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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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시타 나츠: 오늘의 인용-음악은 경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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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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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한 명 한 명에게 어울리는 장소가 있듯이 피아노 한 대 한 대에도 어울리는 장소가 있다. 콘서트홀의 피아노는 당당하고 반짝이며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서 우리를 매료한다.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러나 가장 아름답다는 말을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그 소리가 최고라고 누가 결정할 수 있을까.


얼마 전에 만난 그 청년을 종종 떠올렸다. 트레이닝복을 위아래로 입고 시선을 맞추려고 하지 않았던 청년. 아무도 그의 피아노를 듣지 않는다. 그도 다른 누군가를 위해 연주하지 않는다. 청중의 유무는 그때 그에게 문제가 아니었다. 닫혔던 마음이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차츰차츰 열렸다. 커다란 강아지와 어울려 놀며 즐거워했다. 흥겨움 혹은 기쁨과 같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즐거움을 그가 구현해주었다.


하지만 홀에서는 무리이다. 그 피아노는 그 집에서, 그 청년이 연주하기 위해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런 은밀한 즐거움은 홀에서 맛볼 수 없다. 강아지 냄새를 맡는 것처럼,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는 것처럼 맛보는 피아노. 그것 역시 하나의 뛰어난 음악 형태이다.


청년이 어떤 사람에게 피아노를 배웠는지 알 것 같았다. 또 청년이 어떤 식으로 가르침을 받았을지도. 음악은 인생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다. 절실히 느꼈다. 절대 누군가와 경쟁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경쟁하더라도 승부는 이미 결정되었다. 음악을 즐긴 사람의 승리다.


홀에서 많은 사람과 함께 듣는 음악과 최대한 가까이에서 연주자의 숨결을 느끼며 듣는 음악은 비교할 대상이 아니다. 어느 쪽이 좋고 어느 쪽이 뛰어난지의 문제가 아니다. 양쪽 다 음악의 기쁨이 깃들어 있지만 느껴지는 감촉이 다르다. 아침 해가 떠오를 때 느낄 수 있는 이 세상의 빛과 저녁 해가 질 때의 빛에 우열을 매길 수 없는 것과 같다. 아침 해도 저녁 해도 똑같은 태양인데 단순히 아름다움의 형태가 다른 것 아닐까?


비교할 수 없다. 비교할 의미도 없다. 여러 사람에게 가치가 없는 것도 어떤 한 사람에게는 소중한 것이다.


일류 피아니스트에게 내가 조율한 피아노를 연주하게 하고 싶다. 그런 마음이 콘서트 튜너를 목표로 하게 해준다면 내 목표는 그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콘서트 튜너는 내 목표가 아니다.


지금 단계에서 이렇게 정해버리는 것은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앞으로 몇 년쯤 더 경험을 쌓고 수행을 거듭하고 연마해도 콘서트 튜너가 되는 사람은 극소수, 행운이 따르는 극소수뿐이다. 지금부터 그 길을 부정해버린다면 도피하는 것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래도 조금씩 보였다. 음악은 경쟁이 아니다. 그렇다면 조율사도 그렇다. 조율사의 일은 경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목적으로 삼은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한 가지 장소가 아니라 한 가지 상태가 아닐까.


'밝고 조용하고 맑고 그리운 문체. 조금은 응석을 부리는 것 같으면서 엄격하고 깊은 것을 담고 있는 문체. 꿈처럼 아름답지만 현실처럼 분명한 문체.'


수없이 읽고 또 읽어 암기해버린 하라 다미키의 문장을 떠올렸다. 문장 자체도 아름다워서 입으로 말하면 기분이 밝아진다. 내가 조율하면서 목표로 삼는 지향점을 이 이상으로 잘 표현해주는 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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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야시타 나츠, <<양과 강철의 숲>>(이소담 옮김, 예담, 2016), ebook, pp. 249-252/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