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폴 헤프트: 오늘의 인용-현재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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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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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본주의라는 기계는 파괴적이고, 착취적이고, 불공평하며, 생태 파괴적이다. 나는 자본주의를 하나의 기계로 간주하는데, 왜냐하면 정치경제적 체계로서 자본주의는 특수한 인간 사유와 행동에 의존하지 않은 채 작동하기 때문이다. 개인들은 오고 가며, 그리고 그 체계는 독자적인 축적 논리에 따라 이전과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지속된다(대체로 대량 소비로부터, 일반적으로 수익을 통해서, 부를 쌓는다). 자본주의는 매우 한정된 도덕성을 나타낸다. 자본주의는 지위와 경제력에 있어서 불평등을 생성한다. 불안의 위협을 통해서(식량, 주거지 그리고 의료에 대한 접근권을 통제함으로써), 욕망의 부과를 통해서(지위 향상, 불안 제거 그리고 부족의 충족을 약속하는 것들을 판촉함으로써) 그리고 간헐적인 폭력(구금, 폭격 등)을 통해서 자본주의는 참여와 순응을 강요한다. 자본주의는 재산, 특히 생산적 재산의 소유자들과 그들의 대표자들(정부 관리, 경찰, 경영자 등)에게 더 큰 권리와 권력을 할당한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들과 자연의 격하, 오염, 서식지 파괴, 자원 고갈 그리고 기후 변화(가장 최근의 두드러진 사례)와 같은 것처럼 비용으로서 회피될 수 있는 것을 무시하기를 선호한다. 아무것도 신성하지 않는데(속박되지 않은 시장이라는 관념처럼 이윤을 뒷받침하지 않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우리는 점점 더 도덕 감각과 장소 및 자연과의 연결 감각을 상실하고 있다. 환경 파괴는 문명의 지속과 어쩌면 인간 종의 생존까지도 위협할 정도로 점점 증가하고 있다.

 

2. 자본주의는 주주 및 기업 투자를 위한 인센티브로서 그리고 대출 이자를 지불하기 위한 자금원으로서 경제적 "성장"―이윤 창출을 위한 기회의 증가―을 요구한다. 성장은 다양한 재난(가난, 경기 침체, 세수 감소 등)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안되며 사실상 목적 자체가 되어버렸다. 지금까지 성장은 더 큰 파괴, 착취, 생태 파괴 및 거의 틀림 없이 더 큰 불공평을 의미했다. 몇몇 "녹색 자본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효율성 향상, 다른 혁신들 그리고 약간의 규제와 조세 정책을 통해서 그런 유해한 결과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자본주의의 역사는 그런 약속은 전혀 보여주지 않는데, 오히려 그것은 꽤 명백하게 지속 불가능한 듯 보인다. 한 가지 부작용―개인 부채와 공공 부채를 엄청나게 급등시킨 최근 수십 년 동안의 경제의 금융화―이 중앙 은행들이 필사적으로 안정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부채 거품을 터뜨려서 세계 경제들을 불황에 던져 넣을 위험이 있다.

 

3. 대안적 경제들은 적극적으로 억압당하고, 그래서 그것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듯 보인다. 자본주의는 여론 통제에 의존하는데, 특히 대중 매체를 활용하여 대량 소비를 통한 수익 증가의 창출이라는 궁극적 목적에 의문을 제기할 견해들을 걸러낸다. 자본주의는 장점을 결정하기 위한 개체들 사이의 경쟁, 미덕의 척도로서의 부 그리고 공동체와 자연에 대한 개체적인 것들의 격상을 이상화하는데, 이것들은 모두 널리 수용되고 있는, 아마도 "진보주의자들"에 의해서도 수용되고 있는 아메리카의 꿈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그 체계는 공정한 것으로, 우리의 복지를 개선시킬 가능한 최선의 방법으로, 오늘날의 세계에서 "진보"를 위한 최선의 조직 양식으로 묘사되는데, 어떤 예외적 사례도 우리의 법률 및 정치 체계를 통해서 다스려지거나 제거될 수 있는 나쁜 행위자들의 잘못이어야 한다. 선전은 제쳐놓고, 우리가 자본주의가 강화하고 의존하는 소비주의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면 그 결과는 경제 불황일 것인데, 우리가 수익 증가를 필요로 하는 자본주의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4, 우리는 흔히 왜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방식대로 생각하지 않는지 의아하게 여기는데, 우리에게는 명백한 듯 보이는 것이 상이한 세계관을 갖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매우 다르게 보일 것이다. 도대체 왜 우리는 모두 잘 어울려서 문제들을 합리적으로 그리고 좋은 신념을 갖고서 해결할 수 없는가? 인간 의식은 우리가 상상하거나 선호하는 이상적인 방식대로 작동하는 일이 거의 없고, 그래서 현대 시대에 전지구적 문제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많은 장애물들을 제공한다. 별개의 취약한 "자아"라는 우리의 관념 덕분에 우리는 자신의 안전을 증가시킬 집단들(민족, 인종, 종파, 부족 등)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자본주의는 우리의 "자기 이익" 추구와 우리 각자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고 마땅한 것을 얻게 된다는 믿음으로부터 대부분의 에너지를 도출한다. 우리의 "집단 의식"은 순응을 뒷받침하는데,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견해에 저항하게 된다. 인간의 행위 주체성, 권력에의 의지에 대한 믿음은 통제의 환상을 쉽게 초래하고, 그래서 우리는 마술적 사유의 희생자가 되어 의도가 실재를 형성할 것이라고 비현실적으로 믿을 수 있다. 우리는 흔히 나쁜 뉴스를 걸러내는데,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관에 부합되지 않는 정보는 적극적으로 걸러낸다. 합리적 사유는 흔히 우리의 무의식에 의해 훼손되어 단순한 합리화를 낳을 뿐인데, 자기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빨리 알게 되듯이, 이것은 인식하기가 매우 어렵다. 흔히 집단들은 집단 자체의 정당성과 응집성을 유지하기 위해, 실재에 무관하게, 자의적인 믿음 체계들을 보존한다. "사전 투자 덫(previous-investment trap)" 때문에 우리가 창출한 공동의 부를 미래의 자원 감소로 그것이 유지될 수 없을지라도 포기하기 어렵게 된다.

 

5. 우리의 근대적 문화는 그것 자체의 장애물들을 제공한다. 취약성에 대한 느낌은 감정적 솔직함을 억제하고, 그래서 우리는 비탄과 불안 같은 느낌들을 공유하고 해결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윤리는 근대적 경험의 파편화에 의해 훼손되고,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중요한 것들로부터 유리된다. 저항 역시 흔히 비방이나 폭력에 의존하는데, 그것은 해체로 이어지는 강한 반작용을 초래한다.

 

6.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회는 안정한 제도, 일반적인 믿음(세계관 같은)들 그리고 상황을 처리하는 방식들을 유지하고자 하는 강한 경향을 갖춘 복잡한 체계로 발달한다. 전지구적 재난 같은 엄청난 자극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자본주의가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시행하는 성장 추진은 반전될 수 있는가? 세계 전역의 사람들이 우리로 하여금 서로 간에 그리고 자연적 세계와 더 조화로운 관계를 맺게 하는 세계관을 채택하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는 합리적 토론을 통해서, 도의적 권고를 통해서 그것을 달성할 수 있을까? 내 인상은, 심리학자와 사회학자들에 의해 수행된 최근의 많은 연구들이 시사하듯이, 세계관은 바뀌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것이 우리 문명의 문제들이 해결할 수 없는 상황를 제기하고 있는 핵심적인 이유이다.

 

7. 복잡성이 절정에 이르렀고 붕괴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상황이 지속됨에 따라, 체계들이 더 명백하게 붕괴됨에 따라, 스트레스가 증가할 것이고 상이한 세계관들을 갖춘 사람들은 서로 관용하거나 협력하여 작업하기가 더욱 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나는 예상한다. 좌절과 절망이 더 많은 비난과 분리를 초래할 것이다.

 

8. 명확히 표현하는 다른 사회 비판가들과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프란치스코 교황은 "담대한 문화 혁명", 즉 "자아의 벽이 파괴되어 이기심의 장벽이 극복되는" 사회을 요청했다. 이것은 나로 하여금 공산주의적 혁명에 대한 내 자신의 욕망과 그것의 개연성에 대한 내 자신의 믿음(대학 시절의)을 떠올리게 한다. 이제 나는 어떤 급진적인 변화―우리로 하여금 자본주의에서 벗어나게 하여 그것의 파괴 엔진을 폐쇄하고, 전지구적 협력, 상호 존중, 개인의 품위, 강한 공동체, 기후 변화의 반전 그리고 자연적 체계들의 재생이라는 원리들을 둘러싸고 성숙할 수 있는 우리 문명의 가능성을 보존하게 하는 그런 종류의 변화―도 개연성이 대단히 작다고 믿고 있다. 세계의 정치적 체계들은 파괴되고, 자본주의는 어떤 더 추악한 재구성된 형식으로 살아남고, 기후 변화는 오늘날 우리가 설정하고 있는 "한계"를 넘어서며, 그리고 "생태적 오버슈트" 때문에 인구가 급격히 감소할 개연성이 훨씬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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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 헤프트(Paul Hef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