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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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티스 화이트: 오늘의 책-<<만들어진 과학>>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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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 14.

 

커티스 화이트(Curtis White)

<<만들어진 과학(The Science Delusion)>>(2014)

 

커티스 화이트와의 인터뷰

An Interview with Curtis White

 

―― 린다 휴먼(Linda Heuman)

 

LH: 당신의 책 제목은 <<만들어진 과학>>인데, 그것은 명백히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의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이라는 책의 제목에 대응합니다. 만들어진 과학이란 무엇이며, 그리고 정신적으로 유의미한 삶을 사는 것에 대한 그것의 함의는 무엇인가?

 

CW: 유일 과학 망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문화에서 과학이 담당하는 역할을 검토하고자 하는 책을 저술할 때 가장 큰 난제들 가운데 하나는 도대체 눈에 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제목은 진지하지만 도발입니다.

 

제가 비판하는 것은 이데올로기로서의 과학, 즉 줄여서 과학주의(scientism)입니다. 과학주의와 관련된 문제는 그것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그것 자체의 견지로 환원시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술적 창의성은 신경 세포들과 화학 물질들의 기능일 뿐이고, 종교는 신(神) 유전자의 결과이며, 신앙은 우리의 유전자 구성에 배선되어 있습니다.

 

놀랍지 않게도, "정신(spirit)"은 금지된 낱말입니다. 과학 저술가들은 신자를 근본주의자로, 종교의 역사를 일련의 범죄 일화들로 환원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리처드 도킨스가 비난받을 만하고,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가 비난받을 만했습니다. 정신의 의미에 대한 어떤 세심한 고찰도 제외됩니다. 그런데 물론, 불교 철학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종교 사상의 역사는 꽤 미묘합니다. 다른 한 훌륭한 사례는 키에르키고르(Kierkegaard)에서 시작되는 기독교 실존주의 사상가들의 유산입니다. 제가 보기에 그런 작업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부끄럽게도 부정직한 짓입니다.

 

LH: 과학주의와 종교적 근본주의 둘 다 빠르게 변화하고 방향을 상실할 정도로 다원적인 세계에서 확실성에 대한 인간의 욕구에 응답합니다. 그것들은 어느 정도까지 같은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까?

 

CW: 당신의 질문이 시사하듯이, 종교적 근본주의와 과학주의 사이의 대립 구도는 알려져 있는 것보다 더 유사한 것들 사이의 대립입니다. 근본주의와 과학주의 둘 다 개방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하고 폐쇄하려고 합니다. 과학은 "감금" 증후군에 취약한 경향이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호기심을 소중히 여기고, 그래서 그들은 열린 자세를 소중히 여기지만, 그들은 흔히 세계에 관한 대안적 사유 방식들에 둔감합니다. 그들이 자신의 세계관을 벗어나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이 문제는 과학자들을 교육하는 방식에 의해 야기될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과학자들은 역사 및 지성사의 더 나은 배경 지식을 갖출 필요가 있는데, 특히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같은 저명한 인물들이 그런 역사에 관한 판단을 내리고 "철학은 죽었다"와 같은 것들을 말할 것이라면 말입니다.

 

LH: 과학은 세계관이 아니라 정말로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이라는 일반적인 가정이 있습니다. 그 가정과 더불어 다른 한 가정이 동반되는데, 과학은 사물들이 어떠한지에 대한 자체의 특권적 접근권에서, 즉 즉 실재계의 기반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권위를 도출한다는 가정을 말합니다.

 

CW: 여기서 기묘한 점은, 과학 자체는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사물들에 대한 특권적 접근권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며, 그리고 과학의 발견들에 있어서, 특히 물리학에 있어서 철학적 역설들은 과학의 많은 불확실한 점들에 대한 공개적인 인정이라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에게 있는 것은, 과학은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이데올로기적 가정과 과학의 실제 작업, 즉 대단히 사변적이고 흔히 수학적 실재성만 갖추고 있는 것 사이의 바로 이런 매우 불편한 결합입니다. 예를 들면, 물리학은 수학적 모형화에 대단히 의존하지만, 수학이 실재와 관련하여 매우 계시적인 듯 보이는 까닭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의심과 확실성(Doubt and Certainty)>>에서 물리학자 토니 로스맨(Tony Rothman)과 조지 수다르산(George Sudarshan)이 지적하듯이, 주식 거래인들이 사용하는 블랙-숄즈 모형의 수학 방정식은 어떤 입자가 액체 또는 기체 속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여주는 방정식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간결하게 주장하듯이, 실제 세계에서는 주식과 입자 운동 사이에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뉴턴 방정식처럼 익숙한 것도 수학적 이상화이고, 그래서 아인슈타인이 증명했듯이, 중요한 점들에서 부적절합니다. 그리고 천체만큼 거대한 것들의 운동에 관한 뉴턴적 예측들이 이상화된 것들이라면, 양자 또는 끈 또는 브레인 끈이 무엇과 결부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것들은 숫자일 뿐입니다. 그것들은 결코 경험적 현전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LH: 많은 사람들이 논리와 이성은 종교로부터 벗어난다고 가정합니다. 문학과 예술에 관한 체계적 연구가 어떻게 종교를 긍정할 수 있습니까?

 

CW: 우리 문화는 대체로 모든 이성은 경험적 이성이라고, 즉 논리적 전개는 경험적 사실에서 비롯된다고 가정합니다. 마찬가지로, 정신은 초자연적인 것들에 관여하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성 또는 정신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식은 아닙니다. 불교의 정신적 논리의 본질은 사성제(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苦)가 있습니다. 이런 괴로움의 대부분은 망상에 의해 고무된 이기적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이런 괴로움은 중단될 수 있습니다. 팔정도(여덟 개의 길)는 괴로움이 종식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것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확실하게도 정신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종교적 의문, 궁극적인 종교적 불가사의는 신이 존재하는지 여부가 아닙니다. 저는 무신론자로 자처하는데, 왜냐하면 저는 그 의문이 어리석고, 유치하며, 핵심을 벗어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인 종교적 의문은 "자비란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또는, 기독교가 서술하듯이,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자비는 경험적으로 예증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유연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가까이 있는 성질, 즉 친절의 긴급성을 가리킵니다. 자비는 그것에 우리 자신의 삶의 에너지를 투입하는 만큼만 현존합니다. "이타주의 유전자"는 어처구니없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신-논리(theo-logic)"는 서양에도 존재합니다. 실존주의적 기독교에 한 가지 신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자비의 궁극성에 대한 확신에 놓여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신은 우리의 "궁극적 관심"의 대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그런 관심사들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우리의 참된 본성에 노출됩니다.

 

그리고 낭만주의 이래로 예술은 유사한 논리에 관여합니다. 물론, 일반적인 가정은 예술은 상상 또는 오락 또는 시간 낭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제 주장은 예술은 생각한다는 것이며, 그리고 지난 이 세기 동안의 예술사는 예술은 매우 특수한 방식들로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술은 독자적인 정신적 논리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는 프리드리히 쉴러가 "문화의 비참"이라고 부른 것―인간이 "파편에 불과하게" 되는 산업적 문화를 의미합니다―을 어떻게 초월할 수 있는가? 쉴러와 낭만주의자들의 경우에, 예술의 다중 행로는 이런 괴로움의 초월을 달성하는 길입니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가 서술했듯이, "회화는 아파트를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적에 맞서는 공격전 및 방어전의 무기이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또는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은 그 "적"이 잔인성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런 맥락들 가운데 어느 것에서도, 이것은 도착적 논리입니다. 당신이 상황을 경험적으로 판단했어야 한다면, 저는 당신이, 볍률가들이 즐겨 말하듯이, "증거의 우월성"이,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1984>>에서 오브리언(O'brien)이 말하듯이, 미래는 "인간의 얼굴 위에 부츠 자국이 영원히 새겨지는 것"이라는 관념을 가리킨다는 결론을 어떻게 내릴 수 없었을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불교는 정반대의 결론이 이르게 됩니다. 우리의 괴로움은 우리의 정체성―"인간 본성" 때문에 폭력적인―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우리가 망상에 사로잡혀 있고, 자신을 알지 못하며, 그리고 괴로움을 끝낼 수 있으려면, 니체가 말하듯이, 진정한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것을 정신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논리의 도착성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현장에서 사실들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기독교도 이웃에게 기독교의 모습이 실제로 어떠한지 알아보러 로마에 갈 것이라고 말하는 유대인의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물론 그 이웃은, 일단 그 사람이 로마에서 모든 부패를 보게 되면 그는 개종하지 않을 것이라고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그 유대인이 돌아왔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 친구여, 당신의 신앙은 정말로 가장 위대한 신앙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그런 잔인성과 위선을 견뎌내지 못했을 겁니다."

 

이런 사유 과정에서 알게 되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재론에 기반을 둔 정신적 이성의 한 형태, 인간 세계의 모습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것은 관념적으로 객관적인 세계에 의해 추동되는 경험적 이성이 아니며, 그것의 결론들도 초자연주의나 마술적 사유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이성이 경험적이어야 한다는 관념은 우리 주인들에 의해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LH: 비판자들이 이데올로기로서의 과학주의에 관해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이 이데올로기를 일단의 믿음들―머리 속에 품고 있는 명제들과 같은―로 간주하는 듯 보입니다. 당신의 책은 특수한 과학주의에 있어서 이데올로기는 그것보다 훨씬 더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감각을 제게 부여했습니다.

 

CW: 저는 마르크스가 사용한 의미로, 즉 우리가 특수한 문화의 구성원으로서 지니고 살아가는 이야기와 관념들로서 이데올로기라는 낱말을 사용합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모든 문화는 틀림없이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다는 중립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 술어의 경멸적 의미는 권력과 특권의 구조들이 자체의 이해관계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런 이야기들을 조작하고 강요할 수 있고 그렇게 한다는 관념에서 비롯된다. 그런 이야기들은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고 "어떤 이야기들이 우리 자신의 이해관계를 가장 잘 뒷받침하는가?"라는 의문에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모든 사람이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기를 바라지만, 실제로는 단 하나의 집단에 이익이 되는 이야기들을 말하려면 부정직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관심이 있는 것은 과학과 과학의 후원자들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지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그런 부정직하거나 잘못된 요소들을 판별하는 것입니다.

 

물론 과학에 의해 전해지는 주요한 이데올로기적 이야기는 과학은 이데올로기와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든 이데올로기가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사물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경제학은, 이기심은 합리적인 것이고, 이기심은 자유의 본질이며, 그리고 이기심은 우리의 유전자적 구성의 일부이기도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들은 엄청난 파괴와 잔인성을 엄호하는 허구들이 됩니다. 불교가 주장하듯이, 이런 관념들은 숙련된 것들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망상이고, 그래서 대단히 유해합니다.

 

LH: 당신은 우리는 기술뿐 아니라 기술 지배 체제―기업가들, 군사전문가들 그리고 이기적인 정치가들에 의해 운영되는―도 갖고 있다고 적었습니다.

 

CW: 그것들이 더 큰 문화와 맺고 있는 관계들이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채, 우리 주변에 그저 우연히 이런 장난감과 기기들이 존재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입니다. 정치적 이론서로서 제 마음을 강하게 움직인 책들 가운데 하나는 시어도어 로작(Theodore Roszak)의 <<대항 문화의 형성(The Making of a Counter Culture)>>(1968)이었습니다. 최근에 저는 그 책을 다시 읽었는데, 그것은 여전히 매우 설득력이 있습니다. 로작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기술 지배 체제는 산업적 사회가 자체의 조직적 통합의 절정에 이르는 사회적 형태를 의미한다."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는 그것을 "통제된 사회(administered society)"라고 불렀습니다. 통제된 사회는 기술적 합리성과 산업적 조직이 우리의 삶의 방식의 모든 양태 속에 깊이 침투해버린 사회입니다.

 

예를 들면, 개인용 컴퓨터를 집에 가져옴으로써 작업대도 집에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일 주일에 몇 시간 일하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어떤 점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결코 작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이제 그들은 자기 일자리를 주머니에 휴대하기 때문입니다. 또는 패스트푸드 산업에 종사는 서비스 노동자들을 살펴봅시다. 이런 노동자들은 인간이 아니라 초효율적인 기계의 일부로 간주되고, 그래서 그들에게 요구되는 솜씨 역시 대충 기계적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더 표준화될수록 그것은 더욱 더 억압적인 것―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도착적으로 성공적인 것―이 됩니다. 그 결과는 "전체화"되는 문화입이다. 문화의 모든 양태는 기술지배적이고 기계주의적인 어떤 이상에 부합되게 됩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저는 과학주의가 국가 이데올로기의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과학주의는 우두머리를 위해 작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