조건"이라고 말름과 호른보그는 주장한다.

 

이런 주장들은 현대의 환경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세계화된 화석 연료 경제의 사회발생적 기원들을 강조할 뿐 아니라, 하나의 계급으로서 동일한 주인공들이 오늘날의 화석 연료 기반 세계 경제의 최대 수혜자이자 진흥자들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의 절박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온실 가스 배출은 계속해서 증가했는데, 하루에도 수천 번씩 이 계급의 구성원들이 시추하여 프랭킹 작업을 하도록, 채굴하여 투매하도록, 벌목하여 태우도록, 정치인들을 매수하여 기업 대출을 진전시키도록, 우호적인 학자들에게 자금을 지원하여 새로운 기관들을 설립하도록, '깨끗한' 화석 연료에 관한 허위 사실들로 매체를 채우도록, 환경 규제를 차단하도록 그리고 생태근대주의자들이 그들의 희망을 부여하는 첨단 기술은 고사하고 덜 오염적인 방법들을 도입하지 않게 선택하도록 결정을 내린다.

 

이런 결정들이 무심함이나 탐욕에 의해 지배되느냐, 아니면 가장 전형적으로 경제적 생존 경쟁에 의해 추동되느냐 하는 점은 결과와 무관하다. 물론, 어떤 괜찮은 자본가들은 다른 선택을 하거나 또는 전지구적 탄소 경제의 핵심에 놓여 있는 화석 연료 및 수송 산업과 군산 복합체에 직접적인 이해 관계가 없다.

 

소수의 석유 거물들은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 재생 에너지에 대한 여지를 만들지만, 그들은 훨씬 더 작은 소수자들이다. 그리고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화석 연료 자본주의로부터 물질적 안락함과 편의를 도출하며, 더 많은 사람들이 다른 모형을 전혀 갖지 못한 채 똑같이 욕망한다.

 

그런데 인간 종을 '지질학적 힘'으로 만들어 버린 것은, 화전 경작자들, 땔나무 수집자들 또는 심지어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의 행위들의 누적보다도 훨씬 더, 낭비적 생산과 과소비의 현재 체계로부터 이익을 보는 권력자들(그리고 그들의 대리인들)에 의한 결정들의 결과이다. 우리 종의 이 계층의 권력은 특수한 사회적 질서, 즉 희소성을 산출하고 잉여를 분배하는 사회경제적 배치―기아와 나란히 비만을, 무주택자들에 의해 둘러싸인 외부인 출입 통제 구역을, 그리고 물질적으로 가난한 지역보다 풍요로운 지역에서 수천 배 더 큰 탄소 발자국을 만들어낸다―에서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서 비롯된다.

 

지구 북반구 "생활 방식"를 확대하기

 

'인류'가 아무튼 지구 북반구 '생활 방식'을 90억 내지 100억의 인구에게 확대하는 것의 생태적, 사회적 그리고 심리적 비용을 감당하기로 선택할 수 있더라도, 물리학뿐 아니라 사회과학과 생명과학이 예증하듯이, 그것은 생물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런 목표가 환영이 아닌 것처럼 권력자들의 행위와 정책들이 지속되는 한, 기후로부터 보호받는 사람들과 기후 변화의 결과로 인해 이미 불안한 삶을 위협받고 있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 사이의 간극은 심화될 것이다. (차크라바티와는 대조적으로, 부자들은 동일한 폭풍에 직면할 것이지만 구명 보트를 갖추고 있다.)

 

차크라바티는 "인간들은...자연적 조건이 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이 관념은 자연-사회 대립쌍을 재자연화함으로써 인류 전체를 무의식적으로 "우리 자신의 결정들을 통해서" 지구를 변화시키는 획기적인 행위를 수행하면서 인류세로 우연히 "진입하게" 되었지만, 맹목적이고 어리석기 때문에 결과를 변화시킬 수 없고, 그래서 그렇게 해야 할 의무를 면제받은 맹목적인 악역으로 제시하지 않는가?

 

기후 변화와 '정치적 정언 명령'

 

차크라바티는 어떤 정치, 또는 누구의 정치가 요구되는지 거의 말하지 않더라도, 그가 "지구 온난화의 과학 자체가 필수적인 정치적 정언 명령들을 산출한다"고 적을 때 "네 가지 테제"에서 비판에 대한 주요한 발단이 개시된다. 차크라바티는 전지구적 사회가 행로를 변화시키려고 이성에 인도되어 집단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에 대해 비관적이다.

 

그런데 인류 전체가 정치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며 사실상 행동할 수도 없다. 현재의 위기 국면은 생태적 전환점인 동시에, 상이한 정도와 상이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수십 억 명의 사람들에게 생존의 위기이기도 하다.

 

오늘날 현실은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의 진행 중인 결과들과 지구 온난화의 효과로 물질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빈곤해지는 다수의 '우리'로 구성된 인류의 다양한 계층들 사이의 연결 관계들을 식별하고 강화하는 정치를 요청한다. 

 

'환경적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정치적 운동이 일어난 멕시코에서 단서를 취할 수 있을 것인데, 그들은 해수면 상승과 폭풍과 기근의 악화로 위험에 처한 사람들뿐 아니라, 농업 연료 농장, 거대한 수력 댐 그리고 풍력 발전 단지와 자연과의 재연결을 추구하는 부유한 여행객들을 위한 하이엔드 생태 리조트 시설과 탄소 옵셋 계획을 위한 퇴거 같은 사기성의 하이테크 '지속 가능성' 체계들에 의해 착취당하고 이주당하는 사람들이다.

 

기후 변화가 사실상 시대를 바꾸고 있는 것이고 인간들이 지질학적 힘이라면, 이것은 본원적인 사회적 변형을 위한 정치가 구축될 수 있는 다양성 가운데 공통적인 것들을 식별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회과학의 도구들, 역사의 교훈들 그리고 인류의 통찰들을 저버릴 최악의 시기가 아닌가? 지구과학이 자연의 정치에 무엇이 걸려 있는지에 관해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사회과학자들이 빈정되었듯이, 우리는 '신은 물리학에게 쉬운 문제를 주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공동체들로 하여금 서로에게 종속되지 않거나 심지어 서로 유사해지지 않은 채 서로를 보고 들을 수 있게 하는 언어 및 상호작용 양태들을 창출하고 소통하며, 그리고 이것들에 의거하여 전 세계의 환경적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우리의 '환경들'에 대한 통제권을 그것들의 파괴로부터 이익을 얻는 사람들로부터 탈취할 수 있게 할 유대, 연결망, 실천, 운동 그리고 제도를 강화하는 것이 가장 긴급한 정치적 과제가 아닌가? 그것은 우리가 공평하며, 그리고 당연히 지속 가능한 세계들을 예상하고 계속 건설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