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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모 피글리우치: 오늘의 에세이-생물학적 플라톤주의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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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0. 24.

 

생물학적 플라톤주의에 반대한다

Against biological Platonism

 

―― 마시모 피글리우치(Massimo Piggliuchi)

 

이 블로그의 제목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나는 내가 "형상"이라는 원래 관념에서 수학적 변양태에 이르기까지 어떤 형태의 플라톤주의도 거부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것은 지금까지 내가 꽤 고찰한 것이고, 긍정적 입장에서 부정적 입장으로 내 마음을 바꿔버린 그런 사례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물론 나는 형이상학자도 아니고 수리철학자도 아니며, 그래서 이 분야에서 내 의견은 두 분과학문의 일반적인 배경을 갖춘 과학자이자 철학자의 의견일 뿐이다.

 

그럼에도, 내가 더 많은 전문성을 주장할 수 있는 다른 한 유형의 플라톤주의가 있는데, 그것은 안드레아스 바그너(Andreas Wagner)의 생물학적 플라톤주의이다. 여러 해 동안 나는 안드레아스를 알고 지냈고(우리는 두 번 만났지만, 나는 그의 생물학 관련 글에 매우 친숙하다), 그래서 아무 망설임도 없이 그가 현존하는 가장 흥미롭고 도발적인 이론 발달생물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2015년에 그는 <<이온(Aeon)>> 지에 "플라톤적 형상의 도서관이 없다면 진화는 작동하지 못할 것이다(Without a library of Platonic forms, evolution couldn't work)"이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발표했다. 내 생각은 좀 다르며, 이 에세이에서 그 이유를 설명할 것이다.

 

안드레아스는 생물학적 분류의 기초 단위는 종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친척, 즉 과학적으로 판 트로글로디테스(Pan troglodytes)로 알려진 침팬지와 구별되는 호모 사피엔스(Homo spiens)라는 종에 속한다. [...]

 

생명체의 분류학적 위계에서 종이 하위 층위(아종, 인종) 및 상위 층위(속, 과, 목 등)보다 더 중요한 층위라는 것은 참이고, 린네(Linnaeus) 이래로 지금까지 그러했다. 그러나 "상자"(종)와 "위계"에 관해 너무 견고한 방식으로 말할 때 안드레아스는 현대 생물학의 주요 경로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1960년대 이래로 줄곧 현대 분류학은 분지분류학적 접근 방식으로 알려져 있는 것―생물학적 형태들을 린네 상자들에 [...] 사실상 대응하지 않는, 포개어진 매우 많이 분지하는 나무들로 조직하는―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것은 사리에 맞는데, 진화는 분류학을 이른바 우표 수집보다 훨씬 더 힘든 것으로 만드는 모든 종류의 패턴과 차이를 만들어내는 연속적인 과정이다.

 

그러므로 안드레아스가 종의 "본질"에 관해 말하고 그 개념을 플라톤주의와 직접 관련시킬 때 상황은 훨씬 더 기묘하다. "분류학의 작업은 힘들 것이지만, 각 종이 독자적인 플라톤적 본질에 의해 구별된다면 해낼 수 있는 것이 된다. 예를 들면, 무족의 몸체와 유연한 턱은 다른 파충류의 본질과 상이한 뱀의 본질의 일부일 것이다. 과업은 종의 본질을 찾아내는 것이다. 사실상 플라톤주의자들의 세계에서 본질이 실제로 종이다. 뱀이라는 것은 뱀의 형상의 일례일 뿐이다."

 

그렇지 않다. 확실히 그렇지 않다. 우선 현대 생물학은 "본질"에 관한 어떤 담론도 거부한 지 오래 되었다. 사실상 다윈 자신은 종 반실재론자로 불릴 것인데, 왜냐하면 그는 종이란 어떤 더 깊은 형이상학적 실재의 반영물이 아니라 인간들에 의해 편의상 설정된 자의적인 경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충분히 확실하게도, 생물학자들은 여전히 종에 대한 보편적 정의에 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데[...], 한 가지 좋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예컨대, 박테리아의 한 "종"은 식물의 한 종과 어쨌든 아무 관계도 없고, 후자는 무척추 동물의 한 종과 유사성이 거의 없으며, 후자는... 이제 여러분도 이해하게 된다.

 

둘째, 그렇지 않다. 뱀은 "뱀의 형상의 일례일 뿐"인 것으로 합당하게 간주될 수 없다. 그것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이런 형상들을 어떻게 연구하는가? 그것들은 어디에 있는가?), 진화라는 관념 전체와 심각한 긴장 관계에 있는 사태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뱀은 백악기에 굴을 파고 사는 도마뱀에서 진화되었을 개연성이 높은 일단의 파충류 동물이다. 이것은 뱀이 처음에는 이족 단계[...], 또는 뒷다리는 갖추고 있지만 골반 뼈와 척추가 서로 연결되지 않은 종 단계[...]를 거침으로 이른바 플라톤적 형상을 점진적으로 획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현재 뱀의 후예에 대해 어떤 미래 진화가 저장되어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어느 진화적 과정의 플라톤적 종점을 아무튼 나타낸다고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아무 근거도 없다.

 

물론 안드레아스는 이런 종류의 반대 의견을 인식하고 있고, 그래서 실제로 이른바 "뱀형 도마뱀", 즉 뱀과 구별할 수 없지만 수많은 다른 해부학적 특질에 의거하여 도마뱀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되는 무족의 도마뱀을 거론한다. 또한 그는 퇴화한 뒷다리를 갖춘 백악기 "뱀"을 언급한다. 바로 이런 사례들 때문에 20세기의 유명한 진화생물학자 에른스트 마이어(Ernst Mayr)는 플라톤을 "진화주의의 위대한 반영웅"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안드레아스는 플라톤이 최종 결정권을 갖고 있고, 우리는 정말로 더 깊이 팔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그렇지만 그의 첫번째 움직임은 기묘하다. 그는 현대 유전학을 확립한 멘델의 작업을 재발견한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다윈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생물학자 위고 드 브리스(Hugo De Vries)의 1905년 발언을 인용한다. 드 브리스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자연 선택은 적자의 생존은 설명할 수 있지만, 적자의 도래는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이 기묘한 까닭은 유전학과 다윈주의의 조화가 20세기 생물학의 최고의 성취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인데, 그것은 공동 유래, 자연 선택, 돌연 변이와 재조합이라는 관념들을 진화의 작동 방식에 관한 일반적인 수학적 이론에 편입시키는 이른바 현대적 종합, 즉 다윈의 통찰의 복잡한 표명 형식을 취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드 브리스에 다시 귀를 기울이는 것은 난감한 일이다.

 

저해받지 않은 안드레아스는 그가 "문제"라고 부르는 것(그리고 나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을 명료화하기 위해 한 가지 은유를 도입한다. 추정컨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로부터 영감을 얻은 그는 우리로 하여금 영어 알파벳 문자들의 모든 가능한 순열을 포함하는 거대한 도서관을 상상하도록 요청한다(특정한 언어는 실제로 중요하지 않다). 도서관의 대부분 책들은 터무니 없지만, 때때로 셰익스피어의 작품 또는 다윈의 <<종의 기원>>의 정확한 사본을 찾아낼 것이다. 그렇지만 무작위적으로 책을 집어든다면, 가치 있는 것을 마주칠 확률은 매우 작다.

 

대신에 DNA의 모든 가능한 순열을 포함하는 도서관을 상상한다면, 그것은 결코 작동하지 않을 다발뿐 아니라 작동하는 모든 단백질을 서술할 것이다. 의문을 이렇다. 돌연 변이는 무작위적이기 때문에 가능한 형태들의 매우 엄청나게 방대한 도서관에서 자연 선택이 나아갈 길을 어떻게 "알게" 되는가?

 

그 은유를 전개하면서 안드레아스는, 이웃하는 책들이 텍스트의 일부를 변화시킬 것이지만 원래 의미를 유지하도록 책들이 배치된다면 영어 텍스트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웃하는 책들 가운데 일부는 사리에 맞는 영어로 여전히 읽힐 수 있는 한편으로 사실상 어느 낱말의 의미를 변화시키는데, 예를 들면 GOLD가 MOLD로 바꾸는 "돌연 변이"가 있다.

 

안드레아스는 도서관의 유전체적 등가물이 동일한 방식으로 배열되는 것으로 간주하는데,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그래서 치명적일 한 다발의 순열을 가로질러 거대한 도약을 할 필요가 없이 도서관 전체를 횡단할 수 있도록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 단백질을 유지하는 모든 DNA 순열 또는 기능성을 유지하는 한편으로 단백질의 아미노산을 변화시키는 모든 순열이 단일한 단계들로 연결되어 있다.

 

그는 덧붙인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강하게 이 주장을 제시할 것이다. 의미가 같은 텍스트들, 즉 언제나 변화하는 문자열들로 정확히 동일한 기능을 표현하는 유전자 집합들의 이런 경로들이 없다면, 무작위적인 변이를 통해서 새로운 혁신을 계속해서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진화는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자연 선택이 진입하는 지점이다! 돌연 변이는 자체의 적응도 값에 대해 무작위적인 과정인 반면에, 자연 선택은 결코 무작위적인 과정이 아니라, 가치 있는 돌연 변이를 통계적으로 선택하여 개체군의 유전자 풀에 간직하는 동시에 상당히 유해하거나 치명적인 것으로 판명되는 어떤 돌연 변이도 제거하는 과정이다. 즉, 자연 선택은 도서관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개체군의 작업이고, 그래서 그것은 진화적 변화를 낳는 무작위적인 과정(돌연 변이)과 무작위적이지 않은 과정(선택)의 조합이다. 여기에는 어떤 불가사의도 없는데, 지금까지 대략 1세기 동안 전혀 없었다.

 

안드레아스는 자연 선택이 도서관을 가로지르는 길을 찾아낼 수 있는 방식보다는 다른 한 의문에 당황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 자연의 도서관과 사방으로 뻗어있는 연결망들이 생명의 진화 능력을 설명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다. 그런데 그것들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뱀형 도마뱀이나 그것의 해부학에서 그것들을 볼 수 없다. 그것들은 생명의 가시적 표면 근처에도 없으며, 이 표면 아래 생명의 조직과 세포의 구조에도 없다. 그것들은 생명의 DNA의 미시구조적 구조에도 없다. 그것들은 개념들, 수학자들이 탐구하는 그런 종류의 추상 개념들의 세계에 현존한다. 그것이 아무튼 그것들을 덜 실재적인 것으로 만드는가?"

 

물론 그렇다. "실재적"이라는 낱말이 문제가 되는 열들이 어떤 종류의 실체적 존재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들은 명백히 표준적인 4차원 시공간은 아닐지라도 어딘가에 "현존한다". 그런데 그곳이 아니라면 어디에? 추상 개념 또는 가능성이 "현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들은 수학적 플라톤주의자들이 직면하는 바로 그런 의문들이고, 그래서 생물학적 플라톤주의―수학적 플라톤주의와 마찬가지로―는 아무것도 현존하지 않는 문제를 불러낸 다음에 결코 어떤 해답도 아닌 해답을 제시하는 듯 보일 뿐이다.

 

논증이 약하더라도 여전히 유명 인사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에 의지할 수 있는데, 그것이 안드레아스도 굴복한 유혹이다. "오스트리아인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더불어 수학적 진리는 인간의 발명품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플라톤과 더불어 우리의 가시적 세계는 더 높은 진리의 희미한 그림자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 가운데 수학의 노벨 상에 해당하는 필즈 메달을 수상한 찰스 페퍼먼(Charles Fefferman)을 비롯하여 많은 수학자와 물리학자가 있다. 페퍼먼은 획기적인 수학적 업적을 이루었을 때 겪은 경험을 이렇게 표현했다. '경이를 촉발하는 것이 존재한다. 당신이 창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언제나 존재하고 있어서 인간이 창조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있다.' 물리학에서 노벨 상 수상자 유진 위그너(Eugene Wigner)는 그것을 "수학의 터무니없는 유효성"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사실상, 뉴턴의 중력 법칙이 왜 그것을 촉발했었을 낙하하는 사과보다 훨씬 더 많은 경우에 적용되어야 하는지, 그것이 왜 부착된 행성들에서 태양계 전체와 회전하는 은하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서술해야 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 외에도 그렇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실재는 어떤 수학적 공식들을 준수하는 듯 보인다."

 

좋다. 이것을 분쇄하자. 우선, 저명한 과학자 또는 수학자 또는 철학자에 의한 모든 친플라톤주의적 인용문에 대해 동일한 수준의 회의주의자에 의한 마찬가지로 공격적인 반대 인용문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 둘째, 뉴턴의 법칙은 사실상 틀린 것인데, 그래서 그것을 일례로 사용하는 것은 약간 당혹스럽다. 그것은 일반 상대성의 근사 이론인 것으로 판명되는데, 어떤 특정한 환경에서만 유효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일반 상대성도 어떤 의미에서 틀린 것이거나 불완전한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 셋째, 실재는 수학적 공식들을 "준수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학적 공식들은 실재를 다소간 정확하게 서술하는 인간의 발명품이다.

 

이것은 나로 하여금 누구보다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 의한, 위에서 언급된 반플라톤주의적 인용문들 가운데 하나로 결론을 짓게 한다. "결국 경험과 독립적인 인간 사유의 산물인 수학이 대단히 경탄할 정도로 실재의 객체들에 적합하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 내 생각에는,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히 이렇다. 수학의 법칙들이 실재를 가리키는 한, 그것들은 확실하지 않다. 그것들이 확실한 것인 한, 그것들은 실재를 가리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