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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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튼 클락: 오늘의 인용-정동과 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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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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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정동(affect)은 흔히 정서(emotion)와 융합되었지만, 정동은 정서가 아니다. 강도(intensity)로도 알려져 있는 정동은 "항상 의식적 각성에 앞서거나 그것의 바깥에" 있는[...] 반면에, 체계 이론적 견지에서 정서는 의식적으로 관찰 가능하다. 정동은 피부 전도 반응을 통해서 탐지될 수 있다.

 

정서는 유의미한 경험으로 번역된 정동으로 부를 수 있는데, 또한 그것은 어느 서사의 플롯 라인 위에 놓여질 수 있거나 선형적 인과성의 시각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경험일 것이다. 정서는 자기 관찰을 통해서 생성되지만, 정동은 환경 속 무언가에 대한 자율적인 신경 체계적 반응이고, 그래서 정동은 자기 관찰에 앞서 일어나거나 그것의 바깥에서 일어난다. 정동은 매우 빨리 일어나서 서사적 플롯 라인에 놓여질 수 없는데, 그것은 인과적 관계의 바깥에서 일어난다. 체계 이론적 견지에서 인간 경험은 유기적 체계, 심리적 체계 그리고 사회적 체계 속에 묻어 들어가 있다. 그러므로 정동이 "항상 의식적 각성에 앞서거나 그것의 바깥에" 있다면[...], 이것은 정동이 심리적 체계에 의해 관찰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정동은 심리적 체계의 자기 관찰에 의해 생성되지 않는데, 그것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차이를 포함하는 심리적 체계의 구별짓기에 의해 걸러지지 않는다. 정동은 정서로 번역된 것으로서 "외부로부터" 관찰될 수 있을 뿐이다.

 

정동이 아니라 정서가 심리적 체계에 의해 관찰되며, 그리고 흔히 사회적 체계에 의해서도 관찰된다. 유기적인 생리학적 몸은, 잔뜩 흐린 하늘의 시각과 차가운 공기의 지각처럼, 자체 환경 속의 무언가에 의해 교란받게 되며, 그리고 그 다음에 의식은 슬픔의 정서를 경험(관찰)할 것이다. 또는 어느 기대가 어긋나서 슬픔을 낳을 수 있다. 어떤 경우든 정서는 하나의 선택, 정동적 복잡성의 축소이다. 다시 말해서, 정서는 관찰하는 체계에 의해 구성된다. 정동은 너무 복잡하여 심리적 체계나 사회적 체계에 의해 관찰될 수 없다. 그런 복잡성은 선택을 통해서 축소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정서는 필연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우발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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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튼 클락(Carlton Cl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