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마시모 피글리우치: 오늘의 에세이-사이비과학과 대륙 철학

댓글 0

카테고리 없음

2016. 1. 22.

 

사이비과학과 대륙 철학

Pseudoscience and Continental Philosophy

 

―― 마시모 피글리우치(Massimo Pigliucci)

 

최근의 정반대되는 요란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철학하기의 두 가지 근대적 양식들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존재하는데, 이른바 분석 철학은 엄밀한 논증들을 둘러싸고 구성되는 경향이 있고, 흔히 건조하며, 대체로(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꽤 난해하고 사회적 의미가 거의 없는 문제들에 관여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대륙" 철학은 자주 더 매혹적인 에세이 유형의 양식으로 쓰여지며, 그것의 실천자들은 긴급한 정치적 및 사회적 문제들에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다. 불행하게도, 또한 대륙 철학은 흔히(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언어에 있어서 꽤 혼란스럽고, 때때로 완전히 터무니없다.

 

분석적 접근 방식에 더 편안함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근대 철학의 이런 분리(흔히 분기점으로 간주되는 칸트에서 대체로 비롯된)는 대단히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철학이란 고대 그리스인들이 수행하고 있었던 그런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어쨌든 그들이 그 명칭을 고안했다), 철학은 이해에 이르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 것에 뿌리박고 있으며, 철학은 대부분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관여한다.

 

이것을 서술하는 다른 한 방식은, 나는 분석 철학자들이 덜 딱딱하고 덜 형식적인 방식으로 글을 쓰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 취지로, 대륙 철학자들이 덜 모호하고 더 엄밀하고자 노력하게 된다면 멋질 것이다. 두 가지 점에 관한 미약한 진보의 징조가 있지만, 나는 숨을 죽이고 있지 않을 것이다.

 

분석/대륙 분리와 관련된 한 특수한 미시세계는 과학철학(분석)과 "과학학"(대륙) 사이의 차이에 의해 표상된다. 앞에서 서술된 거시세계의 경우와 꼭 마찬가지로 이것은 불행한 결과를 낳는데, 이상적인 세계에서, 예를 들면, 과학철학자들이 그들의 관심을 과학 윤리의 쟁점들로 확대하고, 과학과 과학의 실천에 대해 조금 더 비판적이라면 멋질 것이다. 반면에, 과학학 학자들이 과학자들이 실제로 행하는 것에 관해 조금 더 인식하고, 그들의 일반적인 반체제적 에토스의 일부로서의 반과학적 반응을 덜 나타낸다면 좋을 것이다.

 

최근에 <<더 필로소퍼즈 매거진(The Philosopher's Magazine)>>에 기고한 칼럼에서 나는, "과학을 사이비과학으로 부르기: 에이즈 부인주의와 동종요법에 있어서 라투르의 '탐구의 전기'와 플랙의 사실의 고고학들(Calling Science and Pseudoscience: Fleck's Archaologies of Fact and Latour's 'Biography of an Investigation' in AIDS Denialism and Homepathy)"라는 제목으로 <<인터내셔널 스터디즈 인 더 필로소피 오브 사이언스(International Studies in the Philosophy of Science)>>에 발표된 배빗 배비치(Babette Babich)의 기묘한 논문에 의거하여 그 문제에 관한 특수한 일례를 상세히 소개했다.

 

과학의 권위에 대한 불신과 과학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태도에 있어서 약간 너무 비굴한―그 논문 저자가 생각하기에―과학철학자들에 대한 많은 비판의 기저 흐름이 존재하지만, 배비치 논문의 주요 테제가 실제로 무엇인지 말하기 어렵다. 흥미롭고 약간 미치게 하는 것은, 많은 대륙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배비치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는 것인데, 우리는 과학이 우리에게 좋은 것들만큼이나 많은 재난을 가져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구세주로 간주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또한 배비치는, 20세기 초 논리실증주의 시대 이래로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과학철학자들이 역사적으로 과학적 연구나 그것에 종사하는 과학자들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적이 거의 없었다고 주장함에 있어서 옳다.

 

문제는 배비치의 시도가 과학철학자들과 과학자들 모두가 계속해서 과학학이라는 분야 전체를 무시하고 그 대신에 1990년대의 악명 높은 "과학 전쟁"을 반복해서 말할 더 많은 구실을 제공할 뿐일 것이라는 점이다. 배비치는 과학적 실천과 과학의 권력 구조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HIV-AIDS 부인주의, 동종요법, 저온 핵융합 그리고 기후 변화 부인 같은 단연코 사이비과학적이거나 논란의 여지가 대단히 큰 관념들에 대한 옹호와 뒤섞는다.

 

배비치의 논문은 과학학 프로그램들에서 비롯되는 수많은 작업들과 관련된 문제를 명백히 예증하는데, 정부, 기업 그리고 개인 연구자들의 다소간 숨어 있는 의제들뿐 아니라 과학의 권력 구조들에 대한 관심은 제대로 설정된 것이며 자세한 조사를 절대적으로 받을 만하다. 그런데 그런 조사는 기저 과학에 대한 이해의 중대한 결여에 의거하고 있으며 좋은 과학, 나쁜 과학 그리고 사이비과학을 같은 바구니에 넣기를 고집하는 피상적인 비판에 의해 기반이 약화된다. 과학철학이라는 분야에 있어서 합의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명확히 구분할 길이 결코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점층적 사례들과 경계 사례들의 현존이 어떤 구별짓기도 행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고, 그래서 그런 구별짓기를 행하는 것이 지성적으로도 필요하고 사회적으로도 유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