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휘트니 바우만 등: 오늘의 쟁점-우주론과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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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30.

 

우주론과 환경

Cosmology and the environment

 

과학적 세계관들이 환경적 쟁점들에 관한 폭넓은 행동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정보와 동기를 제공한다는 믿음은 강단 내에서 그리고 강단을 넘어서 지지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새로운 우주론을 구성하기 위한 소재에 대한 과학에의 의지는 진화의 서사시(Epic of Evolution), 위대한 이야기(The Great Story), 우주의 여행(Journey of the Universe), 뉴 스토리(The New Story) 그리고 거대사(Big History) 같은 이름들로 진전되는 다양한 신흥 운동들에서 명백하다. 환경 문제들이 심화됨에 따라, 이런 새로운 우주론들의 옹호자들은 요청되는 것은 증거에 기반을 둔 전지구적 이야기와 공통 윤리라고 주장한다. 이런 운동들에서 암묵적이거나 명시적인 것은 현존하는 종교적 전통들은 너무나 편협하며(전지구적 호소력을 결여하고 있다) 과학적 실재들과 현대의 환경적 관심사들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확신이다. 새로운 우주론의 옹호자들은 물리과학과 생명과학이 우리 우주의 독특하게 층서화된 본성―모두에게 속하는 이야기―을 드러낼 것이고 이런 우주 이야기가 지구의 생물군에 대한 경이와 깊은 관심을 고무할 것이라고 믿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의 핵심 서사는 보편적이면서 참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과학적 서사들은 우리를 진화적 실재와 우주적 실재에 확고하게 정초하면서 의미, 제의 그리고 윤리적 지침에 대한 우리의 뿌리깊은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우주론은 과학에 불가사의한 계시적 역능을 부여하는데, 과학은 우리 세계를 탈주술화하기는 커녕 경이, 의미 그리고 가치를 회복시키기 위한 주요한 매체로서 찬양받게 된다.

 

우주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전지구적 신화로서 작동할 수 있는가? 그리고 작동해야 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현대의 과학적 우주론들이 종교적 전통들과 환경 관련 믿음 및 실천들에 미치는 유망한 영향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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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트니 바우만(Whitney Bauman), 플로리다 국제 대학교의 종교학 부교수

 

이것은 거대한 의문이다! 종교를 의미를 형성하는 실천으로 이해하고, 그래서 인간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의 일부는 의미를 형성하는 생명체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나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우주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우주, 다른 동물들 그리고 자연 세계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데 있어서 어떤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독자적인 사회역사적 상황이 없지 않다. 종교적이든 과학적이든 간에 어떤 서사도 자체의 '상황성(locatedness)'을 벗어날 수 없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종교적 이야기들은 사람들이 서로 더 격리되어 있었고(상대적으로 말해서), 그래서 자신들의 국소적 이야기를 유일한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었던 시대에서 전승된 반면에, 과학에서 비롯된 이야기들은 (전지구적인) 행성적 공동체―다양한 유형의 민족들이 소속된―와 점점 더 커지고 가늠할 수 없는 우주(137억 년 동안 팽창한)에 대한 감각과 더불어 출현했다. 물론 이것은 우리 인간들이 대두하고 있는 행성적 이야기에서 많은 공통 근거들―우리는 모두 포유류 동물이고, 우리는 별 먼지에서 비롯되었고, 우리는 모두 호모 사피엔스이며, 중력이 지구 생명을 잡아둔다는 등―을 찾아낼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이야기일 수 있는 이야기라는 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진화하는 행성과 팽창하는 우주에서 행성적 생명체로서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역할을 수행할 것이지만, 200년 전의 "과학"과 "지식"이 기묘하고 낡은 듯 보이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과학과 지식도 지금부터 200년 후에는 그렇게 보일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이야기들을 다시 말하고 유의미한 세계와 다시 연결해야 할 것이다. 바라건대, 이런 다시 말하기는 행성적 공동체(인간과 비인간 모두)의 더욱 더 많은 목소리들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항상 확대되는 이런 지식 생산 방법은 모든 것을 보편적 이야기(A Universal Story)라는 가장 낮은 공통 분모에 가두기보다는 생명의 다양성과 관련된 의미와 해석들에 대한 다수의 견해를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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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크리스천(David Christian), 매쿼리 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이자 거대사 연구소 소장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지금까지 인간의 모든 공동체들은 기원 이야기를 전했다. 꿈 이야기 속에 묻어 들어가 있든 세계 종교들의 위대한 책들 속에 묻어 들어가 있든 간에, 이런 이야기들은 의미로 가득차 있는 시간과 공간의 거대한 지도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 여러 세대 동안 수집된 최선의 지식을 요약했다. 이런 지도들은 교육의 핵심에 놓여 있는데,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더 큰 우주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대한 명료한 관념을 제공한다.

 

현대의 공교육은 그런 통합적 이야기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파편적 지식―약간의 민족사, 약간의 화학, 약간의 수학과 문학, 아마도 외국어―을 제공한다. 더 정합적이고 더 유의미한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 학생들은 각 사회의 종교적 전통과 문화적 전통 내에서 여전히 가르치는 학교에 가야 한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들이 배우는 것은 그들 주변의 기술들과 잘 맞지 않는다. 그들은 세계에 대한 현대의 과학적 이해와 더 오래된 문화적 및 종교적 전통 속에 묻어 들어가 있는 지식 사이에 심대한 단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위험하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은 자살에 관한 책을 적었는데, 그 책에서 그는 더 큰 우주에서의 자신의 지위에 대한 정합적이고 믿음직한 이해의 부재가 단절, 축소, 방향 상실, 심지어 생명을 위협하는 좌절에 대한 감각을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현대적 기원 이야기의 부재가 일 세기 이상 동안 철학자와 작가들이 오늘날의 세계는 의미가 상실되어 버렸다고 주장한 까닭을 설명한다.

 

그런데 그것은 너무나 비관주의적일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는 지적인 건축 현장에서 살아가면서 전체 세계에 관한 축적된 지식을 총괄하여 시간과 공간의 믿음직한 지도들을 제공할 새로운 기원 이야기의 느린 구성을 바라보고 있다. 이런 기원 이야기는 지난 이 세기 동안 생성된 지식에 관한 방대한 이야기들 속에 잠복해 있다. 그것은 전체 세계에서 비롯된 지식을 응축하고 있기 때문에 엄청나게 풍부한데, 사실상 그런 이유 때문에 지금까지 이야기를 통합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우리 생물권의 역사의 전환점, 즉 우리 종이 지구의 여타 종들의 미래를 결정할 순간에 처해 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이 생물권과 사실상 우주 전체의 더 큰 역사들에 어떻게 들어맞는지 이해할 필요가 절박하다. 우리는 현대적 기원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런 이야기를 알아내는 것은 다양한 국가들에서 학자와 교육자들이 "거대사"에서 "우주 이야기"와 "우주의 진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름 아래 착수하고 있는 난제이다. 우리는 다음 오십 년 동안 광대한 기회와 난제들을 직면할 때 우리에게 힘을 부여할, 과학에 기반을 둔 풍부한 새로운 기원 이야기의 구성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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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스 젠킨스(willis Jenkins), 버지니아 대학교의 종교, 윤리 및 환경 부교수

 

여러 세대 동안 지구에서의 생을 구성할 기후 변화를 둘러싼 갈등을 협상하기 위해 행성 전역에서 파견되는 대표자들은 몇 달 뒤에 파리에서 모일 준비를 하고 있다. 그들이 공통 이야기를 공유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전지구적 신화로서 공평무사한 과학보다 더 나은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그렇게 확신하지 못한다. 그렇다. 진화적 우주론은 종교 같은 기능들을 수행할지도 모른다. "존재의 질서에 관한 거대한 이야기들을 말하는 것에 관한 한, 과학적 이야기들일지라도 그것들은 종교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로버트 벨라(Robert Bellah)가 말한다. 그것들을 그렇게 만드는 해석 행위들을 가리지 않는 한, 진화에 대한 과학에 기반을 둔 설명은 창조 신화로서 작동할 것이다.

 

그런데 거대한 이야기들이 우리의 실제적 주장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지는 내게 명료하지 않다. 진화적 우주론은 생태적 윤리를 과소결정한다. 인간의 우주로부터의 출현에 관한 서사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우리 기후를 가공해야 하는 것, 즉 2℃의 세계와 4℃의 세계를 위해 관리해야 하는 것과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똑같이 그럴듯하게 보인다.

 

나는 우주론들이 도덕적으로 무관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것들은 실존적 분위기와 해석적 맥락을 설정한다. 우주 생성의 신화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야생의 우주에서 부유하는 것에 관해 사색하게 만드는데, 그것은 우리의 지역적 정체성들과 정치적 블록들에 관한 역설적인 시각들을 허용해야 한다. 그것들은 별 앞에서 경이감을 느끼도록 인간들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은 영혼과 사회들을 위한 강장제인 듯 보인다. 관습적으로 종교적인 서사들이나 토착적인 우주론들뿐 아니라 과학에 기반을 둔 이야기들도 그런 일을 수행할 것이다.

 

 

인간들이 행성적 난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실제적으로 규정함에 있어서 어느 우주 생성론이 멀리 갈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거의 없다.  파리는 하나의 참된 신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파리는 미래 세대들이 자랑스러운 서사시 이야기들을 전할 행위들을 수행하기 위한 다원주의적 협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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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 존스턴(Lucas Johnston), 웨이크 포레스트(Wake Forest) 대학교의 종교 및 환경학 부교수

 

과학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대중 문화에서 과학적 정보에 의거한 암흑 녹색 종교적 감성에 대한 의식과 친화성의 성장을 가리키는 연구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우려는 가장 두드러진 출생율 증가가 다윈주의적 과학과 과학적 우주론들이 널리 수용되지 않고 있는 나라들(출생율 상위 30개 국가는 아프카니스탄을 제외하고 아프리카 대륙에 소재하고 있다)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지역들 가운데 일부는 기후 변화의 영향을 먼저 느낄 자원 부족 갈등 지대이기도 하고, 그래서 이런 문제들을 악화시키고 있다. 대부분의 인구 증가가 이런 지역들에서 일어나며, 그리고 이런 갈등 지대들의 교육 자원이 빈약하다면, 환경적 이상 또는 과학적 우주론들이 얼마나 널리 확산될 수 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160년이 채 지나지 않는 동안 다윈의 관념들의 확산 속도와 범위가 두드러진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보편적 전개(또는 진화)에 대한 존중을 진전시키는 과학적 우주론들의 출현은 훨씬 더 최근의 일이다. 그래서 희망은 여전히 있다. 미해결의 의문은, 기후 파괴, 자연 재난, 전염병 또는 다른 비극적 사건들의 영향이 극적인 인구 감소를 촉발하기 전에 이런 관념들이 평화로운 사회문화적 전환과 정치적 행위를 고무하기에 충분할 만큼 빨리 확산될 수 있는지(아마도 특히 앞에서 언급된 취약한 갈등 지대들에서) 여부이다.

 

이른바 세계 종교들에 속하는 일부 사람들이 과학적 우주론들이 자신들의 신학적 해석 또는 전형적인 실천을 특징짓는다고 믿을지라도, 그들의 확신은 흔히 그들의 전통 내에서 주변부적인 것이다. 세계의 가장 큰 종교적 전통들의 많은 평신도들은 여전히 그런 변화에 저항적이며, 그리고 다른 가치들, 흔히 경제적 가치들이 종교적 가치들보다 우위에 서는 많은 사례들이 존재한다. 아메리카 합중국에서 앤서즈 인 제네시스(Answers in Genesis) 또는 콘월 얼라이언스(Conwall Alliance) 같은 복음주의적 조직체들은 그들의 종교들에 대한 환경적 해석들과 이른바 "이교도적인" 과학적 우주론들과 논전을 벌이는 데 있어서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주로 산업화된 세계에서는 다른 추세들이 희망적인데, 이것은 이런 전통적인 제도적 종교들에 대한 불만의 증가를 가리킨다. 아마도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전통적 종교들로부터의 이런 탈주가 속도를 올린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고위 종교 지도자들들에 의한 성명과 언명에도 불구하고 가장 유망한 추세들은 이런 전통들의 주류 밖에서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친화성을 상실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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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제인 루벤스타인(Mary-Jane Rubenstein), 웨슬리언(Wesleyan) 대학교의 종교학 교수

 

이것은 매력적인 생각이다. 모든 사람이 우리가 동일한 원시 액체에서 기어나왔거나, 또는 동일한 우주적 폭발에서 용솟음쳐 나왔다는 초문화적 진리를 믿을 때에만 우리의 행성적 집의 발작적인 경고들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 생각은 계속된다. 종파적 신화들과는 달리 과학적 우주생성론들은 보편적이고, 무한히 포괄적이며, 그리고, 음, 올바르다. 그래서 리그베다, 꿈 그리고 창세기는 내쫓고 찰스 다윈, 칼 세이건 그리고 스티븐 호킹을 받아들여라. 일단 우리 모두가 동일한 이야기를 말할 수 있다면, 동일한 생태학의 배후에 결집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환상은 미심쩍을 뿐 아니라 엉뚱하고 위험하며 자기태만적인 것이 아닐까 우려한다. 현대 과학이 말하는 이야기들은 보편적이지 않기 때문에 엉뚱한데, 오히려 그런 이야기들은 그것들을 만들어내는 특수한 의문들, 가정들 그리고 실험들을 반영한다(라투르, 스탕제, 바라드). 이런 숨은 시각들은 흔히 반생태적 가치들을 과학적 이야기들에 코드화하기 때문에 위험한데, 예를 들면, 어떤 선형적 생물학들의 재생산 전쟁, 또는 많은 창발 이론들의 인류중심주의, 또는 대부분의 다중우주 우주론들의 일회용 세계들이 있다. 마지막으로, 종교에 대한 과학의 승리라는 환상은 자기태만적인데, 왜냐하면 단일한 객관적 진리에 대한 믿음은 무엇보다도 일신론의 유산이라는 점은 거의 틀림없기 때문이다(니체).

 

<<카니발 형이상학(Cannibal Metaphysics)>>에서 에두아르도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Eduardo Viveiros de Castro)는 다윈주의적 신화와 아메리카 원주민의 신화를 대립시키는데, 전자는 인간이 예전에 (비인간) 동물이었다고 말하는 반면에, 후자는 (비인간) 동물이 예전에 인간이었다고 말한다. 여기에 서사가 있고 존재론적 갈등도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예컨대, 동물 복지를 추구할 수 있기 전에 한쪽이 "이길" 필요가 있는가? 또는 상이한 우주생성론에서 비롯되는 공통 목적을 향해 작업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 세속적 다양성―종, 생태계, 생활 방식 및 사고 방식의―이라면, 내게는 그런 다양성에 대한 하나가 아니라 다중의 설명이 필요하며, 그리고 그것들의 번성과 확산을 뒷받침하는 정치적 및 경제적 결단들을 추구해야 하는 듯 보인다. 확실히 어렵고 끝없는 작업이지만, 세계 전체를 전환시키려는 다른 한 노력보다 더 온전하고, 더 건전하며, 더 생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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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사 세데리스(Lisa Sideris), 블루밍턴 소재 인디아나 대학교의 종교학 부교수

 

새로운 우주론(또는 어딘가 다른 곳에서 내가 "새로운 창세기(the New Genesis)"라고 부르는 것)은 환경적 관심사들에 동조하고 라이벌 종교들과 경쟁하도록 의도적으로 고안된 "새로운" 과학적 종교, 즉 기능적 우주론을 제시한다. 거대 서사와 신화적 목적들을 위해 과학을 전유하는 양식으로서의 이 우주론은 참으로 참신하지 않다. 그것은 마틴 에거(Martin Eger)가 서사시 과학이라고 부른 것과 유사한데, 그것의 특징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가능한 한 멀리 진화적 패러다임을 확장하는 것("우주적" 또는 "보편적" 진화), 과학과 서사적 응집 및 포괄성의 통일에 대한 강조 그리고 과학이 사회에 제공하는 모든 것―신흥 의식, 새로운 도덕―에 대한 무비판적인 열광.

 

새로운 과학적 이야기는는 모든 것을 바꾼다고 흔히 듣게 된다.

 

일반적으로 서사시 과학은 우리가 최종의 변경에 있다고 암시하게 될 만큼 완전하거나 첨단적인 것으로 흔히 귀찮게 권유되는 단일한 진화 이야기 주위에서 응집되고, 그래서 우주의 마지막 신비들에 다가간다. 총체화 야망을 품은 새로운 우주론은 역설적으로 경이 자체의 근절에 이르게 된다. 이런 운동들은 존 키츠(John Keats)가 부정적 역량이라고 부른 것, 즉 의심, 신비 그리고 애매성 속에 머무를 수 있으며 모든 현상과 경험의 체계적 지식으로의 범주화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명백히 결여하고 있다. 자연에 대한 놀라움과 관심을 촉발하는 서사들로서 제안되는 그것들은 사실상 불확실성 또는 미해결의 경이에 부딪친다.

 

이런 서사들에 놀라움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실망스럽게도 친숙한 형태들―인간 종의 출현을 처음부터 함축하고 있는, 자기조직적이고 항상 복잡해지는 우주에 관한 의식, 마음 또는 정신에 대한 경이, 이전의 모든 미계몽된 세대들은 알지 못한 우주의 패턴과 과정들을 "발견"해낼 만큼 충분히 유식한 근대적 인간 주체에 대한 경이―로 나타난다.

 

새로운 우주론의 일반적으로 인간적이고 인류중심주의적인 풍미는 전통적 종교들을 타락시키고 환경적 가치들의 원천으로서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으로 가정되는 인간의 중심성에 대한 어떤 두드러진 개선도 이루어내지 못한다. 때때로 신우주론자들은 현존하는 신앙 전통들을 대체하려는 어떤 의도도 부인하지만, 그 서사의 전권적 취지는 그것을 종교의 뛰어난 경쟁자로서 위치시킨다.

 

때때로 "종교 2.0"으로 개종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자연에 대한 돌봄을 고무하는 것보다 우선한다. 그래서 서사시 옹호자들은 과학을 의미로 가득찬 범용 종교로 가치화하고 신성화하는 데 매우 몰입하여 자연의 가치와 경이가 가려지게 된다.

 

이것은 불행한 사태인데, 왜냐하면 인간 사회에서 과학은 이미 엄청난 권력과 특권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자연에게는 거의 도움이 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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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론 테일러(Bron Taylor), 플로리다 대학교의 종교 및 자연 교수

 

과학적 우주론들은 점점 더 신성화되고 있으며, 점점 많아지고 있는 개인과 집단들에게 영성적 의미와 윤리적 지침을 제공한다. <<암흑 녹색 종교: 자연 영성과 행성의 미래(Dark Green Religion: Nature Spirituality and the Planetary Future)>>에서 나는 그런 종교적 자연주의를 서술하였고, 또한 일부 사람들이 그런 추세를 정치적으로, 영성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위험하다고 간주한다고 지적했다. 내 책과 <이매넌트 프레임(The Immanent Frame)>에 실은 이전의 에세이에서 나는, 우리는 항상 어떤 종교의 어두운 측면에 대해 방심 않고 경계해야 할지라도(사회적으로 분열적이고 때때로 폭력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포함과 배제, 순수와 오염의 범주들을 설정하는 것에 대한 종교의 기호를 감안하면), 과학에 기반을 둔 세계관들이 세계의 지배적인 종교들보다 그런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훨씬 더 작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과학적 이해가 흔히 지구와 우주의 아름다운 것들과 불가사의한 것들에 대한 경이 및 놀라움과 더불어 지구 생명의 취약성과 독특함에 대한 부수적인 이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세계와 그것의 고통으로부터 신에 의한 구조를 약속하거나, 또는 그것을 어떤 식으로 환영적이거나 끝에서 두 번째의 정거장으로 간주하는 종교에 비교하여 이것은 지구의 생명 체계들의 가치를 증진시킨다. 게다가 진화적 이해는 우리 인간들이 여타의 생명 형태들과 공통 조상을 공유하고, 그래서 우리는 그저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인간 동족들이 아니라, 전적으로 문자 그대로, 모든 생명과 혈족 관계이다. 그런 이해들은, 인종차별주의든 인류중심주의든 간에, 우월주의적 이데올로기들을 부식시킨다. 그래서 서술적 분석이라기보다는 규범적 분석에 관여하는 경우에 나는 과학적 이해의 확산과 신성화가 함축하는 생물문화적 의미들에 관해 덜 걱정할 뿐 아니라, 또한 나는 일반적으로 이런 추세들이 유익하다고 간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