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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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라지: 오늘의 강의-과학철학에 있어서 실재론과 반실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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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 30.

 

과학철학에 있어서 실재론과 반실재론

Realism and Anti-Realism in Philosophy of Science

 

―― 윌리엄 라지(William Large)

 

이전의 강연에서 우리는 양립 불가능한 상이한 패러다임들에 의해 분절된 것으로서의 과학사에 관한 쿤(Kuhn)의 관념을 살펴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뉴턴주의 그리고 아인슈타인주의는 한 시대에서 다른 한 시대로의 매끈한 흐름―그래서 언젠가 궁극적 진리에 도달하여 우리의 이론들이 말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이 정확히 동일하고 어떤 예외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모두 과학하기를 그만둘 수 있다―이라기보다 과학사에서 일어난 혁명들을 특징짓는다. 쿤이 우리에게 환기시키는 것은, 과학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생각할 때, 우리는 과학에 대한 과학철학자의 말을 고찰하기보다는 과학자들이 무엇을 수행하는지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철학적 판본이 과학의 실제 역사와 대체로 닮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낱말의 두 가지 의미에서 이상화―추상물과 일종의 소원 충족―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쿤은 과학 자체가 아니라 과학철학에 대해 회의적이다.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라는 쿤의 책은 어떤 특수한 종류의 철학적 과학사의 조종을 특징짓는데, 그래서 철학자들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들이 실제로 수행하는 것을 대상으로 삼는 진정한 과학사가 그것을 대체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이런 과학사의 새로운 대상은 에이어(Ayer)나 포퍼(Popper) 같은 철학자들의 정신의 바깥에서는 결코 존재한 적이 없는 이상화된 과학이 아니라, 혼란스럽고 모호한 '정상 과학'이다.

 

그렇지만 이 지점에서 우리는 철학으로 약간 이탈할 것인데, 애초부터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에 틀림없는 의문, 즉 과학사란 무엇인가라기보다는 과학의 대상은 정확히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고찰할 것이다. 일찌기 우리는 종교와 과학 사이의 차이를 믿음과 사실 사이의 차이로 특징지었다. 과학은 실재에 관한 것이며, 과학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실재적인 것들에 대한 참된 서술을 제시한다고 말했다. 한 마디로, 과학은 객관적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종교는 주관적이다. 종교는 우리에게 참된 세계상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도덕적 나침반을 제공한다. 종교와 과학을 혼동하는 것은 종교를 지적으로 뒷받침하기보다는 종교의 중요성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과학과 종교 사이에는 아무 갈등도 존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전적으로 상이한 담론들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무언가가 무엇인지 말해주고, 종교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해준다.

 

그런데 과학은 실재에 관한 것이라고 말할 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렇게 말할 때 우리는 약간 단순주의적이지 않는가? 도대체 실재란 무엇인가? 소리를 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숲 속에서 쓰러지는 어떤 나무가 소리를 내는지 여부와 관련된 오래된 역설을 모두가 알고 있다. 실재란 우리가 지각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넘어서는 것인가? 아무 인간도 없다면 나무, 돌 또는 항성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을 것이라고 나는 말하곤 한다. 인간들이 사라진다면 그들과 더불어 우주도 사라질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우주는 우주 속 이런 저런 존재자에게 무언가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우주는 아무 의미도 갖고 있지 않다. 돌은 돌에게 돌이 아니다. 돌은 돌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는 인간들에게만 돌이다. 강의의 말미에 이 점을 다시 고찰할 것이다.

 

차머스(Chalmers), 오카샤(Okasha) 그리고 레디먼(Ladyman)은 모두(그들은 모두 분석적 전통으로 느슨하게 불릴 수 있는 것에 속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의문들을 정면으로 다루기를 매우 꺼려하는 듯 보인다(그것들이 너무 철학적이어서 회피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들로 하여금 이런 의문들을 회피할 수 있게 한 것은 그들의 암묵적인 철학적 가정들이라고 말하곤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들에게 중요한 구별짓기는, 실재가 자체적으로 저쪽에 존재하는지 여부와 실재 전체가 무엇을 의미할 것인지라기보다는 실재론과 반실재론 사이에 이루어진다. 차머스는, 타르스키의 진리 이론을 통해서, 실재가 언어에 의해 형성된다는 관념을 일축할 뿐인데, 그런 이론은 이미 어떤 언어관과 차머스 자신이 여전히 의문시하지 않는 어떤 실재관에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은 논점을 교묘히 피하는 짓이다. 그렇지만 이런 전제를 탐구하는 것은 이 강의의 주제 자체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게 만들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에 있어서 실재론과 반실재론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두 이론 모두 세계의 실재성을 수용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두 이론을 철두철미한 회의주의와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들 사이의 차이는 한편으로는 과학적 이론들의 지위와 다른 한편으로는 관측 가능한 현상들의 지위와 관련이 있다. 강한 [과학적] 실재론자들은 관측 가능한 현상과 이론들이 모두 저쪽에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참된 서술들이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강한 [과학적] 반실재론자들은 관측 가능한 현상만이 참일 뿐이고, 이론들은 결코 참이지도 않고 거짓이지도 않다고 말할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이 저자들은 모두 이런 양 극단 사이의 어떤 관점을 갖추고 있다.

 

상식적 견해는 이론과 관측 가능한 현상이 모두 참이라고 간주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그래서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이 의문에 접근할 것이다. 우리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관측 가능한 현상이 실재적이지 않다고, 내가 당나귀를 볼 때 저쪽에 당나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또 다시 나는 오카샤와 차머스 둘 다 이런 상정된 실재성을 너무 빨리 도외시한다고는 매우 확신하지 않고, 그래서 당분간 그들이 그런 진리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내버려두자.) 매우 확실하지 않는 것은 이론이 저쪽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정말로 가리킨다는 점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기본적인 과학적 이론들이 사실상 우리가 관측할 수 없는 현상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볼 수 없다면, 그것이 세계의 일부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어떤 관점에서 그것이 실재적이라고 말할 것인가? 물론, 오카샤가 지적하듯이, 화석을 탐구 대상으로 삼는 고생물학처럼 많은 과학들이 관측 가능한 현상을 자체의 기초로 두지만, 현대 물리학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원자 내부를 문자 그대로 볼 수는 없다. 우리는 원자의 모습에 관한 이론적 그림들을 갖고 있을 뿐이고, 그래서 그런 층위에서 우주가 정말로 그런 모습일지 결코 알지 못한다.

 

[과학적] 반실재론자는 지구가 거북이의 등 위에서 균형을 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과학 사이에 아무 차이도 없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론은 우리에게 구조, 즉 우리가 실험 작업을 통해서 현상을 관측할 수 있게 하는 비계를 제공할 뿐이고, 그래서 우리가 참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것은 문자 그래도 관측 가능한 이런 현상일 뿐이다. 이론 자체는 우리가 실재적인지 아닌지 증명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어느 것이 실재적인지 여부를 우리가 예증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과학사 자체가 이것을 실증하는 듯 보이는데, 왜냐하면 지금까지 참된 관측 가능한 현상을 실제로 제시한 그릇된 이론들이 존재했고, 그래서 이론의 진리성과 관측 가능한 현상의 진리성 사이에는 아무 유사점도 없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차머스가 제시하는 사례는 광학의 역사인데, 그것은 현재 우리가 빛에 관한 그릇된 이론이라고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올바른 관측 가능한 현상을 제공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뉴턴(Newton)은 빛이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고, 그 다음에 프레넬(Fresnel)은 빛이 에테르로 불리는 매질 속의 파동이라고 믿었고, 그 다음에 맥스웰(Maxwell)은 빛 파동이 에테르 속에서 진동하는 전기장과 자기장이라고 믿었고, 그 다음에 20세기에는 에테르가 제거되어 파동은 독자적인 존재자가 되었으며, 그 다음에 마침내 빛에 관한 파동 이론은 광자라는 입자 이론에 의해 보완되었다.

 

그렇지만, 이론들은 우리의 실험적 결과들이 결부되는 허구물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상식에 반하는 듯 보인다. 원자론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가 원자의 구조에 대한 진전된 이해를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래서 그 이론이 우리가 관찰해야 하는 것을 예측하는 동시에 전적으로 그르다는 것은 완전히 당혹스러운 듯 보일 것이다. 이것을 빠져나갈 한 가지 방식은, [과학적] 반실재론자는 관측 가능한 것과 관측 가능하지 않은 것 사이에 그릇된 구별짓기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원자 내부를 볼 수 없더라도 원자들이 구름 상자를 통과할 때 일어나는 이온화에 의해 원자들의 현존을 검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엄격한 반실재론자는, 우리가 실재적이라고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은 특질들 자체이고, 그래서 어떤 비행기가 하늘에 남기는 흔적과 비행기 자체를 혼동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는 원자들이 실재적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직접적인 관측과 검출을 구별해야 한다.

 

여기서 근본적인 쟁점은 한편에는 이론으로 다른 한편에는 사실로 완전히 분리할 수 있는지 여부이다. 이것은 사실은 관측 가능하며 이론은 관측 가능하지 않는지 여부가 아니라 진짜 쟁점이다. 사실상 그런 분리를 신봉하는 사람은 실재론자가 아니라 반실재론이다. 상이한 방식들로 행해지더라도, 오카샤와 차머스는 둘 다 이런 분리를 비판할 것이다. 우리가 이해하고자 시도하고 있는 현상에 대한 더욱 더 정확한 그림을 제시하는 각각의 새로운 이론은 이전 이론의 어떤 양태를 수용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차머스는, 우리로 하여금 이론이 정확한 세계상을 제시하는지 여부를 결코 알 수 없도록 예전에 참으로 간주되었던 이론이 그 다음의 이론에 의해 거짓인 것으로 밝혀진다―이런 과정이 무한히 이어진다―는 것을 과학사가 정말로 입증하는지 여부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참된 이론은 (거북 이론과 달리) 단지 부분적일지라도 세계의 진리에 관한 어떤 양태를 포착하는데, 나중에 그것은 후속 이론에 의해 개선된다(이것은 누적적 과학상을 함축하기 때문에 쿤의 과학관과 상반되는가?). 다른 한편으로 오카샤는, 반실재론적 주장들은 이론들이 참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가능성의 기반을 약화시킬 것이라는 문제점들이 우리가 관측 가능한 현상이라고 생각할 것에 기대어 다시 제기될 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모든 과학의 근거를 전적으로 파괴할 것이라고 주장할 것인데,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에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을 안다고 주장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과거 사건들은 직접적 관측이 아니라 검출에 의해서만 알려지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 사건들을 알 수 없게 된다(이것은 반실재론적 논증이 흄의 귀납 문제와 유사한 듯 보일 것이라는 점을 의미할 것이다).

 

처음에 말했듯이, 나는 실재론에 관한 오카샤와 차머스의 논의 둘 다 불만족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고, 사실상 둘 다 그런 논의에 탈진해버린 것처럼 어떤 종류의 해결도 하지 않은 채 종결하는 듯 보인다. 내 생각에 그들의 견해에서 사유되지 않은 채 남겨져 있는 것은, 우리가 실재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과학을 통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럴 수 없다면 우리는 실재에 접근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내게 관찰 가능한 현상과 관측 불가능한 현상에 관한 논의는 훈제 청어이다. 우리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면 아무것도 의미를 갖고 있지 않고, 그것은 관측 가능한 현상의 경우에도 관측 불가능한 현상의 경우에도 참이지만, 진짜 쟁점은 우리의 실재가 무엇보다도 우리가 관측하는 것인지 여부이다. 여기서 나는 하이데거의 철학에 주의를 돌릴 것인데, 그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일차적 관계는 지각의 관계―하이데거는 이것을 '눈앞에 있음(present-to-hand)'이라고 부른다―이다라는 것은 매우 오래된 형이상학의 편견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실재론자와 반실재론자에게 공히 참인 것은 그들이 실재란 '눈앞에 있음'을 의미한다고 간주한다는 점이다. 실재론자는 과학적 이론들이 눈앞에 있는 것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반실재론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이데거의 경우에 세계는 눈앞에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손안에 있는(ready-to-hand) 무언가이다. 세계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지각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을 정향시키는 무언가이다. 이런 맥락은 결코 대상으로 탐구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대상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 자체도 이런 문화적 맥락이나 배경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우리가 세계 속의 무언가를 과학적 대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은 단지 하나의 활동으로서의 과학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기 때문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가 주장하듯이, 뉴턴의 법칙은 우리가 현존하기 때문에 참일 뿐이다. 우리가 더 이상 현존하지 않고, 그래서 이런 법칙들이 유의미한 세계가 더 이상 현존하지 않는다면, 이런 법칙들이 참이라고 여전히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을 것이다. 이것은 사물들이 우리와 별개로 현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고, 진리가 상대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뉴턴의 법칙은 실제로 사물들에 관한 무언가를 말하는데, 왜냐하면 이런 사물들만이, '참'이라는 의미에서, 우리의 현존을 관통하기 때문이다. 이런 진리는, 정말로 우리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 현존을 넘어서는 사물들의 진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할 때에만 상대적일 것이다. 사물들은 그것들이 우리에 대해서 존재한다는 그 이유 때문에 존재할 뿐이지만, 이것이 어떤 주장도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주장과 주장의 조건을 혼동하는 것일 것이다. 실재에 관한 진리는 우리의 현존에 의존하지만, 이것이 여러분이나 내가 이런 현존에 관하여 마음대로 무엇이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개별자로서의 여러분이나 나는 여타의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현존의 일부일 뿐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라는 것은 이미 이런 현존이 의미하는 것(과학의 세계가 의미하는 것, 예를 들면 뉴턴의 법칙이 있다)를 수용하는 것이고, 그래서 이것을 거부하게 되면 더 이상 과학자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