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김재인: 오늘의 인용-사회적 하부구조로서의 무의식과 우연의 실천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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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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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는 자연과학을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르크스를 알아야 한다, 헤겔을 알아야 한다, 변증법을 알아야 한다고는 자주 말하는데, 공부를 안 해서 자연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어쩌면 사회에 대해서도,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념적이고 이상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이 가지는, 디딜 수 있는 하나하나의 징검다리가 가지는 기능에 주목하지 않고, 강을 다 건넌 후 저곳의 이상적 상태를 주로 말합니다. 어떻게 건너가느냐가 중요한데, 저기 아름답고 좋은 곳이 있다, 저기에 가야 한다고만 합니다. 그런 점이 바로 관념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때로 불가능한 걸 대안으로 제시하고, 그것 봐라, 이것 안 되지 않느냐, 너희들이 제대로 안 해서 안 되는 것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곤 합니다. 들뢰즈는 이를 '사제 권력' 또는 '사제 심리학'이라고 말합니다. 사제들이 죄를 물을 수 있도록 담론을 구성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에 빠져서 사제에게 예속됩니다. [...] 사제 권력은 남들을 힐난하기 위한, 그래서 자기 스스로 나약해지게 하는, 결국 사제에게 복종하게 하는 다양한 수법을 일컫습니다. [...]

 

[...] 작은 땅뙈기라도 하나 마련해서 공간을 직접 확보했다는 건 아주 중요합니다. 이런 것이 바로 무의식의 구성 작업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곳이 있기 때문에 찾아올 수 있죠. 이 공간은 구체적 하부구조의 일부로 존재합니다. 이것이 무의식입니다. 공간을 이야기할 때, 들뢰즈는 매끈한 공간과 홈 파인 공간을 언급합니다. [...] 우리는 공간에 파인 홈으로만 다닐 수 있습니다. 도로가 대표적이죠. 우리가 정해진 대로 다니는 이유는 도로가 그렇게 나 있기 때문입니다. [...] 길을 어떻게 내느냐, 공간을 어떻게 구성하느냐 등이 무의식을 건설하는 과제입니다. 매끈한 공간이라면 아무데로나 다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 의지로 많은 것을 결정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주어진 물리적, 물질적 조건과 환경에 의해 대부분이 결정되며, 생각하고 행동할 때 한 숟가락 얹는 식으로 자기 결정을 보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물론자로서 우리는 몸 하나 눕히는 작은 땅뙈기, 즉 영토를 건설하고, 동시에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이동해서 또 다른 영토를 건설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영토 건설과 탈영토화를 반복하는 삶, 이것이 사실 무의식 이론입니다.

 

[...] 우연을 긍정한다는 것[은] 시도를 자꾸 해 본다는 것이고, 실험을 해서 그 결과를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실패를 긍정하자는 게 아니라, 현실 속에서 실제 해 보았다는 사실 자체를 직시하고, 다시 손대서 수선할 게 무엇인지를 찾는 일입니다. 계속되는 실험이지, 실패를 받아들이고 끝내자는 이야기가 절대로 아닙니다. 실패와 약간의 성공, 실패와 약간의 성공… 이런 것이 이어지는 과정을 살아가자는 겁니다. '운명애(amor fati)'라는, 스토아학파에서 유래하고 니체가 좋아했던 개념을 들뢰즈는 실천철학의 핵심으로 삼습니다. [...]

 

실패란 처음에 의도한 목표와 내가 노력해 생겨난 결과가 어긋날 때, 목표에 이르지 못했을 때를 가리킵니다. 그 어긋남 때문에 사람들은 좌절하고 후회합니다. 후회는 결과에 비추어서 노력을 평가하려 할 때 생깁니다. [...] 하지만 결과란 나의 노력과 우주의 조건이 어우러져서 생겨나는 법입니다. 내 노력이 바라던 결과를 낳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목표를 향한 노력이 원하는 결과를 낳지 않는 것이 존재론적 조건 아래에서는 오히려 정상입니다. 차라리 실패가 정상 상태라고 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노력하는 순간에 집중해야 합니다. 노력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결과가 나쁠지라도 최대한 노력하는 겁니다. [...] 노력과 결과를 분리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야 합니다. 노력은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무조건 수용하기. 이런 것의 연속이어야, 이것이 삶이어야 하는 게 '운명애'의 진짜 의미입니다. 숙명론과는 다릅니다. 삶의 경로와 결과가 모두 미리 정해져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

 

삶의 과정에 개입하는 수많은 우연은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우연을 제거하고픈 욕심이 생깁니다. 하지만 우연의 제거는, 우주의 원리라고 할 수 있는 우연을 제거하는 것은 관념적으로만 가능합니다. 우연을 통제하려니까 원치 않더라도 결국 관념론으로 가는 겁니다. 아니면 초월적 존재를 끌어들여서 잘 조정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등장하는 것이기도 하죠. 그렇게 해서 관념론과 초월성이라는 적이 계속 끼어듭니다. 그런데 들뢰즈는 그것들을 철저히 제거하는 방식으로 실천철학을 구성합니다. 강령 없이 실천한다는 게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고 해야 합니다. 세계사가 우연의 개입을 통해 만들어졌는데, 강령을 제시해서 어쩌자는 겁니까? 우연을 통제해 보겠다는 관념론적 시도에 지나지 않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실패가 예정된 불가능한 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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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인, <<혁명의 거리에서 들뢰즈를 읽자>>(2016), pp. 1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