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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레윈스: 오늘의 에세이-인간 본성이라는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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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5. 29.

 

인간 본성이라는 신화

The myth of human nature

 

―― 팀 레윈스(Tim Lewens)

 

1997년에 저명한 진화론자 마이클 기셀린(Michael Ghiselin)은 "진화는 인간 본성에 관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라고 물었다. 그가 제시한 대답은 진화 과학이 인간의 심리학적 구성의 가장 심원하고 가장 편재적인 양상들을 서술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기셀린은 독자들에게 진화는 "인간 본성이 하나의 미신이라는 점을 가르쳐준다"고 알려주었다. 왜 누군가가 그런 것을 말할 것인가? 인간 본성에 관한 진술은 우리가 모두 동일한 방식들에 관한 진술에 해당하지 않는가? 그것에 관해 반대할 수 있을 것이 무엇인가? 180년을 되돌아보면 그 문제들을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다.

 

1836년 10월 2일에 HMS 비글(Beagle)호가 팔머스(Falmouth)에 도착했다. 오 년 동안의 세계 일주 후에 그 배는 마침내 영국으로 귀환했다. 비글호의 승객들 가운데 한 사람이 27살의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었다. 하선 후에 다윈은 먼저 슈르즈베리(Shewsbury)에 있는 자신의 부친 집에서 지냈지만, 1837년 3월에 그는 런던으로 이주했다. 바로 이곳에서 다윈은 자연사 및 그밖의 다양한 주제들에 관한 사색의 결과를 일련의 노트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는 종이 생성된 방식에 관한 자신의 "변신주의적" 견해를 구상했고, 자연 세계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주요한 동인으로서 격심한 투쟁을 가리켰으며, 생명의 역사에 대한 이런 이미지가 인간 심리, 도덕 그리고 미학적 감성에 대해 미칠 영향에 관해 공공연히 성찰했다. 1842년에 이런 노트 메모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다윈 이론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로 변환되었다. 1844년 경에 그 간략한 스케치는 진화적 견해에 대한 230쪽의 진술로 증보되었다. 그렇지만 1859년(15년 후)에 이르렀어야 <<종의 기원>>이 출판되었다. 그 동안에 다윈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 대답은 1846년과 1854년 사이의 시기 동안 다윈은 따개비에 관한 대규모의 연구를 수행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1840년대 중반에 다윈은 <<종의 기원>>을 출판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처럼 때때로 "지연"으로 간주되지만 아무튼 겁을 먹었던 시기―는 역사가들에게 얼마 동안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그런데 지금은 다윈이 자신의 따개비 연구를 이전의 많은 이론적 사변들에 대한 상세한 경험적 시험 근거로 어떻게 사용했는지 분명한 듯 보인다. 다윈이 따개비 해부학에 관한 자신의 꼼꼼한 연구로부터 취한 가장 중요한 교훈들 가운데 하나는 변이의 편재성에 관련된 것이었다. "대부분의 종에서 모든 외부적 특징은 크게 변화할 뿐 아니라, 내부적 부분들도 매우 흔히 놀랄만큼 변화한다"고 다윈은 적었다. 나아가서 다윈은 어떤 부분 또는 기관이 "형태 또는 구조에 있어서 절대적 불변적"이라고 알아채는 것은 "가망 없다"고 주장하게 된다.

 

모든 종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가변성이 자연의 주요한 사실이며, 이런 편재적 변이가 자연 선택에 동력을 제공하는 연료라고 다윈은 말한다. 어느 시점에서도 모든 점에서 종들이 변화한다는 것, 자연 선택이 그런 종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심대한 방식으로 바뀌는 원인이라는 것, 그리고 기셀린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종은 "본성"을 갖추고 있다는 생각에 대단히 회의적이라는 것은 다윈으로부터 물려받은 확신이다.

 

그렇지만 진화론자들은 "인간 본성"을 거부함에 있어서 통일되어 있지 않다. 1990년에 저명한 진화심리학자 레다 코스미데스(Leda Cosmides)와 존 투비(John Tooby)는 "보편적인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을 옹호하고자 하는 의도를 천명했고, <<빈 서판: 인간은 본성을 타고나는가(Blank Slate: The Modern Denial of Human Nature)>>이라는 스티븐 핑커(Stephen Pinker)의 2002년 책은 제목을 통해서 인간 본성의 부인자들은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나 훨씬 더 최근의 작업―특히, 2010년부터, 진화인류학자 요제프 헨리히(Joseph Henrich)와 공동 연구자들의 중요하고 널리 논의된 논문―은 진화 사상가들이 문화적 차이점들이 흔히 가장 놀라운 부분들에서 인간의 심리적 가변성을 추동하는 방식을 점점 더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예증한다.

 

헨리히 등은 방대한 양의 심리학적 연구가 북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서유럽 같은 지역들의 대학들에서 수행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연구자들이 실험적 피험자들을 찾고 있을 때 그들은 일반적으로 그런 대학들의 학생들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는 우리가 헨리히와 공동 연구자들이 "위어드(WEIRD)" 사회―서구의(Western), 교양 있는(Educated), 산업적인(Industrial), 부유한(Rich) 그리고 민주적인(Democratic) 사회―라고 부르는 것에 속하는 사람들의 심리에 관해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아가서 그들은, 위어드 피험자들의 마음이 어떤 식으로 작동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당연히 모든―또는 심지어 대부분의―인간의 마음이 그처럼 작동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주장한다.

 

헨리히 등은 다양한 사례들로 그들의 주장을 예증한다. 그것들 가운데 일례는 심리학자들이 뮐러-라이어 착시(Muller-Lyer illusion)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인간의 반응들과 관련된 것이다. 이 에세이의 대부분 독자들은 사실상 길이가 동일할지라도 위 선이 아래 선보다 더 길다고 간주할 것 같다. 그런데 세계 여행을 하면, 모든 사람들이 이 매거진의 위어드 독자들만큼 뮐러-라이어 착시에 민감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챌 것이다. 오래 전 1901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의 생리학자이자 인류학자였던 W. H. R. 리버스(Rivers)는 케임브리지에서 그가 시험한 학생들이 토레스 해협으로 항해하는 동안 그가 시험한 머레이 섬 주민들보다 뮐러-라이어 착시에 훨씬 더 취약한 듯 보인다는 점을 알아챘다. 헨리히 등은 1960년대에 마셜 시걸(Marshall Segall) 등에 의해 행해진 조금 더 최근의 연구를 보고하는데, 그들은 아프리카 남부의 칼라하리 사막의 채집자들은 그 두 선이 상이한 길이를 갖고 있다고 결코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사람들이 뮐러-라이어 착시에 대한 반응이 다른 까닭은 여전히 분명하지 않다. 시걸과 공동 연구자들은 감수성의 생성 원인은 분명한 모서리와 직선들로 가득찬 환경에서 양육되었기 때문이라고 넌지시 주장했다. 그런데 변이라는 사실은 근거가 확실하다.

 

2007년에 조너선 위나워(Jonathan Winawer)와 공동 연구자들에 의해 행해진 다른 한 연구는 인간의 색 지각, 또는 최소한 상이한 표면 사이의 색 차이를 판단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도 양육되는 방식의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영어에는 청색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술어가 있고, 밝은 색조와 어두운 색조를 구분한다. 그 대신에 러시아어 화자들은 전적으로 무관한 두 가지 술어―"밝은 청색"이라고 하는 것을 가리키는 골루보이와 "어두운 청색"이라고 하는 것을 가리키는 시니이―가 있고, "청색"이라는 더 일반적인 범주에 해당하는 포괄적인 술어는 전혀 없다. 분명히 다른 이런 색상 술어들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골루보이/시니이(밝은 청색/어두운 청색) 경계를 가로지르는 두 조각의 색상을 제시받았을 때 러시아어 화자들이 영어 화자들보다 더 빨리 구별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연구들은 모두 우리의 지각적 역량들도 다윈이 따개비에서 관찰한 동일한 변이를 겪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대 생물학자들은 종이란 무엇인가를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유기체가 호모 사피엔스의 구성원으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해부학적, 생리학적, 심리적 또는 행태적 특징들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가?"라고 묻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점에 의견이 일치한다. 종 내에서의 변이의 편재성에 대한 다윈의 강조 덕분에 대부분의 현대 생물학자들은 종을 공동의 내부적 특성과 외부적 특성을 갖춘 유기체들의 집단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나무의 가지로 이해하게 되었다. 종은 거대한 계보학적 연결체의 마디이다. 종 구성원 자격에 중요한 것―즉, 어떤 유기체가 카니스 파밀리아리스(Caris familiaris) 또는 호모 사피엔스 같은 종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갖추는 것―은 계보학적 관계들에 의해 결정된다. 왕족의 구성원 자격이 자신의 내부적 또는 외부적 신체의 특징들이 아니라 부모가 누구인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생물학적 종 같은 더 큰 계보학적 단위의 구성원 자격도 조상을 살펴봄으로써 해결된다. "인간 본성"이 인간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일단의 특징들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라면, 인간 본성은 신화이다.

 

그런데, 기셀린이 우리로 하여금 믿도록 하였듯이, 변이의 현존이 인간 본성은 미신이라는 점을 정말로 증명하는가? 아니면 인간 본성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우리의 개념 구상에 있어서 너무 지나친 요구를 했을 뿐인가? 색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견지에서 인간들이 다르다는 것은 거의 뉴스가 아니다. 수 세기 동안 색맹에 관해 알려져 왔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인간들은 망막에 세 가지 종류의 원추 세포를 갖고 있고, 그래서 이것 때문에 색맹이 아니다. 게다가, 이런 "삼색" 시각 형식이 출현한 까닭에 관해 제시할 그럴듯한 진화적 이야기도 존재한다. 나의 케임브리지 동료 존 몰론(John Mollon)은 그것 덕분에 우리의 영장류 조상들이 얼룩덜룩한 잎의 배경에서 숙성한 열매를 탐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삼색 시각 형식이 자연 선택에 의해 선호되었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생물학자들은 모든 인간에서 그리고 오로지 인간에서 독특하게 발견되는 특성들의 어떤 목록을 찾아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특성들―심리학적 및 물리적―이 거의 모든 인간들에서 현존하고 있으며, 진화적 과정들이 그런 특성들이 우리 종에서 대단히 널리 퍼지게 되었고 여전히 그러한 까닭을 설명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살아남게 된다. 그것이 우리가 색 지각은 인간 본성의 일부이다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전부일 것이고,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의미하는 전부라면, 누가 인간 본성의 실재성을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 본성을 진화적 과정들로 인해 우리 종이 공유하는 일단의 특징들로 규정하는 데서 초래되는 한 가지 문제는 그것이 과학적으로 임의적이라는 점이다. 가변성은 때때로 자연 선택에 의해 적극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해양 갑각류 종 파라케르케이스 스쿨프파(Paracerceis sculpta)가 멋진 일례를 제공한다. 이 종의 수컷은 상이한 체형과 상이한 행태들을 드러내는 세 가지 전적으로 상이한 유형으로 나타난다. 대형 수컷 유형은 해면 내부의 암컷들의 "하렘"을 지킨다. 훨씬 더 작고 더 빠른 수컷 유형은 가능할 때 짝짓기 기회를 붙잡기 위해 해면으로 돌진한다. 그리고 제3의 수컷 유형은 마치 암컷처럼 보이고, 그래서 위장하여 짝짓기를 위해 해면으로 스며든다. 어떤 한 형태도 나머지 형태들을 압도하지 못하며, 자연 선택은 세 가지 형태 모두를 유지한다. 그래서 자연 선택은 때때로 어떤 종에서 다소간 편재하는 단일한 "설계"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이것은 진화적 과정들의 한 가지 잠재적인 결과일 뿐이다. 가변성은 또 하나의 잠재적인 결과이다.

 

이것 때문에 인간 본성과 관련된 두 번째 문제에 이르게 된다. <<빈 서판>>이라는 책의 부제로서 핑커가 고른 제목이 "인간 본성의 현대적 부인"라는 것을 회고하자. 그것은 우리 마음이 태어날 때 빈 서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한에는 인간 본성의 정당성이 입증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 본성은 우리의 심리적 및 행태적 목록으로 아무튼 "배선되"는 그런 특질들을 지칭한다. 이것은 인간 본성이 다소간 모든 인간들이 자신의 유전적 유산의 일부로서 소유하는 특질들을 지칭한다는 관념의 멋진 변양태인 듯 보일 것이다. 결국, "배선된" 특질과 "진화된" 특질을 가리키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한 가지 큰 차이점이 존재한다. 모방 능력, 즉 다른 인간들의 행위를 관찰하여 그 행위를 재현할 수 있는 능력을 고찰하자. 인간들에 있어서 모방은 대단히 발달되어 있다. 모방 능력을 갖추고 있는 다른 종은 거의 없고, 그래서 지금까지 몇몇 진화론자들은 우리의 두드러진 모방 능력이 점점 더 정교한 도구, 전통 그리고 암묵적 지식 집합을 산출하는 데 있어서 인간들이 다른 종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까닭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넌지시 주장했다. 그래서 모방 능력은 인간에게서 특히 결정적인 형태로 현존하는 능력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 사회에서 발견되고, 그래서 수천 년에 걸친 우리의 기술적 및 행태적 발달을 설명함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 모든 이유들 때문에 모방 능력은 인간 본성의 일부로서 중요한 후보인 듯 보인다. 그런데 심리학자 세실리아 헤이즈(Cecilia Heyes)는 이것의 대부분을 수용하는 한편으로 모방 능력은 인간 유아들이 학습으로 획득하는 것이라고 몇 년 동안 주장했다. 헤이즈가 옳다면, 모방 능력은 "배선된" 것이 아니다.

 

모방 능력이 어떻게 획득되는지 설명함에 있어서 한 가지 수수께끼가 존재한다. 모방자는 다른 한 사람의 행위를 관찰할 필요가 있고, 그 다음에 비슷한 행위를 나타낼 필요가 있다. 문제는 어떤 행위가 관찰자에게 보이는 방식이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에게 느껴지는 방식과 유사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 수수께끼는 자신의 신체적 움직임을 관찰하기 힘들 때 특히 심각하다. 아이가 내가 어떤 식으로 내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것을 본다면, 그는 그 행위를 어떻게 재현할 수 있는가? 그는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자기 얼굴을 쳐다볼 수 없고, 그래서 자신의 얼굴 움직임에 대한 느낌이 자신의 얼굴 움직임에 대한 관찰과 동일한 방식으로 유사하지 않다.

 

헤이즈는 학습이 이 수수께끼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지각과 행위가 꽤 신뢰성 있게 관련되는 한, 어떤 행위에 대한 지각과 동일한 행위의 실행 사이의 연결 고리는 학습될 수 있다. 부분적으로는 개체들이 때떄로 자신의 행위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그들은 자신의 손을 관찰할 수 있다), 부분적으로는 거울 같은 인공적 지지물을 사용함으로써(때때로 우리는 실제로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부분적으로는 자신이 공동 작업에 관여하는 집단의 부분일 때 다른 개체들에서 나타나는 행위 패턴을 목격함으로써 그것들은 관련될 수 있다.

 

헤이즈의 견해는 모든 사람들이 수용하지는 않지만 뒷받침되는 경험적 증거가 있다. 그것은 침팬지들이 모방하도록 훈련될 수 있다는 것, 새들이 무리를 지어 집단적으로 관여하는 행태를 모방할 수 있는 듯 보인다는 것, 인간 신생아들에게서 모방 행위가 출현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것 등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모방은 추정컨대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되기를 바랄 바로 그런 종류의 특질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의 적응적 발달은 본질적으로 문화적 영향에 의존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 인간 본성은 혼란스러운 개념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종의 독특한 진화적 궤적에 중요한 특질들, 우리 종에 편재하는 특질들 그리고 우리 뇌에 "배선된" 특질들 사이의 구별짓기처럼 우리가 계속해서 선명하게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많은 구별짓기를 흐릿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 본성에 관한 관념이 해악을 끼칠 수 있다는 어떤 증거가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인간 본성 및 다른 종의 본성에 의거하여 생각하지 않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아챈다. 스콧 애트런(Scott Atran)과 수전 겔먼(Susan Gelaman)을 비롯한 다양한 과학자들에 의해 수행된 심리학적 연구는 이런 경향이 일찌기 어린 시절에 출현한다고 시사한다. 네 살 박이 아이들은 각 종이 그 종의 전형적인 특징들의 발달을 추동하는 어떤 내재적 "본질"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모든 개는 표준적인 "개다운" 행태와 외양―꼬리 흔들기, 짖기, 활발히 달리기 등―을 낳는 "개의" 본질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아이들은 이런 본질이 불발될 수 있다고 믿는데, 이것은 꼬리 흔들기를 거부하는 어떤 개별적 개를 낳을 수 있다. 물론, 현대 생물학은 이런 본질이 실재적인 것이라는 점을 부인하고, 그래서 연구는 동물과 식물에 관해 생각하는 직관적인 방식들에는 널리 공유되는 오류가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종의 본성에 대한 이런 접근 방식은 더 최근에 수행된 겔먼의 연구―우리는 생물학적 종이 숨은 본질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그래서 물론 인종도 내재적 본질을 갖추고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에 비추어 보면 더 나쁜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다윈은 모든 곳에서 변이가 나타난다고 주장했지만, 그 역시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만큼이나 "니그로" 또는 "오스트랄리아인"의 본성에 대해 포괄적으로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래서 "경솔하고 비열하며 패기가 없는 아일랜드인"이라는 동시대인 윌리엄 그레그(William Greg)의 서술을 승인했다. 이런 종류의 본질주의적 사고는 관찰적 증거로 교정하기가 어렵다. 내재적 본질이 종종 "불발될" 수 있다면, 막대기를 쫓아가기를 싫어하는 개별적 개들을 그냥 가리키는 것만으로는 어떤 본질적인 "개의" 본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납득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개별적 아일랜드인들이 근면과 야망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그냥 예시하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인 아일랜드인의 본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의 오류를 납득시키기도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자기 "본성"의 산물이라는 담화가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유해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른바 이런 "본질적인 본성"이 유해하고 끈덕진 인종주의적 전형과 성차별주의적 전형의 근저에 거의 틀림없이 놓여 있다.

 

인간 종의 본성에 대한 호소뿐 아니라 자연적인 것에 대한 호소도 때때로 새로운 생식 기술의 사용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적 주장에서 나타난다. 대단히 존중 받는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은 이른바 "역량 향상" 기술들에 반대하는 변론을 제시하면서 "자연적"인 것에 호소했다. 이것들은 인간 능력을 양호한 건강에 요구되는 표준을 넘어서 증강시킬 가망이 있는 상이한 종류의 기술들―약물, 보철 또는 유전자 교체를 포함할 것이다―이다. CRISPR-Cas9 기법 같은 새로운 "유전체 편집" 기술들이 언젠가 유전병을 제어하는 데 사용될 뿐 아니라 잠재적으로 인간 생식계열에 부가적인 비치료법적 편익을 갖춘 유전자들을 도입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가정 때문에 오늘날 신문에서 역량 향상의 도덕성에 관한 의문들이 또 다시 제기된다. 올해 초 <<네이처>>에 실린 논문에서 이런 기법들에 관해 연구하는 일단의 과학자들이 "명확히 치료법적인 개입을 허용하는 것도 우리로 하여금 비치료법적인 역량 향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할 수 있게 할 것이라는 점에 의거하여 많은 사람들이 생식계열 수정에 반대한다"고 경고했다. "우리도 이런 우려를 공유한다."

 

역량 향상에 반대하는 샌델의 논변은 아기를 "선물"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는 관념에 의존한다. 자녀 교육은 "자발적인 것에 대한 개방성"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그래서 "지배와 통제의 충동"을 제약한다고 샌델은 말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아기를 잉태하고 양육할 때 자연이 제공하는 것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샌델은 말한다. 역량 향상에 반대하는 이런 방식과 관련된 문제는 그것이 유전체 편집 기법으로 건강 표준을 넘어서 향상된 "맞춤" 아기의 전망을 거부하는 것에 덧붙여 선천적 질환을 교정하는 것도 거부해야 한다는 결과를 낳는 듯 보인다는 점이다. 이것 역시 자연이 우리에게 제공한 것을 "지배하"려는 노력을 나타내지 않는가? 샌델은 그의 논변에 대한 이런 해석을 거부한다. 그는 "아기를 선물 또는 축복으로 인식하는 것이 질병이나 질환에 직면하여 수동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아프거나 다친 아이들을 치료하는 것은 그들의 자연적 역량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번영할 수 있게 만든다.

 

인간들에게 "자연적"인 역량과 그런 자연적 역량의 과욕적 왜곡에서 비롯되는 역량 사이의 차이를 어떻게 구별해야 하는지 자문하기 전까지는 샌델의 주장이 합당한 듯 들린다. 페닐케톤뇨증(PKU)이라는 질환을 타고난 사람을 생각하자. 그냥 내버려 둔다면 이 질환은 심각한 학습 장애와 행동 장애를 초래한다. 운이 좋게도, 태어나서 줄곧 성장기 아이에게 아미노산 페닐알라닌이라는 흔하게 생성되는 아미노산이 낮은 특별한 식단을 제공하면 그것의 유해한 효과는 두드러지게 완화될 수 있다. 아이에게 특별한 식단을 제공함으로써 그의 자연적 역량을 무시했는가? 추정컨대 샌델은 이것을 아이의 자연적 역량을 번성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적절한 의료적 개입, 기술적 개입 그리고 문화적 개입을 활용할 수 있기만 했다면 어떤 사람이 아마도 획득했을 모든 역량을 찾아낼 작정이 아니라면, 무엇이 그 사람의 "자연적 역량"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 알기 어렵게 된다.

 

이제 우리는 개인의 "자연적 역량"은 유전자 편집을 활용할 수 있기만 했다면 그가 획득했을 향상된 역량을 포함한다는 생각에 노출되었다. 필사적으로 누군가가 유전체 편집은 자체적으로 "자연적" 과정이 아니고, 그래서 그것을 어떤 사람의 자연적 역량이 번성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서술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결국 유전체 편집은 상당한 기술적 성취이다. 그러나 그런 의미에서 페닐알라닌이 낮은 인공적 식단의 제공은 "자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미심쩍다. 유전체 편집에 반대하는 논변을 구성하고 싶다면 자연적인 것 또는 비자연적인 것에 대한 호소는 전혀 유용하지 않다. 자연은 그것에 대해 의도된 윤리적 작업을 수행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