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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벨라미 포스터: 인터뷰-생태적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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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6. 13.

존 벨라미 포스터: 생태적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며

In Defense of Ecological Marxism: John Bellamy Foster responds to a critic

 

앵거스: 우선 "신진대사적 균열"이 의미하는 바를 간략히 요약해 주시겠습니까?

 

포스터: 이것은 무리한 요구입니다. 제가 가능한 한 간결하게 주요한 이론적 및 역사적 핵심들에 이를 수 있는지 알아 봅시다. 신진대사적 균열이라는 개념은 마르크스의 소외 이론―인간들의 생산하는 존재로서의 자신으로부터의 소외, 생산 과정으로부터의 소외, 종으로부터의 소외 그리고 다른 인간들로부터의 소외―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신진대사적 균열은 인간의 생의 물질적 조건, 즉 자연으로부터의 소외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1800년대 중반에 과학자들은 모든 생명에 본질적인, 유기체 내부 및 유기체들 사이에서, 그리고 유기체와 자체의 환경 사이에서 일어나는 물질과 에너지의 교환을 서술하기 위해 신진대사라는 개념을 전개했습니다. 마르크스는 노동 및 생산 과정을 가리키는 데,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자연적 과정들을 가리키는 데 "사회적 신진대사"라는 술어를 사용함으로써 그 개념을 역사적 유물론에 편입시켰습니다. 살아 있는 객관적 존재자로서 인간들은 자연의 나머지 부분과 맺는 신진대사적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1850년대 말과 1860년대 시기에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토양 생산력의 상실에 관한 우려가 발생했습니다. 새로운 산업화된 자본주의적 농경은 토양에서 영양분을 빠르게 고갈시키고 있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사회적 신진대사, 생 자체의 자연적 법칙들에 의해 처방된 신진대사의 상호의존적인 과정에 있어서 치유 불가능한 균열"로 서술합니다.

 

그런 신진대사의 회복은 생산에 합리적으로, 지속 가능하게 접근할 수 있고, 그래서 인간이 자연과 신진대사를 수행할 수 있는 사회주의적 사회에서만 성취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지속 가능성―미래 세대를 위해 지구를 유지하는 것―이 사회주의, 관련 생산자들이 자신의 인간적 잠재력을 발달시키면서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를 합리적으로 규제할 사회를 규정하는 특징일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앵거스: 신진대사적 균열 이론이 오늘날의 환경 위기를 이해하는 데 어떻게 기여합니까?

 

포스터: 지구 체계 위기, 행성적 경계들의 균열 그리고 경제적 모순들에 대한 우리의 총체적 이해는 마르크스의 관념들을 이해함으로써 대단히 향상됩니다. 이런 환경 위기들을 자본주의의 소외된 사회적 신진대사와 관련시키면서 토양과 기후에서 해양 체계들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권역들에서 나타나는 신진대사적 균열을 분석한 생태주의자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생태적 문제를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경제적 문제이면서 생태적 문제인 것으로 이해하는 유일한 변증법적인 체계적 견해를 제시했습니다. 그 어떤 다른 접근 방식도 인류세 시대에 인간의 실천을 특징지울 수 있는 자연과학적 비판과 사회과학적 비판을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논리의 순환를 깨뜨렸습니다. 마르크스의 경우에, 환경 파괴의 중요성은 그것이 자본가들의 비용을 상승시키고 경제적 위기의 원인이 된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는 생태의 파괴를 그것 자체로 비판적 쟁점으로 다루었습니다. 신진대사적 균열에 관한 마르크스의 이론 덕분에 우리는 자본주의가 환경 파괴와 폐기물을 외부화시킴으로써 성장하는 방식, 즉 자연에 대한 합리적인 지속 가능한 관계에 의거한 사회주의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는 문제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앵거스: 당신의 작업에 대한 제이슨 무어(Jason Moore)의 많은 비판들 가운데 "데카르트적 이원론"이라는 혐의가 가장 빈번하게 눈에 띄며, 그리고 제가 보기에는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그 꼬리표를 당신과 다른 생태사회주의자들과 급진적 환경주의자들뿐 아니라 선도적인 지구 체계 과학자들에게도 붙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류세 과학은 "현재의 위기를 초래한 바로 그 사유 구조들의 포로가 되어 있다. 이런 사유 구조들의 핵심에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이 있다."

 

저는 제 자신이 <<자본주의 자연 사회주의(Capitalism Nature Socialism)>>의 최근 호에서 무어의 저작에 관해 "그 책 전체를 통해서 무어가 동의하지 않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원론적인 것이다"라고 말하는 영국의 환경사회학자 그레이엄 샤프(Graham Sharp)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원론이라는 혐의의 배후에 놓여 있는 것은 무엇이며, 그리고 그것에 어떤 타당성이 있습니까?

 

포스터: 무어가 이원론이라는 혐의를 매우 많은 사상가들에게, 심지어 명시적으로 변증법적인 사상가들과 정교한 체계 이론들을 활용하는 사상가들에게도 부여하는 것은 기묘한 듯 보입니다.

 

그레이엄 샤프의 말은 일리가 있지만, 무어가 "동의하지 않는" 것은 그가 자신의 관념들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급진적 생태 운동, 생태적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생태학과 관련된 모든 관념들이라는 점을 덧붙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속담에도 있듯이, 미치기는 했지만 그가 하는 말에는 조리가 있습니다.

 

데카르트적 이원론에 대한 무어의 비판은, 심지어 추상화의 방식으로도, 자연과 사회를 구별짓는 모든 시도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무어는 고인이 된 닐 스미스(Neil Smith)와 노엘 카스트리(Noel Castree) 같은 지리학의 급진적 사상가들과 현재 브레이크스루 인스티튜트(Breakthrough Institute), 즉 자본주의적 "생태근대주의(ecomodernism)"를 선도하는 센터의 선임 연구위원인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같은 구성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무어는 자연이 사회 속에 포섭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을 그가 "인류-속-자연"과 "자연-속-인류"라는 "이중적 내부성"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가 "일원론적이고 관계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이 견해는 철학에서, 심지어 추상화에 의해서도, 정신과 물질 같은 존재자들은 분리될 수 없으며, 그리고 현재 유행하는 몇몇 판본들에서는 함께 "다발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립적 일원론(neutral monism)"으로 알려져 있는 입장의 유형을 따릅니다. 이 입장은, 일 세기 전에, 유물론과 관념론에 대한,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적 변증법에 대한 반대 입장으로 제기되었습니다. 무어는 지속적으로 "다발짓기"를 언급합니다. 무어가 "생의 그물" 또는 "세계 생태"라고 부르는 것은 다발들의 다발로 특징지워집니다. 사회적 행위자는 일단의 "변증법적 다발들"일 뿐입니다.

 

이원론적 언어로 짐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무어는 일종의 용어적 다발짓기를 채택하는데, "자연-속-자본주의"와 "자본주의-속-자연"처럼 낱말들을 하이픈으로 결합합니다.

 

데카르트적 이원론, 또는 무어가 데카르트적 이원체(Cartesian binary)로 부르는 것에 대한 지속적인 언급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십칠 세기 합리론 철학에서 데카르트는 한편으로 마음/정신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물질/기계를 구별짓습니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정신과 관련되었고, 동물은 기계와 관련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어가 "데카르트적 이원체"리고 부르는 사회와 자연의 구별짓기와 전적으로 달랐습니다.

 

무어는 신진대사적 균열이라는 개념(부정확하게도 그는 마르크스가 아니라 제게 귀속시킵니다)이 인류/사회와 자연을 논리적으로 별개의 존재자들로 간주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그 개념은 이원론적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무어는 변증법이 단지 전체성의 매개, 즉 개체들과 사회, 인류와 자연, 부분과 전체를 분리하는 동시에 통일시키는 과정과 관련된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입니다.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사회적 신진대사는 생산을 통한 자연의 자기매개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의 역할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인류와 자연의 분리, 자연적 과정들과 생명의 파괴에 집중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현재의 소외된 생산 체계, 즉 자본주의 하의 사회, 생명 그리고 자연의 구체적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 생태학적 비판의 요점입니다. 변증법은 항상 외양과 본질, 차이 속 동일성, 대립자들의 상호침투 그리고 부정의 부정에 관련된 것입니다. 그것은, 무어가 생각하는 듯 보이는 것처럼, 조악한 이원론과 조악한 일원론 사이의 선택이 결코 아닙니다. 사회를 지구 체계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며 그것으로 환원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는 동시에 그것의 근본적인 일부로 간주할 때 아무 모순도 없습니다. 그런 접근 방식을 "이원론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신의 심장이 당신 육체의 중추적인 부분인 동시에 독특한 특징과 기능들을 갖춘 별개의 기관이라는 점을 부인하는 것에 비견됩니다.

 

"다발짓기"는 변증법이 이해하는 것, 즉 세계는 셀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매개되는 복잡하고 이질적이며 변화하는 전체―인간들이 역사적 존재자로서 참여하는 미결의 맥락―라는 점을 회피하는 매우 단순한 방식입니다. 인류와 자연의 사회적 신진대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이런 더 광범위한 이해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앵거스: 그래서 무어가 "단수의 신진대사(singular metabolism)"라고 부르기도 하는 그의 일원론은 사회, 인류 그리고 자연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변증법적 이해에 대립적인 입장에 서게 됩니다. 그 이상의 것이 있습니까?

 

포스터: 무어는 맥켄지 워크(McKenzie Wark)의 마르크스의 신진대사적 균열 이론의 사용, 사미르 아민(Samir Amin)의 생태적 발자국 개념의 사용 그리고 인류세에 대한 당신의 설명을 공격합니다. 그는 본질적으로 "자연이 자본을 위해 작동하는 방식" 대신에 "자본주의가 자연에 행하는 바"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이유 때문에 생태적 마르크스주의 또는 생태사회주의를 비롯한 모든 녹색 사상을 거부합니다. 무어의 경우에, 주요한 생태적 문제는 지구 체계의 파괴가 아니라, 자연적 자원이 더 비싸게 되어버려서 자본주의적 경제에 대한 문제들을 초래한다는 사실입니다.

 

무어는 이런 견해가 "임박한 파국과 붕괴에 관한 일반적인 서사들"보다 "더 유익하"다고 말하는데, 겉보기에 그것이 자본주의가 자체가 초래한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영국 작가 래리 로만(Larry Lohmann)은, 우리 책들의 부제들―자본주의 대 기후(클라인) 그리고 자본주의의 지구와의 전쟁(포스터, 클라크 그리고 요크)―때문에, 한편으로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을, 다른 한편으로 브렛 클라크(Brett Clark), 리처드 요크(Richard York) 그리고 저를 비판했습니다. 로만은 우리가 단순히 "데카르트적 슬로건들"에 호소하고 있다고 비난했으며, 그리고 자본주의로부터 분리된 기후나 지구 체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우리의 부제들과 정치적 견해들은 이원론적이고 묵시론적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무어는 그런 당혹스러운 비판에 대한 동의를 신속히 선언했고, 그것을 <<생의 그물 속 자본주의(Capitalism in the Web of Life)>>라는 책에서 생태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에 편입시킵니다.

 

앵거스: <<생태적 균열(The Ecological Rift)>>이라는 책에서 당신과 브렛 클라크, 리처드 요크는 생태적 위기가 자본주의가 문제들을 우회하여 퇴치하고자 하지만 결국은 항상 누적적으로 더 거대한 모순을 만들어내는, 당신이 "균열과 전환"이라고 부르는 것을 초래한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그가 원천을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무어는 당신의 어휘를 채택하지만, 그 다음에 그것을 바꾸어서 "문제는 신진대사적 균열이 아니라 신진대사적 전환"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변화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포스터: 무어의 견해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환경 문제들은 모두 그가 "네 가지 저렴한 것(Four Cheaps)"―노동, 식량, 자연적 자원 그리고 에너지―이라고 부르는 것을 획득하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태적 위기 자체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 "전환"―어딘가 다른 곳에서 또는 다른 방식으로 자원이나 노동을 획득함―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 생태적 희소성에 의해 초래되는 경제적 위기가 존재할 뿐입니다.

 

나아가서 무어는, 신진대사적 균열, 생태적 발자국 그리고 인류세 같은 개념들을 사용하여 지구가 위험스럽게도 훼손되며 파괴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연을 자체를 위해 작동하게 만들 수 있는 자본주의의 역량과 연관된 "강력한 비판에 취약하"다는 주장까지 제시하게 됩니다. 무어는, 그런 "반대 논증"의 일례로서, 자본주의적 생태근대주의를 위한 선도적인 싱크 탱크인 브레이크스루 인스티튜트의 마이클 쉘렌버그(Michael Shellenberger)와 테드 노드하우스(Ted Nordhaus)의 저작을 인용합니다. 이것은 최근에 카스트리와 다른 라투르 좌파적 구성주의자들에 의해 제시된 비슷한 주장들과 관련됩니다. 한편으로 라투르는 선임 연구위원으로 재직하면서 브레이크스루 인스티튜트의 주요한 이데올로그로 등장했는데, 생태적 문제는 자본주의의 전복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무어 자신의 견해는 이런 종류의 사유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무어는 자본주의 논리의 대부분을 식별했지만,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보면, 그의 오류는 그 논리 속에 여전히 머무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세계 생태"와 "생의 그물"은 자본주의적 세계를 그것 자체의 관념에 따라 서술할 뿐입니다. 노동, 식량, 자연적 자원 그리고 에너지라는 네 가지 저렴한 것―각각의 것은 더 비싸게 될 조짐을 보인다―에 관한 무어의 관념은 자본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본 생태입니다. 노동은 네 가지 저렴한 것의 하나일 뿐인 것으로서 식량과 자연적 자원과 동일한 층위에 놓이게 되고, 생태적 문제는 자본주의에 대한 수도꼭지(또는 자원 문제)로 환원되는데, 그래서 더 큰 배수구의 문제, 즉 자본주의가 지구 체계 전체를 훼손하고 파괴하며, 자체의 폐기물을 지구 체계에 떠맡기는 방식을 폄하하거나 무시하게 됩니다.

 

앵거스: <<생의 그물 속 자본주의>>에서 무어는 "인류가 어떻게 자연으로부터 분리되게 되었는가?"라고 묻기를 그만두고 그 대신에 "인류는 어떻게 자연의 나머지 부분 및 생의 그물과 통일되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동일한 주장을 반복적으로 제기합니다. "중요한 것은 인류의 자연으로부터의 분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생의 그물 인류의 지위이다."

 

제게 이것은 다음과 같은 마르크스의 주장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듯 보입니다.

 

"설명을 필요로 하거나 역사적 과정의 결과인 것은, 살아 있는 적극적인 인류와 그들이 자연과 맺는 신진대사적 교환, 즉 인류의 자연 전유의 자연적, 무기적 조건의 통일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 현존의 이런 무기적 조건과 이런 적극적 현존 사이의 분리, 임금 노동과 자본에 관해서만 완전히 상정되는 분리이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그런 반전이 무어의 마르크스주의에 관해 무엇을 시사합니까?

 

포스터: 무어의 진술에 대한 제 반응은 당신의 반응과 정확히 동일합니다. 무어는 마르크스를 물구나무 세우고 있습니다. 무어는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자본주의에 의한 자연의 소외가 아니라, 오히려 자연을 자본주의를 위해 작동하게 만듦으로써 자본주의가 자연을 통일시키는 방식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환경사회학자들이 오래 전부터 비판한, 생태근대주의로 불리는 것으로 부활하게 된 낡은 인간 예외주의 또는 인간 예외주의적 자본관입니다.

 

그래서 저는 역설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무어의 마르크스주의"를 결코 언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전개한 틀은 반생태사회주의적이고 반생태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지구 체계의 행성적 경계들에 있어서 점점 커지고 있는 균열에 관해 걱정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녹색 운동과 생태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묵시론적 이원론주의자들이라고 전면적으로 공격합니다.

 

앵거스: 무어는 마르크스주의적 생태학에 대한 당신의 접근 방식이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과 마르크스의 가치 이론 사이에 쇄기"를 박고 있다고 말합니다. 무어는, 환경적 변화의 경제적 영향에 관해 강조한다는 점에 있어서 그의 접근 방식이 폴 버켓(Paul Burkett)의 접근 방식에 더 가깝다고 주장합니다.

 

포스터: 폴과 저는 둘 다 그 주장에 대한 불신으로 우리 눈을 비볐습니다. 가치 이론에 관해서 우리가 다르다는 생각은 표면상 터무니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자주 그 주제에 관해 함께 저술하기 때문인데, 가장 최근에는 <<마르크스와 지구(Marx and the Earth)>>라는 공저에서 그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마르크스의 생태학>>에서 저는 버켓의 <<마르크스와 자연(Marx and Nature)>>에서 이루어진 가치 분석이 제 자신의 분석에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버켓의 <<마르크스와 자연>>의 헤이마켓 판본에 붙인 서문에서 저는 마르크스의 생태적 가치 형태 이론에 대한 그의 설명이 마르크스의 생태학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획기적인 것을 나타낸다고 강조했습니다.

 

무어 자신은 마르크스적 가치 이론의 옹호자가 결코 아닙니다. 그의 책에서 이루어진 가치 개념의 조작은 급진적 정치경제학의 엄밀한 유물론적 방법이라기보다는 탈근대주의적인 문학적 담론의 언어 게임과 유사합니다. 무어는 가치와 부, 교환 가치와 사용 가치 사이의 구별짓기 같은 중요한 구별짓기들을 거칠게 다룹니다. 최종 결과는, "생의 흐름을 재/생산하는 논리로서의 [자본주의적 상품] 가치의 중심성"에 대한 미화에서 나타나듯이, 순수한 관념론입니다. 그런 진술은 프루동(Proudhon)이나 뒤링(Duhring)로부터는 예상할 수 있을 것이지만, 마르크스나 엥겔스로부터는 결코 예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역사적 유물론과 마르크스의 가치 이론 사이에 쇄기를 박는다"고 말함으로써 무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생태적 위기가 가치의 위기가 아니고, 그래서 자본의 경제적 위기가 아니라면 생태적 위기가 전혀 존재할 수 없다는 그의 주장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가 반대하는 것은, 그가 저를 연관시키는(그런데 버켓에 의해서도 꼭 마찬가지로 지지되며, 궁극적으로는 마르크스에서 비롯되는), 생태적 위기의 형태는 한 가지 이상 존재하며, 그리고 경제적 위기와 생태적 위기는 반드시 서로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견해이다.

 

무어 자신이 인식하는 생태적 위기들, 즉 경제의 비용 증가로 전환되는 자원 비용의 증가와 관련된 위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이 대체로 자본의 가치 계산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연적 과정들과 심지어 지구 체계의 파괴가 그 체계의 정상적인 계산에 편입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 초래되는 다른 생태적 위기들―그는 거부하더라도―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산호초 같은 전체 생태계들과 종의 파괴 또는 심지어 오늘날 인류세를 규정하는 인류에 의해 초래된 지구 체계 전체의 균열 같은 위기들입니다.

 

마르크스의 분석의 뛰어남은 그가 생태적 위기를 자본주의에 대한 , 즉 자본주의적 가치에 의거한 생태적 위기로 한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마르크스는 사막화 같은 생태적 위기들을 계급 사회 일반의 특징이며, 자본주의 하에서 심화될 뿐인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자본주의적 가치화가 아니라 지속 가능성에 관한 의문이 그런 생태적 위기들을 규정합니다. 자본의 관점을 반영하는 주장을 펼치는 무어의 경우에 이런 위기들은 가치의 일부가 아니고, 그래서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르크스의 분석에서 그런 과정들은 기본적인 것이고, 그래서 고찰할 필요가 있는데, 특히 자본주의 하에서의 축적 과정은 자연적 과정들을 훼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진대사적 균열에 관한 문제 전체입니다.

 

무어가 행하듯이, 한편으로 자연적 과정들을 고찰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적 가치화 과정들을 고찰하는 것은 위험한 이원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생태적 모순들의 근본적인 특성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그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생태적 비판의 바로 그 가능성을 제거합니다.

 

또한 저는 무어가 마르크스의 지대 이론을 무시하고 있을 뿐이고, 그래서 "저렴한 자연"에 관한 그의 분석이 전적으로 공허해진다는 점을 언급해야 합니다. 지대 이론 전체는 [교환] 가치와 사용 가치 사이의 긴장, 생산의 필요한 물질적 조건과 가치 사이의 긴장의 결과물입니다. <<마르크스와 자연>>에서 폴 버켓은 이것을 상세히 논의합니다.

 

앵거스: 당신은 마르크스의 생태적 사상의 회복―특히 <<마르크스의 생태학>>에서 당신에 의해 그리고 <<마르크스와 자연>>에서 폴 버켓에 의해 전개되었듯이―이 당신이 2단계 생태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것의 출현을 초래했다고 적었습니다. 그것은 1단계 생태사회주의와 어떻게 다르며, 그리고 무어의 저작은 그런 전환과 어떻게 관련됩니까?

 

포스터: 폴 버켓과 제가 언급한 대로의 1단계 생태사회주의는 녹색 이론이 어떤 마르크스주의적 관념들 위에 놓여지게 되거나, 또는 더 드물게 마르크스주의가 녹색 이론 위에 놓여지게 되는 혼성 이론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다양한 시도를 포함합니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마르크스의 작업은 생태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주장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맬서스에 대한 비판에 너무 열중했다는 주장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1단계 생태사회주의에서는 더 광범위한 녹색 견해가 지배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2단계 생태사회주의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토대로 되돌아가는데, 그래서 인류, 사회 그리고 자연 사이의 복잡한 관계와 상호작용들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역사적 유물론의 주요한 재구성(그리고, 판명되듯이, 회복)을 시도합니다. 2단계 생태사회주의는 마르크스의 생태적 가치 형태 분석과 신진대사적 균열 이론을 회복시켰고, 그래서 자연의 변증법이라는 개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마르크스와 지구>>에서 버켓과 저는 무어의 초기 작업을 2단계 생태사회주의로 규정했고, 그의 후기 저작을 1단계 생태사회주의의 반전으로 규정했습니다. 이제 저는 우리가 오인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최근 작업에서 무어는 생태사회주의와 급진적 생태 운동 일반에 대립되는 입장들을 채택했습니다.

 

과연 그답게도 여전히 무어는 불평등과 억압을 비판합니다. 그런데 생태적 위기를 자본에 대해 더 비싸게 되는 자연의 문제일 뿐인 것으로 간주하거나, 또는 "역사는 명백히 극복하기 어려운 '자연적 한계'를 극복하는 자본주의의 사례들이 풍부하다"라고 주장하는 자칭 "세계 생태론자"에 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만약 그렇다면, 왜 인류세의 위기에 관해 걱정합니까?

 

생태적 발자국과 신진대사적 균열이라는 개념들은 자본주의가 "자연에 행하는" 바를 다룰 뿐이고, "자연이 자본주의를 위해 작동하는 방식"과 게속해서 그렇게 행하도록 될 수 있게 하는 방식은 다루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대안에 대해 브레이크스루 인스티튜트의 쉘렌버그와 노드하우스를 월드 포럼의 사미르 아민에 대립시키는 자칭 급진파에 관해 무엇을 말해야 합니까?

 

본질적으로 근대 과학을 거부하는 환경관과 관련하여 무엇을 해야 합니까? 맥켄지 워크가 올바르게도 주장하듯이, 무어의 "세계 생태학"에서는 자연이라는 객관적 세계, 지구 체계 자체에 관한 과학적 관념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문화의 내부" 뒤로 사라질 뿐입니다.

 

생태 운동과 그것의 시각을 배제하고, 마르크스의 가치 분석을 포기하고, 계급 투쟁에 관해 말할 것이 전혀 없으며, 인류의 운명을 단독의 다발지워진 행위자로서의 자본주의의 진화에 맡겨버리는 분석을 어떻게 판단해야 합니까? 저는 무어가 다양한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를 갱신하거나 심화시키려고 착수했지만, 결국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본질을 버리고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채택하게 된 학자들의 긴 행렬에 합류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틀림없이 무어의 작업은 몇몇 주목할 만한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고 끌 것입니다. 그런데 생태적 마르크스주의적 견지에서는 선을 그을 필요가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무어는 반대편으로 이동했고, 그래서 이제는 생태사회주의적 운동과 사회주의(심지어 급진주의) 전체에 대립되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생태사회주의자들은 아일랜드의 심각한 생태적 문제들을 대면했을 때 한 가지 대응책이 존재할 수 있을 뿐이라고 선언한 카를 마르크스를 지지합니다. "폐허 아니면 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