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담론의 실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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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2. 4.

 

담론의 실재성

The Reality of Discourse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몇 년 전에 내가 작성한 어떤 블로그 글에 대응하여 누군가가 이렇게 묻는다.

 

친애하는 브라이언트, 당신은 이미 <<욕망하는 식물(The Botany of Desire)>>이라는 마이클 폴란(Michael Pollan)의 책을 들은/읽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책을 읽어 보십시오... 지금까지 저는 '존재자들'이 동등하게 현존하지만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역량의 견지에서 서로 다르다고 간주되는 새로운 형이상학적 시각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객체지향 존재론(OOO)에 대한 당신의 견해에 대체로 동의하지만, 여전히 대답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 담론은 현존하는가? 2. 담론은 개념과 마찬가지의 의미에서 현존하는가? 3. 페미니스트적 담론이 현존하는 방식과 여타의 것들이 현존하는 방식 사이의 차이는 종류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인가? 행운을 빕니다.

 

사실상 나는 <<욕망하는 식물>>을 읽었고 꽤 즐거웠다. 사실상 한 동안 나는 동일한 취지에서, 지금까지 다양한 비인간 존재자들, 기술적 존재자들과 유기적 존재자들이 인간들을 자체를 진전시키기 위한 매체로서 사용한 방식을 탐구하고자 작정한 <<인간들의 가축화(The Domestication of Humans)>>라는 책을 저술하는 것을 깊이 고려했다. 슬프게도 그 계획은 결코 결실을 맺지 못했다. 누가 알겠는가. 아마도 나는 그것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어쨌든 내 블로그를 탐색하면 다양한 지점에서 폴란에 대한 언급을 드러낼 개연성이 높을 것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의문들은 매우 복잡하다. 내 사상의 기본적인 지향은 스피노자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향으로서 스피노자에의 관련을 서술할 때 나는 내가 학자나 제자가 그렇게 하듯이 그의 철학을 철저히 좇는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나는 내가 어떤 스피노자주의적 직관 또는 사유의 벡터에 의해 고무된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나는 스피노자의 자연주의(그런데 그것은 얼마나 기묘한 자연주의인가!)와 그의 일원론 또는 내재성의 모형에 의해 정향된다. 나는 단 하나의 실체가 존재한다는 스피노자의 견해―그것은 그가 숫자적으로 단 하나의 실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간주하거나, 아니면 그가 루크레티우스가 자신의 원자론으로 주장했듯이 한 가지 종류의 실체가 존재할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간주하는지에 의존하지만―는 공유하지 않는 반면에, 초월적 존재자들의 현존에 대한 그의 거부는 공유한다. 즉, 나는 스피노자가 초월적 신 또는 자연의 체제에 속하지 않는 주체 또는 영원한 존재자 같은 "장 바깥의(out of field)" 것들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간주한다.

 

그렇다. 만물이 거주하거나 현존하는 내재적 존재의 장이 있을 뿐이다. 과거의 작업에서 나는 이런 종류의 존재론을 평탄한 존재론(flat ontology)이라고 불렀다. 수직적 존재론들은 우주 바깥에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자들의 현존을 상정하는 반면에, 평탄한 존재론들은 자연의 평면이 존재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런 존재자들은 자체 역능의 정도와 다른 존재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강도의 견지에서 서로 상이하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은 현존한다. 가장 최근의 작업에서 나는 라캉의 보로메오 매듭(내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이해하는 데에는 라캉에 대한 어떤 지식도 필요하지 않지만)과 벤 다이어그램의 일종의 혼성물을 사용하여 이것을 도식적으로 나타내려고 시도했다.

 

물질적 존재자들 또는 물리적 사물들(R)이 존해하고, 세계에 관한 담론들(S)이 존재하며, 세계 속에서 행동하고 세계를 경험하는 행위자들 또는 주체들(A)이 존재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자연 속에 포함되는데, 그러므로 자연이 네 번째 원을 이룬다. 상징적인 것 또는 담론(그리고 신화, 규범, 법률, 영화, 소설, 시 등)은 "이 세계 바깥의", 자연 바깥의 무언가가 아니라, 역시 자연(나는 자연으로 적는 것을 선호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전통적 자연주의들에게 낯설 매우 기묘한 자연이기 때문이다)에 거주하는 무언가이다. 그러므로 물질적인 것 또는 실재계의 원(R)이 두 번 계상되는 방식이 존재한다. 그것은 RSA의 세 가지 체제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고 두 번째에는 자연으로 간주되는데, 왜냐하면 담론과 행위자들도 역시 실재적인 물질적 존재자들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의학에 있어서 사체액설의 경우처럼 어떤 담론(S)이 거짓인 경우에도, 또는 라헤이에(LaHaye)와 젠킨스(Jenkins)의 <<레프트 비하인드(Left Behind)>> 연작 같은 소설의 경우처럼 상징계에서 일어나는 무언가가 허구물인 경우에도 이런 상징적 존재자들은 세계 속에서 실재적인 존재자들이다. 상징적 존재자는 무언가에 관한 무언가인 동시에 자체적으로 무언가인 무언가이다. 그래서 당신의 의문에 응답하여, 그렇다, 나는 페미니스트 담론이 현존하는 무언가라고 믿고 있다.

 

여기서 보로메오 매듭에 대한 라캉적 관련성에서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세 가지 원의 매듭 구성이 탈상관주의적 존재 모형을 제공한다는 점인데, 여기서 세 가지 영역들―상징계 또는 담론, 실재/물질계 그리고 행위자 또는 주체의 영역―이 이런 영역들 사이의 관계와 그것들의 매듭짓기뿐 아니라 그것들의 독립성도 사유하기 위한 모형을 제공한다. 세 가지 체제들은 서로 관련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독립적이다. 보로메오 매듭의 위상학(topology)에서는 어떤 고리도 여타의 고리와 직접 결부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한 고리를 절단하면 나머지 두 고리도 분리된다. 이것이 단순히 사유 발견법적인 것일지라도, 내게 그것은 존재가 항상 사유를 함축하고 있고 사유가 항상 존재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이론적 태도를 벗어나는 데 중요한 듯 보인다. 탈상관주의적 사유는 문화 및 사유와 독립적인 세계 속에 실재적인 것들이 존재하고, 담론들이 존재하며, 행위자와 주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동시에 존중하는 틀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만, 다른 한 시각에서 바라보면, 이 세 가지 고리들이 벤 다이어그램도 형성한다는 점을 인식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에서 벤 다이어그램은 이런 범주들 사이의 포함 및 배제 관계들에 관해 사유하기 위한 시각적 모형이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x"를 다이어그램의 영역 2에 위치시킨다면, 물질적이면서 상징적인 존재자가 최소한 하나가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는 셈일 것이다. 이것은 앤디 클락(Andy Clark)이 <<거기 있음(Being There)>>이라는 책에서 인지에 있어서 수행하는 역할을 논의하면서 글쓰기―글로 쓰여진 낱말의 순전한 물질성, 종이 위에 새겨진 기록―가 미치는 영향을 탐구할 때 조사하는 것이다. 클락의 논제는 글쓰기 자체의 물질성, 그것의 기록이 사유를 위한 어떤 받침대나 우회로일 뿐 아니라, 어떤 유형들의 정신들의 경우에 생각할 수 있는 것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머리 속에서 헤겔의 <<논리학>>의 추리 연쇄에 몰입하려고 시도한다고 상상하자. 종이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존재", "원인", "근거", "무"(!!!), "차이" 같은 추상적 개념들을 추상적 사유 대상들로 전환할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추리 연쇄를 보존하고, 그래서 여러분은 추리를 하는 도중에 되돌아가서 새로운 일련의 사고들의 단계들로 사용할 수 있다. 클락이 서술하듯이, 우리는 우리의 기억을 종이에 "떠넘기고", 그래서 그것을 우리 머리 속에 계속해서 간직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우리 사유의 내용 또는 기의가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기록 체계들, 즉 종이, 흑연이나 잉크 등의 물질성에 의해 가능하게 된다. 각각의 새로운 기록 매체와 더불어 새로운 형태들의 사유, 주체성 그리고 사회적 관계가 출현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고리들을 지향적인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상징적인 것 또는 담론의 체제(S)에 작용하여 상징적인 것 또는 사유되는 것의 체제에 있어서 변화를 촉발하는 실재적인 것 또는 물질성의 체제(R)가 있다. 글쓰기의 발명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의 사유 대상에 의거하여 상징적인 것 또는 담론의 본성에 있어서 심대한 변화를 초래하는 촉매적 작용자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예를 들면, 점진적으로 우리는 구술 문화들의 특징적인 신성한 이야기들에 관해 훨씬 덜 생각하게 되고, 공정, 선, 권리 등과 같은 규칙에 의거한 매우 추상적인 형태들의 가치에 관해 더욱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글쓰기는 담론 또는 상징적인 것이 구성되는 방식의 층위에서 일종의 자기 조직화를 낳은 일종의 끌개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다. 다시 말해서, (R -> S)로 서술될 수 있을 실재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의 지향적 관계는 대단히 역동적인데, 그것은 사유 대상, 담론 대상, 우리가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 그리고 매클루언을 믿을 수 있다면, 우리가 공간을 경험하는 방식의 층위에서 모든 종류들의 결과를 낳는 과정을 개시한다.

 

우리는 영역 2에서 실재적인 것 또는 물질적인 것에 작용하는 상징적인 것(S -> R)이 존재하는 관계를 갖는 다른 한 지향을 생각할 수 있다. 담론들, 상징적 체계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마우리치오 페라리스(Maurizio Ferraris) 같은 사상가들이 <<문서성(Documentality)>> 같은 저작들에서 제시했듯이, 어떤 실재성을 갖추고 있고, 그것들이 실재에 대한 참된 표상들인지 여부에 무관하게 어떤 힘을 행사한다. 이것에 관한 멋진 사례는 지금까지 유전자 코드 판별하기가 미친 영향일 것이다. 유전자 코드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하나의 담론, 상징적 체계이다. 이 담론을 통해서 지금까지 우리는 유전 공학을 활용하여 물질성(R)의 바로 그 얼개를 변환시킬 수 있었다. 유전 공학을 통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만들어낸 생명체들은 상징계의 유령이 아니라, 세계에서 저쪽에 있는 물질적 존재자들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라는 책에서 요약된 라투르의 "준객체(quasi-object)를 만나게 된다. 보드리야르(Baudrillard)는 <<시뮬라시옹>>에서 세계는 "탈실재화"되어 버렸다고, 세계는 일련의 시뮬라크르가 되어 버렸다고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지만, 정반대의 주장이 참이다. 우리가 트위터에서 말하거나 블로그에 올리거나 비디오로 녹화하는 것의 물질적 기록이 어느 때보다도 사물들을 더 실재적으로 만든다. 우리는 이런 "시뮬라크라"의 보존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지금까지 모든 저자는 흔히 글쓰기를 매우 어렵게 만드는 일종의 공포를 품고서 이런 흔적의 지속을 영구적으로 대면했다. 또 다시, 종교적인 특질을 갖추고 있든 영양학에 기반을 두고 있든 간에, 식단 체계는 나의 생리학적 육체의 미래 모습에 대해 물질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런 관련성에서 나는 내 자신이 영역 2, 4, 5 그리고 6에서 일어나서 전개되는, 양 방향으로 지향된 과정과 사건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런 교차 지점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이런 만남들에서 어떤 존재 형태들이 촉발되는가? 그것들은 서로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수정하는가? 우리가 평탄한 존재론 또는 내재성―이것들 자체가 상징적 구성체들이다―을 진지하게 고려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페미니즘 같은 담론이 문어나 달처럼 실재적인 것인지 여부에 대해서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담론이 실재적이라고 확실히 믿고 있지만, 담론을 말하는 행위자 또는 주체의 체제 및 물질성의 체제 바깥에 있는 영역 3에 속하는 상징적인 것에 관해 생각한다면―말하자면, 자체의 순수한 본질에 있어서 상징적인 것을 생각하려고 시도할 때―내게 그것은 창 밖의 참나무의 특성들과 상이한 특성들을 갖추고 있는 듯 보인다(복제가 이것을 복잡하게 만들지라도). 상징적인 것과 관련하여 무형의 것, 관념적인 것이 존재한다. 우리는 수학 방정식 또는 카프카의 <<심판>>을 자체의 동일성을 상실하지 않은 채 원하는 만큼 여러 번 반복하거나 되풀이할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나무는 이 장소와 이 시점에 현존하는데, 화이트헤드가 말하곤 했듯이, 그것은 "그저 정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존하기 위해 훨씬 더 넓은 우주에 스며들어 있지만 말이다. 마찬가지로, 상징계에서의 인과율은 다르게 작동하는 듯 보인다. 스벤의 유독한 프리타타는 물리적 층위(R)에서 내 육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반면에, 내가 갈 수 있는 곳을 규정하는 법적 규제는 상이하게 작동한다. 이것은 종류가 다른 것인가, 아니면 정도가 다른 것인가? 나는 알지 못하며, 여전히 그것에 관해 생각하고 있다. 많이 놀라게도 나는 그런 문제들에 관해서 내 자신이 점점 더 평행론(parallelism)이라는 스피노자의 학설에 공감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나는 그런 사유들을 그것들이 요구하는 층위에서 존재론적으로 전개할 방법을 결코 확신하지 못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