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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역사적 시간의 위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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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6. 27.

 

역사적 시간의 위상학

The Topology of Historical Time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

 

나는 사유의 맥락, 즉 샌더스와 클린턴 사이의 예비 선거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기가 망설여지는데, 왜냐하면 이 글이 정치―특히 민주주의 정치―에 관한 논의가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트라우마와 같은 것을 파악하려고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듭해서 여론 조사는 늙은 세대, 베이비 붐 세대는 클린턴에 경사되고 있는 반면에 젊은 유권자, 밀레니엄 세대는 샌더스에 경사되고 있다. 이것은 다양한 연령의 내 친구들과 논의할 때 처하게 되는 상황이다. 50대 후반과 60대의 늙은 친구들은 압도적으로 클린턴에 끌리는 반면에 동료들과 학생들은 샌더스에 경사된다. 이것은 정치 영역뿐 아니라 철학에서도 경험한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다양한 기회에 철학적 사유 학파들을 둘러싸고 세대들 사이에 벌어진 이런 분열을 목격했다. 첫 번째 그런 경험은 현상학, 해석학 그리고 해체에 맞선 바디우의 등장과 관련이 있었다. 전적으로 새로운 담론이 출현했고, 새로운 경기 규칙이 존재한다는 뚜렷한 느낌이 있었지만, 이전 세대는 새로운 일이 전혀 일어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동일한 방법론들에 따라 속행했다. 나중에 나는 신유물론 및 사변적 실재론과 관련하여 유사한 일을 목격했고 그것에 관여하였다.

 

여기서 나는 어느 편―내 편은 있지만―도 들고 싶지 않은데, 왜냐하면 사회적 시간 또는 역사적 시간의 구조에 관해 생각하려고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경험은 '균열의 현상학(phenomenology of fissure)'을 위한 기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현상학이 생활 세계 또는 우리의 세계 내 존재―우리의 공유된 "해석학적 지평"―에 대한 분석과 씨름하는 반면에 균열의 현상학은 차이와의 만남, 양립 불가능한 세계들과의 만남에서 시작한다. 균열의 현상학은 들뢰즈가 가능한 세계들 또는 발산적 계열들을 가로지르는 근본적인 거리라고 부른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만 감각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세계 또는 벨트(Welt)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동일한 언어를 말하고 명백히 서로에게 이야기하고 있더라도 전적으로 상이한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아무튼 우리는 동일한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이 세계에서는 거리, 즉 공간적 거리가 아닌 그런 거리가 존재한다.

 

<<아메리칸 사이코(American Psycho)>>의 노골적인 영상이 떠오른다. 나는 항상 먼저 영상들에 의거하여 생각한 다음에 점진적으로 상황을 개념적으로 명료화한다. 패트릭 베이트먼(Patrick Bateman)이 골목길을 걸어가다 한 남성 노숙자와 그의 개를 만난다. 그는 그 남자를 도와주려고 하지만 비참하게 저지당한다. "당신과 저는 아무 것도 공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상이한 세계에서 왔습니다. 저는 당신을 이해조차 할 수 없습니다." 상황은 그 노숙자와 그의 개에게 좋지 않게 끝난다. 그것은 완전히 끔찍한, 절대적인 반레비나스적인 순간이다. 이런 두 세계―최소한 베이트먼의 경우에―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무한한 거리가 존재한다. 베이트먼은 자기 앞에 다른 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는 그 거리를 횡단하여 그 세계로 진입할 수 없다. 그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말하고, 동일한 언어로 말하며, 과거에 내가 정신분석을 실행한 피분석자가 서술했듯이, 서로에게 소리를 내고 있지만, 아무튼 그들은 서로에게 말하고 있지 않다. 여기에 한 가지 역설이 존재한다. 그들은 공간적으로 서로 가까이 있고, 동일한 지구 또는 에르데(Erde)에 거주하고 있지만, 동일한 세계 또는 벨트에 거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한다.

 

이제 다른 한 영상, <<제국의 역습>>에 나오는 구름 도시가 떠오른다. 나는 상이한 층위들의 구름에 떠 있는 모든 종류들의 도시들을 상상한다. 그것들은 각각 독자적인 상이한 문화, 상이한 양식, 상이한 리듬이 있다. 우리는 차이나 미에빌(China Mieville)의 <<이중 도시(The City & The City)>>를 상상할 수도 있는데, 이 소설에서는 두 도시가 동일한 공간에 현존하면서 동시에 향유함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존재론적 거리를 향유하고 있다. 그것들은 동일한 지구에 속하지만, 전혀 별개의 세계들이다. <<문명 속의 불만>>에서 프로이트는 이것을 언급한다.

 

자, 이제는 상상력을 한껏 발휘하여, 로마가 인간의 주거지가 아니라 그만큼 길고 풍부한 과거를 가진 정신적 실체 ― 이 실체 안에서 일단 생겨난 것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고 발달의 초기 단계와 나란히 존재한다 ― 라고 하자. 이것은 로마에 황제들의 궁전이 아직도 남아 있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궁전이 아직도 팔라티노 언덕 위에 옛날과 똑같은 높이로 우뚝 서 있고, 산탄젤로 성의 흉벽에는 고트족의 포위 공격을 받을 때까지 성을 장식했던 아름다운 조상(彫像)들이 아직도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오늘날 카파렐리 궁전이 자리 잡고 있는 카피탈리노 언덕에는 주피터 신전이 다시 한 번 들어서게 될 것이다. 제정 시대의 로마인들이 보았던 최후의 모습만이 아니라 최초의 모습으로도. 초기의 주피터 신전은 에트루리아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아, 처마 끝이 테라코타로 장식되어 있었다. 오늘날 원형 경기장이 서 있는 곳에서는 네로 황제의 황금 궁전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판테온 광장에서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남긴 오늘날의 판테온만이 아니라 아그리파가 같은 자리에 세웠던 원래의 건물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교회와 그 토대가 된 고대의 신전이 같은 터에 서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방문객은 시선을 돌리거나 자세만 바꾸면 어느 시대의 풍경도 불러낼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 <<문명 속의 불만>>(김석희 옮김), p. 241]

 

프로이트는 계속해서 이것을 공상적 환상으로 서술하지만, 참으로 이것은 정신적 시간과 사회적 시간이 관련되는 실재이다. 서로 동시에 현존함에도 불구하고 연대기적으로 완전히 구별되는 상이한 시간의 지층들이 있다. 시간을 순차적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지질학적 지층의 견지에서 생각한다면, 아무튼 이전의 지층들이 가장 최근의 지층들과 함께 바로 저기에 있다... 기억의 문제―그렇기도 하지만―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현재와 더불어 현존한다. 다시 말해서, 2016년과 나란히 오늘날 1960년대, 70년대, 80년대 또는 90년대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그들의 구름 도시이고, 그들의 조작적 폐쇄성(자기생산적 술어로 서술하면)이며, 그들의 시간의 얼개 또는 세계를 대면하기의 구조이다. 시간들은 완전히 구별되면서 동시적이다. 나는 서둘러 이런 시간의 고원들 또는 도시들은 연대기적으로 시기가 산정될 수 없다는 점을 덧붙인다. 누군가가 90년대의 도시를 규정하는 시간의 조직 또는 얼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1956년에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다. 1956년에 태어났어도 여전히 2016년이라는 시간의 얼개 또는 구조, 즉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1998년에 태어났어도 여전히 80년대라는 시간의 얼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시간의 심원한 리듬과 누군가가 세계를 대면하는 방식에 관한 문제이다. 그것은 그들 세계의 심원한 구조에 관한 문제이다. 그리고 동시에 현존하는 이런 세계들 전역에 아무튼 여전히 서로 어떻게든 공명하는 조작적 폐쇄성, 닫힌 세계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