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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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철학적 방법론에 관한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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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 29.

 

철학적 방법론에 관한 성찰

Reflections on Philosophical Methodology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최근에 나는 나의 방법론이 무엇인지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것은 내가 이런 질문을 받게 된 두 번째 경우였고, 두 경우 모두에 그 질문이 나를 멈추게 했다고 고백한다. 두 경우 모두에 그 질문은 철학 바깥의 분과학문들과 관련된 강연 행사에서 제기되었다. 나는 내가 정성적 또는 정량적 연구 방법론을 채택하고 있는지에 관한 질문을 받고 있었다고 추측한다. 그렇지만, 이런 질문이 나를 대단히 놀라게 했다면―그리고 나는 여전히 두 경우 모두에서 나타낸 내 반응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고 있다―그것은 그 질문이 철학을 철학에 전적으로 낯선 담론의 장에 처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제기된 대로의 방법론에 관한 개념―확실히 지금까지 철학은 변증법, 현상학 그리고 해체 같은 방법론들이 있었다―은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대상에 관한 탐구와 관련되는 듯 보인다. 나는 철학적 맥락에서 소여라는 개념을 환기시키는 것은 위험하다고 깨닫는다. 여기서 나는, 내가 경험적으로 주어진 무언가를 지칭할 때 특별히 심층적인 것을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나는 다양한 경험적 분과학문들―문학이든 매체 연구이든 인류학이든, 사회학이든, 화학이든, 생물학이든 간에(여기서 내가 "경험적"이라는 술어를 얼마나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는지 인식하라―이 잘 규정된 탐구 대상, 저쪽에 존재하면서 주어지는 무언가가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하고, 그래서 방법론에 관한 의문은 그것의 본성, 그것이 구성되는 방식, 그것이 행동하는 방식 등을 파악하기 위해 그 대상을 탐구하는 방법에 관한 의문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사회과학에서 어떤 정량적 접근 방법은 나중에 통계적 방법들이 적용될 수 있는 데이터를 수집하는 방식으로 선행하는 반면에, 어떤 정성적 접근 방법은 구조주의, 행위자 연결망 이론, 체계 이론 등과 같은 어떤 종류의 이론적 패러다임의 틀 내에서 데이터를 해석하는 것에 놓여 있을 것이다.

 

철학에서는 상황이 전적으로 다른데, 왜냐하면 이상적으로 철학은 자체의 개념들과 대상 모두에 대해 불확실한 상태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철학은 개념과 대상 또는 존재론적인 것과 존재적인 것 사이의 불확실한 주름에서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에 실린 어떤 행에 대한 하이데거의 번역문이 철학적 상황을 훌륭하게 서술한다.

 

"당신들은 분명히 이미 오래 전부터, 당신들이 '존재하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그 표현이 본디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우리도 전에는 그것을 이해하는 것으로 믿었는데 지금은 당혹스러움에 빠져 있다."(<<존재와 시간>>, p. 13)

 

일상 생활에서 우리는, 우리가 존재를 언급하거나 무언가가 존재자라고 말할 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고 있다고 간주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존재로써 나타내고 있는 것에 관해 성찰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갑자기 우리가 당혹스러움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존재의 의미가 이전에는 자명한 듯 보였지만, 우리가 그것에 관해 성찰할수록 그것은 더욱 더 모호해진다. 게다가 존재라는 개념이 모호해질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자로서 지칭하는 객체들도 불확실해진다. 이전에 나는 그렇고 그런 사물이 존재자이고, 객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확신했지만, 이제 나는 그렇게 확신하지 못한다. 나는 이전에 내가 존재자라고 갱각하지 않았던 이 객체가 사실상 존재자일 것이지만, 내가 존재자라고 확신했던 저 객체는 존재자가 아닐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이것이 <<에우티프론>>이라는 동명의 플라톤 대화편에서 에우티프론이 겪는 공포이다. 에우티프론은 자신이 경건함 또는 신성함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확신에서 시작했지만, 소크라테스라는 기괴한 존재자와 대화를 나누게 될수록 그 개념이 더욱 더 모호해진다. 그는 경건함에 관한 아무 개념도 갖지 못한 채, 그리고 어떤 존재자들이 참으로 경건하거나 신성하다고 간주되는지 더 이상 확신하지도 못한 채 그 대화에서 달아난다.

 

이것은 철학적 상황으로서 탁월한 것이다. 여기서 내 의도는 철학의 목적은 불확실한 아포리아적 상황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은 우리가 세계와 관계를 맺는 수단인 개념들 및 우리의 다양한 시도 속에서 관계를 맺는 객체들에 대한 우리의 파악을 문제화한다고 주장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점은 생물학이라는 분과학문과 생물학의 철학이라는 분과학문 사이의 차이에 대해 명료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 둘은 겹치지만, 그럼에도 차이점이 존재한다. 생물학이라는 분과학문은 자체의 개념들과 탐구 대상을 주어진 것으로 간주한다. 그 다음에 생물학은 탐구 대상에 관한 자체의 지식을 확대하기 위해 이런 개념들을 전개하는 방법에 관한 문제이다. 애초에 철학은 생물학에 부가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 왜냐하면 생물학은 지식의 지위를 획득하여 에피스테메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생물학의 철학은 그렇게 확실하지 않다. 생물학의 철학이 대상으로 삼는 것은 생물학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생물학의 개념들이다.

 

하이데거적 술어로 서술하면, 생물학의 철학은 탐구하는 생물학자에게 주어지는 대상으로서 생명(bios)을 개방시키는 "현실적 장(alethetic field)"을 심문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생물학이라는 분야와 그것의 현재 지식 상태에 관한 얼마간의 지식을 필요로 한다. 흔히 철학자들은 그들이 탐구하는 여타의 분과학문들에 친숙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그래서 결국 억견, 즉 통속 생물학의 편견들에 의거하여 나아간다. 생물학의 철학은 그것이 대상으로 삼는 분야에 친숙해야 한다. 그렇지만 생물학의 철학은 생물학에서 수행되는 것과 전적으로 상이한 것을 수행한다. 이런 현실적 장의 개념들을 자체의 대상으로 삼을 때, 생물학의 철학은 이 개념들을 성찰적 의식 앞에 가져와서 그것들의 상호의존성을 탐구하고 그것들에서 암묵적인 것을 드러내려고 노력하며, 우리가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그런 존재자들과 이런 개념성의 공간 사이에서 영구적으로 왕복한다. 그렇게 하면서 흔히 철학은 이런 개념들에서 암묵적인 것을 찾아낸다. 예를 들면, 아도르노와 생명정치의 이론가들의 스타일로, 철학자는 생명의 지배와 착취를 향해 전적으로 조정되어 있는 이런 개념적 장의 "무의식"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때때로 생물학의 철학은 생물학의 담론에서 떠나지 않는 일단의 긴장과 모순들 또는 놓쳐 버린 중요한 현상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거나, 또는 생물학의 담론이 어떤 존재자들을 현재 사용되는 대로의 생명의 범주에 부당하게 편입시키거나 존재자들을 포함되어야 할 생명의 범주로부터 배제한다는 것을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철학의 대상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제기되면, 그 대답은 개념들일 것이다. 철학은 개념들과 담론에 작용한다. 때때로 철학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그랬듯이 개념들을 발명한다. 때때로 철학은 개념들을 비판한다. 그런데 모든 경우에 철학은 개념들에 작용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서 철학은 이런 담론들의 대상을 그대로 남겨두지 않는데, 왜냐하면 어떤 담론에 주어지는 것이 이런 철학적 담론의 결과로서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대한 종교 지도자 에우티프론이 대화 후에 어떻게 변화하는지 알지 못한다. 상황은 유망한 듯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경건함 또는 신성함이라는 종교적 개념의 이런 문제화의 결과로서 그의 경건함의 대상이 그의 사유 속에서 어떤 종류의 변형을 겪고 그의 실천이 변화한다고 희망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철학이란 무엇이고 철학의 대상은 무엇인지 말하기가 매우 어렵다. 19세기 이래로, 그리고 우연적이지 않게도, 자연과학 및 역사과학의 성공의 그늘 속에서 철학이라는 분과학문은 일종의 공황 상태를 겪으며 전적으로 독자적인 공간을 정확히 서술하려고 노력했다. 한 변양태에서 지금까지 이것은 독자적인 역사에 관한 성찰의 형식을 취했다. 그러므로 철학의 목적은 독자적인 전통 보존의 일종이 된다. 다른 한 변양태에서 지금까지 이것은 일종의 인식론적 법정을 만들어내는 형식을 취했는데, 여기서 철학은 다른 분과학문들에서 정당한 지식 주장들로 간주되는 것을 결정하는 사법적 기능을 수행한다. 지금까지 철학이 신경쇠약과 정체성 위기를 겪었다는 것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철학에는 선험적으로 서술될 수 있을 대상이 없다면, 이것은 철학이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에 의해 찬탈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철학의 대상이 항상 다른 담론들, 다른 분야들이며, 그리고 이런 분야들이 역사적으로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적 방법론을 추구하는 것이 가망 없는 일이라면, 이것은 철학이 경험적으로 탐구될 수 있을 어떤 객체의 소여 같은 것에 선행하는 사유 형식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결코 이런 층위가 아니라 담론이나 개념들에 관한 심문의 층위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이런 이유 때문에 철학은 영구적으로 두 가지 위협―독자적인 고유한 탐구 대상을 갖춘 분과학문으로서 철학을 정초하는 환상을 낳는 대상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둘러싼 일종의 절망뿐 아니라, 개념들만 존재할 뿐이고 개념들이 세계를 만들어낸다고 믿게 되는 상관주의, 반실재론 그리고 관념론을 향한 불가피한 경향―에 직면한다. 그렇지만, 다른 한 관점에서 철학이 어떤 방법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이 방법의 이름은 변증법일 것이다. 나는 오해받을 것이고 나중에 이 기록을 후회할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이렇게 말한다. 이 변증법은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변증법에 더 가깝다. 이렇게 말할 때 나는 헤겔이나 마르크스를 모욕할 의도가 전혀 없다. 오히려 핵심은, 이것은 모순과 지양의 변중법이 아니라, 오히려 개념을 성찰적 의식 앞에 가져오려고 시도하는 과정과 그런 개념들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개념과 대상 사이에서 영구적으로 왕복하는 변증법이라는 것이다. 철학자와 비철학자에 의해 공히 겪게 되는 철학의 공포가 존재한다면, 특정적으로 철학적인 불안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철학 때문에 우리가 어떤 개념성의 장과 그것이 주목하는 객체들에 관해 우리가 갖고 있는 비이해―여태까지 우리가 이해한다고 생각한 것에서 떠나지 않는―를 대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혼란스러운 것이 되는데, 흔히 그런 혼란에서 좋은 것들이 비롯될지라도 말이다. 철학의 이런 차원은 반드시 강단의 학과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에 현실적 장이 성찰 대상이 되는 곳에서라면 어디서든지 일어나는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