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크리스토퍼 비테일: 오늘의 인용-범신론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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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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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관한 그런 본원적으로 내재적인, 관계적인 그리고 연결망적인 시각이 수백 년 동안 서양 철학과 과학을 괴롭힌 물화적이고 위계적인 이진적 분리와 이원론으로부터 해방되고 있는 많은 까닭이 있다. 왜냐하면, 르네 데카르트의 시대 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주장했듯이, 마음과 물질이 본원적으로 다르면 마음과 물질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또는 마음이 어떻게 물질에서 비롯될 수 있는지 말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렇지만 마음이 온갖 물질의 내부에 존재하는 어떤 기본적인 느낌 형식으로 간주된다면, "사유"라는 관념 또는 "마음"이라는 관념은 물질이 주변 세계와 관련하여 자체를 느끼는 방식을 복잡화할 때 일어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렇다면 관념은 우리가 우리 뇌를 느끼는 방식일 것이고, 감정은 우리 뇌가 그것이 우리 몸과 갖는 관계를 느끼는 방식에 대한 느낌의 모양일 것이며, 그리고 감각은 우리 뇌가 우리 몸을 느끼는 방식에 대한 느낌의 모양일 것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마음과 물질 사이의 확고한 분리를 믿을 필요도 없고, 인간이나 생명조차도 매우 특별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세계 자체와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것으로 가정할 필요도 없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가리키는 바는 우리가 뇌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뇌가 자체의 맥동하는 살을 주름잡는 패턴들 속에 내재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유하게 인간적인 것, 우리를 세계의 연결망들로부터 근본적으로 분리시키는 것을 상정할 필요가 사라진다.


처음에는 이것이 무서운 듯 보일지라도, 그것은 잠재적으로 해방시키는 것으로도 간주될 수 있다. 그것 덕분에 인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모든 것도 온갖 것 속에서 더 단순한 형식으로 현존할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시각에서 바라보면 세계는 전적으로 다른 듯 보일 것인데, 왜냐하면 "마음"이 어떤 형언할 수 없거나 마법적인 성질이라기보다는 물질이 내부로부터 갖는 어떤 느낌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뇌는 알려진 가장 복잡한 형태의 역동적인 물질이기 때문에 알려진 가장 복잡한 유형들의 경험을 겪지만, 세계의 나머지 부분의 질료와 근본적으로 상이한 질료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바라볼 때, 지금까지 대부분의 서양 기획을 지배한 이원적 균열들은 자체 아치의 갓돌, 즉 인간 경험의 고유성이 우리의 세계관들에 있어서 중심적 위치에서 제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낼 것이다. 영원한 "영혼"을 가정할 필요가 없고, 이것을 부여하거나 보장하는 데 필요한 어떤 초월적 "신"도 가정할 필요가 없는데, 그것은 내부와 외부로부터 자체를 느끼는, 복잡성의 정도가 다양한 연결망일 뿐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격하시키지만, 그 과정에서 단계적으로 복잡화하는 경험의 연결망들의 전체 세계를 얻게 되며, 그리고 물질과 마음, 마음과 신 사이의 급진적인 도약에 대한 감각 대신에 우리로 하여금 전통적인 한정된 보고뿐 아니라 분화하는 정도와 형식들의 도처에서 경이를 볼 수 있게 하는 복잡화의 단계들을 갖게 된다.


단순한 물질론이라기보다는 이런 전개에 의해 개방된 시각 덕분에 우리는 세계와 세계 속 만물을 복잡한 연결망 구성의 결과로 간주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마음에 대한 잠재력이 신경 세포들, 본질적으로 살아 있는 전선들의 연결망 구성의 결과일 뿐이고, 신경 세포 자체가 물질과 에너지의 역동적인 연결망 구성의 결과이며, 물질과 에너지 자체가 양자 사건들의 연결망이라면, 이것은 인간 경험에 대한 잠재력과 우리가 지금까지 느끼거나 심지어 꿈을 꾼 모든 것이 사물들의 정체가 아니라 사물들이 얽혀 있는 방식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무언가가 무엇인지와 그것이 무엇을 행할 수 있는지는 그것이 분자에서 정서와 사유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사이의 모든 것을 어떻게 연결망으로 구성하는지에 의해 결정된다. 인간의 마음이 물질의 연결망 구성에 의해 산출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알게 된 여타의 것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그런 시각에서 바라보면, 우리 세계의 모든 양상은 자체의 내부에서 그리고 자체로부터 창발에 대한 무한한 잠재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데, 비록 이것은 오로지 복잡한 강건한 연결망 구성에 의해 펼쳐질 수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그런 견해의 몇 가지 놀라운 결과가 존재한다. 왜냐하면 돌과 같은 무생물들도 주변 세계를 어떤 식으로 경험하거나 "느낄" 것인지 여부를 궁금해하기 시작해야 할 것이기 때문인데, 비록 이런 "느낌"이 가장 기본적인 유기체들의 느낌보다 훨씬 더 일반적이고 단순한 방식으로만 이루어질 것이며,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며 바로 이런 느낌의 과정에 불과할 것일지라도 말이다. 즉, 어느 수소 원자는 자체의 맥락을 느끼는 수소 같은 방식의 양상일 것이고, 그래서 수소"이다"라는 것이 사실상 어떤 의미에서 세계를 "수소적으로" 느끼는 방식일 것이다. 복잡한 신경계를 갖추고 있는 동물만이 자신이 세계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그러므로 이것을 자각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분자가 이것에 관해 성찰하거나 자각할 수 없음에도 분자를 "느끼는" 사물로 가정하는 것은 기묘한 듯 보일 것이지만, 이것은 우리가 이미 분자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서술하는 다른 한 방식일 뿐이다. 다양한 힘 때문에 분자는 서로 "끌리"거나 "밀어내"고, 그래서 특수한 상황 속에서 심지어 "결정"을 내리는 듯 보인다고 이미 말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이 무릎으로 막대를 부러뜨릴 때 특수한 창발적인 파편들은 사전에 거의 예측할 수 없는 패턴을 산출하는데, 왜냐하면 그런 패턴은 다양한 미시 결정―각각은 가지의 어떤 주어진 양상이 주변 환경이 그것에 가하는 힘과 응력의 충격을 "느끼"는 방식의 결과의 복잡한 상호작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런 관념들이 기묘한 듯 보일 것이지만, 사실상 그것들은 우리가 이미 사물을 서술하는 방식과 그렇게 다르지 않는데, 그것들은 이것을 모든 물질의 내부에는 아무리 원시적일지라도 작동 중인 어떤 층위의 내면성이 존재할 수 있을 가능성으로 확대하는 것일 뿐이다.


처음에는 이런 관념들이 이상한 듯 들릴 것이지만, 그것들은 수 세기 동안 철학자와 과학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든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제 마음이 물질에서 어떻게 비롯되는지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는데, 왜냐하면 "느낄" 수 있는 능력이 다분히 모든 물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느낄 수 있는 능력은, 물질의 복잡성이 증가함에 따라, 그리고 특히 생명 유기체 같은 살아 있는 존재자들의 경우에 이런 느낌이 자체로 되먹임되기 시작하고, 그래서 자체가 느끼는 것을 느끼게 되어 이것에 관한 감정―지속적으로 느낄 수 있으며, 그리고 미래에 이것 이상의 복잡성의 층위에서도 잠재적으로 계속해서 느낄 수 있는 능력에 대한 "관심" 같은을 발달시키기 시작함에 따라 정량적으로 증가할 뿐 아니라 정성적으로도 중가하는 역량이다. 마음이란 규모의 다양한 층위에서 느낌들 사이의 연결망과 되먹임일 뿐이다. 이것이 맞지 않을 이유도 전혀 없고, 다른 인간들이 내가 느끼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느낀다는 관념을 입증하거나 반증할 수 없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 어떤 식으로도 이것을 입증하거나 반증할 수 있을 이유도 전혀 없기 때문에 그런 입장을 취하는 것을 찬성하거나 반대할 이유는 그것이 산출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세계관과 그런 접근 방식이 해결하는 문제들인 듯 보인다.


이것은 인공 지능과 신경과학의 과학자들이 마음과 물질 사이의 이원적 구별짓기에 의해 부과된 제약이 불필요하고 옹호할 수 없는 것이라고 점점 더 알아채고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기 시작하고 있는 까닭을 설명하는 데 전적으로 도움이 된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다시 한 번 범심론, 즉 세계 속 만물이 매우 원시적인 방식일지라도 "마음" 같은 무언가를 갖추고 있다는 관념을 적절한 과학적 관념으로 간주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 술어의 어조에도 불구하고 범심론은 결코 염력, 초자연적인 것 등과 같은 관념들과 아무 관계도 없다. 오히려 그것은, 매우 단순한 형태로 이루어질지라도, 우주의 모든 양상이 이런 저런 식으로 "감각하"거나 "경험한"다는 관념을 가리키는 철학적 술어이다.


그런 시각에서 바라보면, 인간의 뇌는 복잡하고 역동적인 형태의 연결망을 구성한 물질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자체와 세계를 느끼는 복잡한 방식을 갖추고 있다. 그렇다면 마음은 그저 물질이 내부로부터 갖는 "느낌"일 것이다. 바루흐 스피노자가 르네 데카르트의 물질과 마음 사이의 본원적인 분열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표명한 것으로 유명한 그런 세계관은 마음과 물질이 동일한 것을 바라보는 두 가지 방식일 뿐이라고 주장하는데, 더 복잡한 물질은 더 복잡한 마음을 갖추고 있고, 마음은 원자에서 뇌에 이르기까지 물질이 내부로부터 갖는 "느낌"이다. 점점 더 과학자들은 이것을 자연에서 마음과 관련된 양상과 마음과 무관한 양상을 분리하는 급진적인 도약의 필요성을 피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그래서 뇌와 마음에 관한 연구에 대한 이진적이고 이원론적인 접근 방식에서 비롯되는 교착 상태를 극복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간주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의 모든 물건은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데, 사유와 정서(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에서)는 대단히 복잡한 유기체들이 이것을 행하는 방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 컴퓨터가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지는 못하는 듯 보이지만, 이것은 연결망을 구성하지 못한 그것의 "직렬식" 뇌 구조 때문일 뿐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육체와 관련하여 생각하고 느끼며 작용하는 독자적인 과정들을 성찰하고 느끼게 만드는 복잡한 되먹임의 연결망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단순한 물질도 그것이 일부가 되는 어떤 체계의 복잡한 사유와 느낌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음식 속 물질은 우리의 일부가 되어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며, 그리고 그런 부분이 분해되면 그것은 이런 능력을 상실하고 주변 세계로 돌아가는데, 우리의 연결망들이 내부에서 성분 물질은 연속적으로 변화하지만 형태는 흡사한 연결망들을 재생산하기 위해 물질과 에너지를 재활용함으로써 사유와 느낌을 유지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생명이나 의식 같은, 이전에는 물질을 초월하는 것으로 간주된 것은 이제 물질에 내재하는 것, 언제나 이미 존재하는 것, 물질의 잠재력의 일부, 물질의 바로 그 핵심에 놓여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렇다면 "영혼"이나 "정신" 같은 것을 상정할 필요가 전혀 없는데, 이것들은 복잡한 연결망 구성에 의해서만 나타나게 되는 듯 보이지만 세계의 바로 그 얼개에 내재하는 듯 보인다. 이런 물건들 가운데 일부로 하여금 느낄 수 있는 자체 능력을 느낄 수 있고, 자체 경험을 깨달을 수 있고, 세계가 유의미하고 가치를 표현하며 생각한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게 할 수 있는 것은 세계의 질료에 내재하는 불가해한 간극이나 도약의 결과가 아니라, 즉, 이런 분열이 세계 자체의 바로 그 질료의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모든 양상에 있어서 그리고 사실상 그런 질료 자체이다. 이전에 우리 세계의 "초월적" 양상으로 간주된 모든 것은 모든 물질 내부에 내재하는 것, 즉 자기의식적인 사유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결코 꿈꾸기 시작한 적도 없는 잠재적으로 새로운 사유 및 느낌의 형태들에 이르기까지 세계 질료의 분산된 복잡한 연결망 구성에 의해 창발하는 잠재태로 간주될 수 있다.


흔히 당황하게 하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범심론, 즉 연결망을 이룬 관계적 사유를 마음과 뇌, 물질과 느낌에 관한 쟁점들과 관련시키는 방식은 연결망적 세계관의 본질적인 성분이다. 인공 지능과 인지 신경과학의 전선에서 이루어지는 현대 연구의 대부분은 마음과 물질의 관계에 관한 의문들에 대한 전일론적 접근 방식이 없다면 거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기획이 증명하기 위해 작업하듯이, 세계를 바라보는 이런 방식의 많은 파생 결과가 존재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이제 마음이 다르게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사실상 사상사에 있어서 가장 완고한 이원적 대립들 가운데 하나, 매우 많은 다른 대립들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 이제 재구성될 수 있다는 것도 의미한다. 이것으로부터, 본원적으로 비이원적인, 근본적으로 내재적인, 관계적인, 분산적으로 굴절적인 그리고 창발적으로 자기강화적인 세계관을 전개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우리 세계 속에서는 언제나 더 제한적인 양상들이 존재할 것이지만, 그런 새로운 모형들에 의해 재맥락화될 때 그것들은 바라건대 더 이상 전적으로 불가피하거나 필연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마음과 몸, 정신과 물질 사이의 분열에 관한 인간중심적 예외주의의 뒷받침을 더 이상 받지 못함으로써 정말로 연결망적인 세계관의 전개를 막는 가장 중요한 단일한 장벽이 무너진다. 그렇다면 문제는, 세계에 관한 그런 시각 덕분에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는지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 세계를 다룰 수 있는 더 나은 방식을 찾아내는 데 어떻게 도움을 줄 것인지라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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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토퍼 비테일(Christopher Vitale), <<연결망학: 초연결 시대를 위한 연결망의 철학 선언(Networkologies: A Philosophy of Networks for a Hyperconnected Age-A Manifesto)>>(2014), pp. 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