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장바티스트 구리나-오늘의 인용-스토아주의가 남긴 것

댓글 0

카테고리 없음

2017. 1. 13.


"

스토아주의의 본질로부터 떨어지지 않고 머물러 있는 것들은 바로 그 도덕적 결론들이라 하겠다. 도덕에 있어서 스토아주의자들은 인간 삶의 목적이 본성에 부합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인간의 고유한 개별성을 지지하는 것이 헛되다고 생각하거나, 그것을 보편적인 관점에 종속시키는 것을 받아들인다. 이는 분명 스토아주의자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확신, 즉 우리 자신은 이 세계와 비교하여 거의 아무런 중요성도 없으며, 일상의 좋은 것들은 우리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기에 부서지기 쉽고 무관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짐으로써 삶의 시험을 견뎌내는 것이다. 스토아주의자들은 유일한 좋음이 내 방식대로 생각하고 행하는 것일 뿐이라고 믿는다. 나머지 것들은 내가 그 주인이 아닌 이상, 나와 무관할 뿐이다. 적어도 이 역시 하나의 이론적 논제로서, 이 논제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그 영혼을 평화롭게 하는 기능을 목적으로 한다. 만일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건강하지 못할 때 불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만일 내가 '중요한 것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 경우 나는 어떤 상황에 놓이든지 반드시 행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갖는 고유한 일관성 속에서 어떤 종류의 만족감, 어떤 종류의 위안을 느끼게 될 것이다. 스토아주의자들은 무관한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은 건강처럼 선호할 만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또 그들은 건강한 상태가 아픈 것보다 낫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철학은 우리에게 질병과 죽음을 견디는 수단들을 제공하고자 모색한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철학이 그렇듯이, 그들의 철학 역시 그것들을 피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스토아주의는 희망 없는 인내다"라는 라이프니츠의 말이 옳다면, 그렇다면 스토아주의는 여전히 살아 있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

―― 장바티스트 구리나, <<스토아주의>>(김유석 옮김, 글항아리, 2016), pp. 1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