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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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디 루커: 오늘의 에세이-트랜스리얼리즘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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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0. 22.

 

트랜스리얼리즘 선언

A Transrealist Manifesto

 

―― 루디 루커(Rudy Rucker)

 

이 글에서 나는 내가 트랜스리얼리즘으로 부르는 과학소설 글쓰기의 한 양식을 옹호하고 싶다. 트랜스리얼리즘은 과학소설의 한 유형이라기보다는 아방가르드 문학의 한 유형이다. 나는 트랜스리얼리즘이 역사상 이 시점에서 문학에 대한 유일한 타당한 접근 방식이라고 느낀다.

 

트랜스리얼리즘 작가는 어느 환상적인 방식으로 직접적인 지각에 관한 글을 적는다. 현실적 실재와 관련되지 않은 어떤 문학도 약하고 무기력하다. 그러나 단순한 리얼리즘의 장르는 전적으로 소진된 상태이다. 누가 단순한 소설을 더 필요로 하는가? 환상소설과 과학소설의 도구는 리얼리즘 소설을 흥미진진하게 하고 심화시키는 수단이다. 환상적인 장치를 사용함으로써 서브텍스트를 조작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 과학소설의 친숙한 도구―시간 여행, 반중력, 대안 세계, 정신 감응 등―는 사실상 원형적 지각 양태를 상징하는 것이다. 시간 여행은 기억이고, 비행은 계몽이고, 대안 세계는 매우 다양한 별개의 세계관을 상징하며, 정신 감응은 완전히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나타낸다. 이것이 "트랜스" 양상이다. "리얼리즘" 양상은 유효한 예술 작품은 세계를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방식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트랜스리얼리즘은 직접적인 실재뿐 아니라 생명이 묻어 들어가 있는 고차원의 실재도 다루려고 한다.

 

등장 인물은 실제 인간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표준적인 장르 소설을 매우 진부하게 만드는 것은 등장 인물이 몹시 명백하게도 저자 의지의 꼭두각시라는 점이다. 행위는 예측 가능해지며, 그리고 대화 중에 어느 등장 인물이 말하기로 되어 있는지 판별하기 어렵다. 실제 삶에서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은 여러분이 원하거나 기대하는 것을 거의 말하지 않는다. 오랜 멍 투성이의 접촉으로부터 여러분은 머리 속에서 주변 친지에 관한 시뮬레이션을 수행한다. 이런 시뮬레이션은 외부로부터 여러분에 부과되는데, 그것은 여러분이 바라는 대로 상상된 상황에 반응하지 않는다. 이 시뮬레이션이 여러분의 등장 인물을 움직이게 함으로써 여러분은 기계적인 희망 충족으로 판명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실제 사람과 마찬가지로 등장 인물이 어떤 의미에서 통제를 벗어나 있는 것이 필수적이다. 지어낸 사람에 관해 읽음으로써 무엇에 대해 알게 될 수 있는가?

 

트랜스리얼리즘 소설에서 저자는 일반적으로 실제 등장 인물로 나타나거나, 아니면 그의 인격은 여러 등장 인물 사이에 분할된다. 표면상 이것은 자기중심적인 듯 들린다. 그러나 나는 자신을 등장 인물로 사용하는 것은 결코 자기중심적이지 않다고 주장하곤 한다. 그것은 필요한 것일 뿐이다. 사실상 여러분이 직접적인 지각에 관한 글을 적고 있다면, 자기 관점 외에 어떤 관점이 가능한가? 이상화된 판본의 자신, 환상 자아를 사용하고 이 의사 자아로 하여금 일단의 유순한 노예들에게 자기 의지를 퍼붓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자기중심적이다. 그리고 트랜스리얼리즘 주인공은 어떤 초인간으로 현시되지 않는다. 트랜스리얼리즘 주인공은 우리 각자가 스스로 인식하고 것과 꼭 마찬가지로 신경 과민의 무력한 사람이다.

 

트랜스리얼리즘 예술가는 자기 작품의 완성된 형태를 예측할 수 없다. 트랜스리얼리즘 소설은 생 자체와 마찬가지로 유기적으로 성장한다. 저자는 등장 인물들과 환경을 선택하고, 이런저런 특수한 환상적 요소를 도입하며, 어떤 핵심 장면들을 겨냥할 수 있을 뿐이다. 이상적으로, 트랜스리얼리즘 소설은 애매한 상태에서 그리고 아무 개요도 없이 쓰여진다. 저자가 자기 책이 어떻게 전개될지 정확히 알고 있다면, 독자는 이것을 꿰뚫어 볼 것이다. 예측 가능한 책은 아무 재미도 없다. 그럼에도 책은 정합적이어야 한다. 생은 흔히 터무니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무 줄거리도 없는 책은 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 독자도 없는 책은 전적으로 유효한 예술 작품인 것은 아니다. 아무 개요도 없는 그런 책을 쓰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미로를 그리는 것에 비유된다. 미로를 그릴 때에는 출발점과 어떤 목적지(핵심 장면)들이 있다. 훌륭한 미로는 추적자로 하여금 정합적인 방식으로 모든 목적지를 지나가게 만든다. 미로를 그릴 때 여러분은 어떤 경로로 출발하지만, 다른 경로들이 걸릴 수 있는 여지를 많이 남겨 둔다. 정합적인 트랜스리얼리즘 소설을 쓸 때 여러분은 텍스트 전체에 걸쳐서 수많은 뜻밖의 우연한 사건들을 포함시킨다. 여러분이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들을 포함시킨다. 나중에 여러분은 갈라지는 서사의 줄기들이 이런 마디들에 걸리도록 뒤로 구부린다. 어느 주어진 줄기 고리에 대해 아무 마디도 이용할 수 없다면, 여러분은 되돌아가서 마디를 적는다(미로에서 한 조각의 벽을 제거하는 것을 참고하라). 독서는 선형적이지만, 글쓰기는 그렇지 않다.

 

트랜스리얼리즘은 혁명적인 예술 형식이다. 대중의 사고 통제에 있어서 주요한 도구는 합의적 실재에 관한 신화이다. 이 신화와 나란히 가는 것은 "보통 사람"이라는 관념이다.

 

보통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데, 그저 여러분의 친지, 여러분이 가장 잘 알게 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라. 그들은 모두 표면 아래 어떤 층위에서 기묘하다. 그런데 통상적인 소설은 매우 일반적으로 보통 세상의 보통 사람들을 보여준다. 자신이 유일한 기묘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품고서 작업하는 한, 여러분은 약하고 변호해야 하는 느낌이 든다. 여러분은 기성 체제에 동조하기를 열망하고, 그래서 파문을 일으킬까 봐 약간 무서워하는데, 발각되지 않더라도 말이다. 실제 사람들은 기묘하고 예측 불가능한데, 이런 이유 때문에 대중 문화의 극단적으로 좋고 나쁜 종이 인형들 대신에 그들을 등장 인물로 사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합의적 실재의 파괴라는 착상은 훨씬 더 중요하다. 이것이 과학소설의 도구가 특히 유용한 지점이다. 각 마음은 그 자체의 실재이다. 사람들이 6:30 뉴스의 실재성을 믿도록 기만당할 수 있는 한, 그들을 양처럼 떼짓게 할 수 있다. "대통령"은 "핵 전쟁"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죽음"의 두려움에 의해 제 정신이 아니게 된 우리는 "소비재를 구매하"기 위해 서두른다. 정말로 일어나는 일은 여러분이 TV를 꺼고, 무언가를 먹으며 그리고 산책을 간다는 것인데, 무한히 많은 사유와 지각이 무한히 많은 입력과 뒤섞이게 된다.

 

언제나 과학소설 장르의 도피 문학을 위한 여지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심하게 한정된 반동적인 이 양식이 우리 글쓰리를 조건짓게 할 이유가 전혀 없다. 트랜스리얼리즘은 참으로 예술적인 과학소설에 이르는 경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