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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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마이클 그리어: 오늘의 인용-크툴루세의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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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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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도전적인 관념을 요약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이해에 대한 장벽들 가운데 일부를 깨뜨릴 만큼 충분히 강하게 가리키는 데 뜻밖의 어휘 전환이 사용될 수 있는 시기들이 존재한다. 내 독자들 가운데 한 사람 덕분에 [...] 지난 주에 나는 그런 어휘 전환을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첨단의 사상가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가 2014년에 행한 강연을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그 강연에서 해러웨이는 우리가 진입하고 있는 지질학적 시대에 대한 현재 유행하는 칭호, 즉 인류세에 이의를 제기하며 크툴루세(Cthulhucene)라는 자신의 신조어를 제안했다.

 

해러웨이는 그 제안에 대한 특정한 이유들을 갖고 있지[...]만, 나는 약간 다른 이유들 때문에 그 술어를 채택한다. 최고의 소설들 가운데 하나를 위해 [...] 악신 크툴루를 고안한 H. P. 러브크래프트(Lovecraft)는 [...] 산업 사회의 통상적인 사유에 이질적인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그 존재자와 상상의 만신전의 촉수가 있는 나머지 무서운 괴물들을 사용했다. 러브크래프트가 그런 개념를 가리키는 데 사용한 술어는 "무관심주의(indifferentism)"였는데, 그것은 우주는 인간들에 전적으로 무관심하다는 인식, 즉 공감적이지도 않고, 적대적이지도 않고, 어떤 것도 아니며, 그래서, 모든 것을 고려해 보건대, 우주가 우리의 소망, 기대 또는 권리 감각을 따를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오히려 정말로 어리석다는 인식이다.

 

이것은 당황스럽게도 명백한 듯 보이는가? 아이러니, 그것도 의미심장한 아이러니는 오늘날 우주는 인류에 무관심하다고 주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향하여 정반대의 주장을 전제로 하는 미래에 관한 주장들을 제기한다는 것이다. 나는, 예컨대,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우주는 우리의 욕망에 무관심하다는 의견에 기꺼이 동의했지만, 최소한 우리가 현재 소진하고 있는 에너지원만큼 저렴하고 농축되어 있으며 풍부한 어떤 다른 에너지원이 저쪽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많은 헌신적인 무신론자들을 잊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그런 주장은 우주에서 물질과 에너지의 공급이 아무튼 우리의 편익을 위해 준비되었다고 가정할 때에만 납득이 되는데, 그렇지 않다면 저쪽에 다른 자원이 전혀 있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얻은 것을 소진할 수 있을 뿐이고, 그래서 인간 종이 우연히 현존하는 시대의 나머지 시기 동안 농축 에너지원 없이 지내야 한다.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동일한 맥락에서 만났던 은밀한 인간중심주의의 유일한 예가 결코 아니다. 또한 나는, 돌보는 우주라는 관념을 즉각 거부하지만, 계속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이룬 그런 종류의 기술적 진보는 비가역적인 것이라고 주장한 많은 헌신적인 무신론자들을 잊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그런 주장은, 역사가 아무튼 우리의 편익을 위해 준비되어 있어서 대략 지난 오 세기 동안 매우 힘겹게 올라간 긴 비탈을 다시 미끄러져 내려갈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가정할 때에만 납득이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역사가 우리의 선호에 무관심하다면 하강은 상승과 꼭 마찬가지로 용이하고, 그래서 과거에 사라진 모든 문명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쇠퇴와 멸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 다음에 무엇보다도 가장 당혹스러운 주장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인류의 운명은 우주 저쪽에 놓여 있다는 열렬한 주장이다. "운명"은 신학적 개념이고, 그래서 그런 주장이 자신은 신학을 거부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매우 자유롭게 제기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솔직히 웃음을 자아내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자. 사실상 우주가 우리의 소원과 욕망에 무관심하다면, 지금까지 다수의 사람들이 항성을 향한 비행이라는 과학소설적 전망에 대해 흥분했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우주가 우주 여행을 인간 종을 위한 실행 가능한 선택지가 되도록 만들지는 않는다. 사실상 우주 여행은 실행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라고 생각할 매우 좋은 이유들이 존재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또는 오히려 우리들 가운데 일부)는 항성으로 이주하는 꿈을 꾸고, 그래서 우리가 항성에 이주하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그런데 인간들은 상상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전에 작동하는 영구 운동 기관을 제작하고자 한 시도의 긴 역사에 관해 조사하기를 권한다.

 

이 세 가지 사례에서 나는 무신론자들을 선택했는데, 그것은 얼마간 불공평하다. 지난 십 년 동안 내가 만났던 은밀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정말로 두드러진 사례들 가운데 대부분은 자신의 무신론을 꽤 강조하는 사람들에서 비롯되었지만, 물론 종교적 진영에서도 명백히 유독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사례들이 부족하지 않는데, 여기서 나는 그리스도가 곧 재림할 것이고, 그래서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신이 만들었고 좋다고 한 세계에 우리가 아무리 무자비하게 쓰레기를 투기하더라도 아무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에 관해 생각하고 있다. 공평하게 말하자면, 지금까지 나는 우주에서의 목적 부재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어떤 섭리도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의 결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함축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무신론자들을 만났다. 또한 지금까지 나는, 자신의 믿음에 의해 규정되는 우주는 인간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신중심적인 것이고, 그래서 인류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획득해야 한다고 경망스럽게도 오만하게 가정하는 대신에 인간들은 겸손이라는 미덕을 계발하고 싶어하며 신이 염두에 두고 있을 목적들에 유의할 것이라고 인식하는 종교적인 사람들도 만났다.

 

크툴루세의 새벽은 세계를 이해하는 그런 방식들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지질학적 시대의 도래를 나타낸다. 우리는, 우리가 아무리 강하게 우리의 눈을 가리고 우리의 귀를 막고서 우주의 나머지 부분에 "랄랄랄, 나는 당신의 말을 들을 수 없어"라고 소리치더라도 우주는 우리가 원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가 경솔하게 낭비하고 있는 자원은 우리의 편익을 위해 대체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계속해서 살아 있게 만드는 지구의 생물권에 가하는 손상으로 인한 모든 결과를 직면해야 할 것이다. 약탈할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 이 항성에서 저 항성으로 활보하는 자연의 정복자 인간이라는 과대망상적 환상 대신에 우리는 방대하고 이질적인 형상, 크툴루라고 부를 수도 있을 형상이 미래의 안개로부터 우리 앞에 등장하는 것을 목격하기 시작하고 있다. [...]

 

그런 시각에서 바라보면, 머리가 벗겨지고 있는 사회적 영장류는 거대한 사물들의 도식에서 삼엽충이나 공룡, 또는 그 점에 있어서는 셀 수 없이 많은 종들―지능을 갖추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만큼이나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그것을 더 일찍 파악할수록, 우리로 하여금 우리 상황을 보지 못하게 하는 오도된 인간중심주의적인 망상들을 떨쳐버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초래한 혼란을 알아차리며, 탈산업적 암흑 시대의 긴 밤이 우리에게 접근하기 전에 대략 지난 삼백 년 동안 이룬 최선의 성취들 가운데 많은 것들을 구하고자 하는 작업에 착수하기가 더욱 더 쉬울 것이다.

 

우주는 인간 종의 영향력 있는 구성원들 사이에서 현재 유행하고 있는 전능함의 환상들에 영합하는 것에 결코 아무 관심도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어떤 특별한 섭리도 우리의 잡다한 어리석은 행위들의 결과로부터 우리를 구조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어떤 자원 요정도 현재 우리가 대단히 무분별하게 낭비하는 자원을 보충할 빛나는 새로운 에너지원을 제공하지 못할 것이며, 그리고 자연 법칙들은 우리가 저지른 생물권에 대한 순전히 어리석은 학대의 결과를 우리의 느낌과 이익을 전적으로 무시한 채 우리의 면전에 이미 되돌려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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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마이클 그리어(John Michael Gre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