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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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노 라투르: 오늘의 에세이-테루아, 글로브, 지구-새로운 정치적 삼각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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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 20.

 

테루아, 글로브, 지구-새로운 정치적 삼각형

Terroir, Globe, Earth-A New Political Triangle

 

――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이전에 우리는 '멋진 날씨'를 즐기거나 '형편없는 기후'를 견디곤 했다. 그러나 최근 몇 달 동안 우리는 어떤 '지독히 멋진' 날씨를 싫어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날씨에 관하여 참인 것은 정치에 관해서도 참이다. 현재 순간은 지독하기도 하고 엄청나기도 한데, 테러 행위의 동시 발생, 이른바 '국민' 전선의 흥기 그리고 COP21의 결론 덕분에 마침내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고 우리가 어떤 종류의 정치를 추구해야 하는지 이해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누군가의 입장이 '진보적'인지 아니면 '반동적'인지 평가하기 위한 대부분의 준거점들은 단일한 유일한 벡터의 길이를 따라 처해 있었는데, 여러분은 옛 테루아를 아쉬워하거나 아니면 세계화(globalization)를 신봉했다. 그런 두 극단 사이에 우리 모두를 편입시키는 연속적인 선이 있었는데, 변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커서의 위치였다. 이런 근대화 전선의 전면에 '진보'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 뒤에 후진적인 모든 사람이 있었다.

 

그 벡터가 도덕과 관련된 것인지 아니면 시장과 관련된 것인지에 따라, 이것은 한 가지 모순, 잘 알려져 있던 모순을 수반했다. 경제적 세계화의 배제로의 도덕의 해방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거나(다소간 전통 좌파의 입장), 아니면 시장의 자유화를 욕망하고 도덕의 해방에 반대할 수 있었다(온건 우파의 입장이라고 하자). 대안적으로, 도덕과 시장 둘 다의 공동 해방을 바랄 수도 있었을 것이다(좌파와 우파의 '선진적' 분파들에 의해 옹호된 근대화의 광신적 이상). 또는, 최종적으로 둘 다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준거틀로서 작동하기 위해서는 엘리트 계층 자체가 그들이 달성할 수 있기만 하다면 보편적으로 근대화된 행성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고 있는 세계, 즉 글로브의 현존도 믿어야 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정치적 권역(sphere)에 대한 통상적인 분석을 다른 한 권역(구체), 즉 정치에 진입하게 된 지구라는 행성에 대한 분석과 전적으로 결합시켜야 한다. COP21의 역사적 중요성은 그것 덕분에 우리가 전적으로 다른 추진 방식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인데, 행성 지구는 결코 세계화의 글로브와 유사하지 않다. 무뚝뚝하게 서술하면, 세계화의 천국에 해당하는 행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신호 전달 오류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런 입장들은 지역적인 것에서 세계적인 것까지, 민족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까지, 정체성에서 세계 시장의 "방대한 열린 공간들"까지 걸쳐 있는 고전적 양극화에 의해서만 자체의 의미들을 취할 필요가 더 이상 없다.

 

이런 고전적 정치는 엘리트 계층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근대화하고 있는 대상 세계가 실제로 현존한다고 믿게 만드는 한에 있어서만 작동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난 30년 동안 그들은 이것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다. 이 점을 최초로 인식한 사람들은 생태주의자들뿐 아니라, 기후 회의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가 흔히 가정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들의 부인주의는 의고주의(archaism)나 이해 부족과 아무 관련도 없다. 사실상 그들이 오로지 너무나 잘 이해한 것은, 우리가 이른바 근대화하고 있는 대상 세계에 해당하는 행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면, 불평등의 요새에 스스로를 가둠으로써 우리 자신을 보호해야 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가장 부유한 10%가 가장 부유한 1%가 된 다음에 0.1%가 된 엄청난 변화는, 엘리트 계층이 그들의 영토를 그들이 근대화하라―아니면 죽어라―고 요청했던 사람들과 어쨌든 공유할 모든 희망을 포기해 버렸다는 것을 파악할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시대가 어떻게 변해 버렸는지 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그저 하기만 하면 되는 일은 도널드 트럼프의 험악한 표정('넌 해고야!')을 로널드 레이건의 헐리우드 미소와 비교하는 것이다. 1980년대처럼 우리 자신이 현혹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데, 이전에 낙관주의자들이었던 엘리트들은 이제 사악해졌고, 이전에 선도적이었던 그들은 이제 방어적인 사람들이 되어 버렸다. 아메리카가 우리 미래의 지도를 계속해서 그릴 수 있다면, 무엇보다도 공화당에 의해 제안된 지도가 등골을 오싹하게 한다.

 

게다가 대중들은, 엘리트들 자신이 근대화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면, 그들은 스스로 여전히 입수할 수 있는 정체성의 부스러기로 매우 빠르게 복귀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가장 확실히 이해해 버렸다. 헝가리에서 프랑스까지, 이탈리아에서 영국까지, 러시아에서 합중국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하듯이 행동하고 있다. '세계가 아니라면, 최소한 우리는 우리의 테루아를 가질 것이다!' 백인, 돼지고기, 민족, 국기, 영토, 가족,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말 중요하지 않는데, 우리에게 무언가를 남겨 주는 한에 있어서 말이다. 모두 구명보트로! 물론, 이런 공동체들은 상상의 공동체들이다. 이전 땅의 유물은 한 조각도 없는데, 세계화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런데 이 유토피아가 저 유토피아를 대체한다. 최소로 막연한 듯 보이는 것에 매달려야 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여기에 우리가 처해 있는 전환점, 치명적이고 결정적인 순간이 있는데, '영토-테루아' 또는 '영토-글로브'에 의해 제공되는 정의들 외에, 지면에 들러붙게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대안적 정의가 존재하는가? 우리로 하여금 그런 모든 입장들을 재배치하고 근대화에 의해 제공되는 유토피아와 민족 정체성에 의해 제공되는 유토피아 사이에 벌어지는 전투의 현대적 비극를 피할 수 있게 할 제3의 주장을 가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삼각형에 대한 지도가 아직 그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매우 잘 알고 있지만, '영토-테루아'를 '영토-글로브'에 잇는 선에 덧붙여 그런 두 가지 전통적 끌개들을 제3의 꼭지점―이것은 '영토-지구'일 것이다(그것을 행성 또는 가이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데, 명칭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에 연결시키는 두 개의 선을 그리는 것이 합당하는 듯 보인다. 이것이 내가 '신기후체제(New Climatic regime)'라고 부른 것이다. 파리에서 개최된 놀라운 기후 회담, 즉 COP21에서 조립된 행성은 세계화가 우리를 이끌고 있는 것으로 상정된, 무한하고 미분화된 공간과 공유하는 특질이 거의 없다는 점은 명료하다. 그 행성은 기후, 땅, 경계, 전선, 전체적 지정학을 갖추고 있는데, 그것은 민족 정체성의 옛 지도들과 유사성이 거의 없고 '자연적'인 것으로 알려진 이전 세계의 글로브와도 유사성이 거의 없다.

 

이런 세 번째 끌개는 정체성과 보편성 사이(물론 아무 근거도 없는 두 가지 기획인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제3의 길'을 개방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그것의 현존, 그것의 무게, 그것의 참신성은 정치적 스펙트럼을 급진적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속하는 바로 그 토양을 재정의하도록 요구하며, 누가 반동적이라고 간주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누가 진보적이라고 간주되어야 하는지 재규정하도록 요구한다. 어쨌든, 이 지구 위에 우리 자신을 매우 빠르게 재영토화해내지 못한다면, 불행하게도 우리가 곧 직면하게 될 것은 민족 정체성들의 전쟁이다.

 

나는 날씨가 매우 '지독히 멋져' 버렸던 신년의 전날도 떠올릴 수 없으며, 어느 겨를에 우리를 결정적인 대통령 선거와 대단히 정치적인 방식으로 기후를 제기해야 한다는 긴급한 요구 사이에 처하게 하는 신년도 떠올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