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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고크로저: 오늘의 에세이-근대 시대의 서양에서 과학 문화의 발견과 공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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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2. 4.



근대 시대의 서양에서 과학 문화의 발견과 공고화

The Discovery and Consolidation of a Scientific Culture in the West in the Modern Era


―― 스티븐 고크로저(Stephen Gaukroger)


17세기 이래로 서양 문화의 가장 독특한 특색들 가운데 하나는 모든 인지적 가치의 과학적 가치에의 점진적인 동화이다. 과학적 이해의 역할과 목적에 대한 특별한 이미지는 서양 근대성의 자화상과 매우 근본적인 방식으로 엮여 있다. 이것에 대한 한 가지 두드러진 예시는 자체의 우월성을 구성하는 것에 대한 서양의 감각이 19세기 초에 종교에서 과학으로 매끈하게 이동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줄곧, 그런데 특히 20세기 후반에, 이런 자기 이해는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로 수출되었다.


과학은 모든 형태의 합목적적 행동에 대한 모형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도덕에서 철학적 논쟁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조직에서 종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대한 인지적 규범을 제공한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무엇보다도, 과학의 목적과 지위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에서 이런 규범이 어떻게 강화되었는가? 지금까지 두 권―<<과학 문화의 출현: 과학 그리고 근대성의 형성 1210-1685(The Emergence of a Scientific Culture: Science and the Shaping of Modernity 1210-1685)>>(2005)와 <<기계론의 붕괴와 감성의 발흥: 과학 그리고 근대성의 형성 1680-1760(The Collapse of Mechanism and the Rise of Sensibility: Science and the Shaping of Modernity 1680-1760)>>(2010)―이 출판된 다섯 권의 연작에서 나는 서양에서 과학 문화의 출현과 공고화를 추적함으로써 이런 의문들을 탐구한다.


한 가지 중요한 구별짓기, 즉 과학적 프로그램들을 촉발하는 이론적 및 실험적 발달의 출현과 이런 프로그램들의 문화적 공고화 사이의 구별짓기가 이 작업의 근저에 놓여 있다. 서양에서는, 초기 근대 시대부터 줄곧, 매우 성공적인 혁신과 더불어 어느 독특한 방식으로 과학적 기획을 육성하는 문화를 보게 된다. 이 두 가지 요소를 별개의 것으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 이유는 다른 과학 문화들, 즉 초기 근대 시대에 선행하는 과학 문화들―고전기 그리스와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 디아스포라 그리고 13세기 및 14세기 파리와 옥스퍼드―과 더불어 서양 바깥의 과학 문화들―9세기, 10세기 그리고 11세기의 아랍-이슬람 문화와 12세기에서 13세기까지의 중국―의 지위와 관련되어 있다. 이 모든 사례에서 과학적 발달은 한 가지 독특한 특징을 공유한다. 그것들은 각각, 관심사가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도덕적 또는 다른 문제들로 이동하게 되는 실질적인 정체 시기가 교대로 일어나는, 느리고 비규칙적이며 간헐적인 성장의 패턴을 나타낸다. 과학은 문화 속 다양한 활동의 하나일 뿐이었고, 그것에 집중된 주의는 다른 양상들에 집중된 주의가 변화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변화했고, 그래서 문화 내부에 있어서 관심사의 전체적 균형 속에서 지적 자원에 대한 경쟁이 있었다. 17세기 서양에서 일어난 일은 전적으로 달랐는데, 특이하고 예외적인 것―그리고 설명이 필요한 것―은 다른 사례들과는 달리 서양에서 전개된 과학적 발달의 특질이다. 초기 근대 서양의 "과학 혁명"은 여타 과학 문화들의 번영/침체 패턴과 단절했으며, 그리고 출현한 것은 그때 이래로 서양에서 전개된 과학적 발달의 일반적 규칙을 구성하는 대체로 연속적이고 누적적인 성장이었다. 관심사의 전통적 균형은 과학적 관심사의 지배로 대체되었다. 지금까지 과학 자체는 이전 문화들의 기준에 따르면 병리학적인 성장 속도를 겪었지만, 이것은 인지적 지위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둘째, 서양에서 성취된 과학의 성공을 탐구하고자 한 많은 시도는 과학 문화의 출현과 그것의 공고화라고 지칭할 수 있는 것을 혼합했고, 그래서 결국 둘 다를 잘못 이해했다. 과학 혁명과 관련하여 독특한 점은, 그것의 실천가들이 과학을 추구하는 정말로 성공적인 유일한 방식을 고안했고, 그래서 과학 혁명의 여파로 산출된 과학적 실천이 장기적으로 존속 가능하게 전개될 수 있었을 유일한 방식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가정되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초기 근대 시대의 과학은 매우 두드러지게 성공적이어서 그것이 경쟁하는 해설을 대체했을 뿐 아니라 이런 기본적인 결과를 성취한 방법을 모든 인지적 영역에 수출할 수 있었다. 요약하면, 출현에 대한 좋은 설명이 공고화에 대한 좋은 설명이다라는 점이 암묵적으로 가정된다. 그런데 일단 공고화에 관한 의문을 진지하게 고찰하면, 잠깐 성찰함으로써 그런 발달이 과학 혁명이 뒤에 어떻게 공고화되었는지 설명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 드러나게 된다. 이전 문화들에서 광학, 천문학, 기계에 관한 이론, 의학 그리고 기술에 있어서 매우 두드러진 과학적 진보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런 모든 사례에서는 비교적 집중적인 과학적 활동 시기 후에 상황이 종결되었다. 공고화에 대해서는 매우 상이한 종류의 설명이 필요하다.


이런 이전 문화들을 특징짓는 것은 그것들이 명백히 과학적 성취를 공고화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공고화는 특수한 과학적 결과 또는 이론 또는 심지어 연구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강화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적 기획 자체를 공고화할 수 있는 능력이다. 후자는 정당한 모험적 과제인데, 그것의 관심사는 어느 특수한 종류의 활동의 업적 및 지위와 관련되어 있다. 그런 공고화의 목적은 과학을 인지적 활동의 모형으로 확립하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대규모 공고화가, 예를 들면, 알렉산드리아, 아랍-이슬람 또는 중국 과학의 프로그램들 가운데 일부였다고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 정반대로 증거는, 한정된 범위의 특정한 문제들에 대한 해법이 규칙이었던 것처럼 보이며, 그리고 이런 기획의 성공은 일반적으로 과학적 문제들에 대한 유의미한 주목을 종식시켰다는 것을 가리킨다. 대규모의 공고화라는 관념은 과학적 기획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 혁명 이후 서양의 과학적 기획에 내재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공고화가 없었다면 과학 혁명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었을 것인데, 중세 초기의 바그다드나 안달루시아 또는 중국의 송명 왕조에서 일어난 일과 동등한 발달이 전개되었었을 것이다.


과학의 인지적 주장들을 진흥하고 그것들의 주위에 합법적인 과학 문화를 구축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그런 종류의 성공적인 공고화가 과학 혁명을 특징짓는 특색이다. 그러나 그런 공고화는 그저 성공에 관한 문제인 것은 아닌데, 이전의 서양 및 서양 바깥의 과학 문화들에서 부재한 목적을 성취하는 데 성공한 점에 관한 문제이다.


과학 혁명에서 이런 목적이 왜 그리고 어떻게 생성되었는지에 관한 문제는 최소한 그것이 어떻게 성공적으로 달성되었는지에 관한 문제만큼이나 주목할 가치가 있다. 대규모의 공고화가 과학적 프로그램들에서 유의미한 역할을 결코 수행한 적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그것들의 목적이 거의 예외 없이 대체로 외부에서 결정되었더라면, 내부적으로 생성된 공고화 프로그램이 발달한 일이 어떻게 일어났겠는가? 그리고 언제 그리고 어떤 조건 하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과학 문화의 출현>>에서 나는 16세기 말과 17세기 초 사이의 시기에 집중한다. 그렇지만 13세기에 중대한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했는데, 그때 신학자들은 근본적인 신학적 난제들을 해결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여타의 것보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훨씬 더 유용한 철학적 자원을 제공한다고 결정했다. 많은 저항에도 불구하고, 13세기 말 무렵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자연 철학과 형이상학을 이해하기 위한 지배적인 수단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감각 지각을 지식의 유일한 원천으로 만들었고, 그래서 당시까지 신학적 및 철학적 사유를 지배했었던 플라톤주의와는 대조적으로, 세계와 세계에서 인간의 지위에 대한 서양인들의 이해의 핵심은 자연 철학이었는데, 이것은 18세기 무렵에 과학으로 불리게 되었다. 요약하면, 과학적 가치가 중심 무대를 차지하게 되는 문화라는 의미에서 과학 문화가 최초로 출현한 것은 13세기였다. 지금까지 몇몇 논평가들이 주장했듯이, 초기 근대 과학은 중세 과학과 연속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과학과 신학의 분리를 통해서 형성되지도 않았다.


서양 과학의 성공은, 최소한 부분적으로, 자체를 종교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는 능력에 놓여 있었다고 간주하는 견해가 널리 수용되고 있다. 16세기와 17세기에 종교와 자연 철학 사이의 관계가 꽤 급진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은 확실히 참이지만, 이런 변화는 결코 직접적인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 결과는 결코 종교의 외면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점에서 종교에의 전향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16세기와 17세기가 지금까지 유럽에서 알려진 가장 격렬하게 종교적인 세기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중세 시대 전체에 걸쳐 수도원 문화에서 보존되었었던 자기 경계에 대한 요구를 수반하는 다양한 강제적인 도덕적 기준이 종교 개혁과 반종교 개혁의 시기 동안 일반 민중에게 전면적으로 이전되었다. 초기 근대 시대에 세속적인 민중의 종교적 감성은 깊고 격렬했는데, 수도원 문화의 어떤 것만큼이나 깊고 격렬했으며, 그리고 이런 종교적 감성은 19세기에도 많은 자연 철학적 탐구를 촉발했다.


과학적 기획의 공고화의 독특한 성공의 대부분은 종교와 자연 철학의 분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 철학이 자연 신학의 기획들에 수용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는데, 17세기와 18세기에 자연 철학이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만든 것은 그것이 자연 신학의 갱신에 대해 제공한 전망이었다. 초기 근대 시대에 과학이 종교와 단절되기는 커녕 과학의 공고화는 운전석에 앉아 있던 종교에 결정적으로 의존했는데, 17세기에 기독교는 자연 철학을 인수하여 그것의 의제를 설정하고 여타의 과학 문화의 의제와는 전적으로 상이한 방식으로 추진했으며, 그리고 결국에는 과학을 부분적으로 종교의 형상대로 구성된 것으로 확립했다.


자연 철학과 기독교 신학의 연합은 전자가 후자의 열망을 떠맡았다는 것을 의미했는데, 그래서 자연 철학은 세계를 이해할 뿐 아니라 세계에서 인간의 지위도 이해하고자 하는 기획의 일부가 되었다. 과학이 사실상 문화의 핵심에 설정되는 과학의 이런 정당화는 초기 근대의 서양에 독특한 것이었다. 그것은, 과학의 기술적 성공이 아무리 두드러지더라도 결코 보장할 수 없었던 역할을 과학에 제공했다.


그런데 과학이 이런 새로운 역할을 떠맡은 바로 그때에 그것으로 하여금 신학의 동반자일 수 있게 만든 특색들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기계론―모든 물리적 현상을 미시적 입자들의 역학적으로 규정된 거동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체계적 자연 철학의 모형이었는데, 그것을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자연 철학에 대한 유일한 진지한 경쟁자로 만든 자연적 세계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기계론의 가장 발달된 일반적 형태는 1640년대에 데카르트에 의해 제시되었지만, 많은 분야에서 기계론은 약속 어음에 불과했다. 그리고 18세기에 연구의 첨단에 있었던 화학, 전기학 그리고 생리학 같은 중요한 분야들에서 그 약속은 공허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런 분야들의 연구자들은 점진적으로 기계론을 외면하였고 어떤 체계적 열망도 없는 "실험적 자연 철학"을 추구했는데, 그들은 체계적 열망을 갖고 있는 "사변적 자연 철학"을 거부했다.


사변적 자연 철학은 근본적인 점에 있어서 그 주제에 관한 고대적 구상의 연속체인데, 미시적 사건 속에서 거시적 사건에 대한 설명을 모색한다. 실험적 자연 철학―모형들은 공기 압력에 대한 보일의 설명과 분광 색깔의 생산에 대한 뉴턴의 설명―의 옹호자들은, 원인은 언제나 더 근본적인 층위에 놓여 있어서 현상 너머에서 현상을 초래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관념을 거부하는 설명 형식들을 채택했다. 18세기 중엽에 이런 접근 방식은 화학[조프루아(Geoffroy)]과 전기학[프랭클린(Franklin)]에서 두드러진 성공을 거두었고, 그래서 실험적으로 유도된 설명을 체계적 설명에 편입시키고자 한 시도는 무익하다는 강력한 견해가 출현했다. 사실상 체계에 대한 호소는 보수적인 예수회 수사들에서 급진적인 파리의 필로소프들에 이르기까지, 전체 스펙트럼에 걸쳐, 설명에 대한 걸림돌이자 지적으로 부정직한 것으로서 광범위하게 거부되었다. <<기계론의 붕괴와 감성의 발흥>>에서 나는, 체계적 설명에 대한 거부가 과학적 가치가 일반적인 인지 모형을 제공한다는 관념에 미친 영향을 탐구한다. 자연 철학과 기독교 신학의 17세기 연합은, 자연 철학이 자연적 세계 및 그 속에서 인간의 지위에 대한 이해를 목적으로 삼았던 대단히 야심만만한 프로그램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18세기 중엽에 자연 철학은 그때까지 그것으로 하여금 지식과 이해 일반에 대한 모형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했었던 체계적 정합성을 대부분 잃어 버렸다. 훨씬 더 중요하게도, 신학과 형이상학에서 조장된 그런 종류의 포괄적인 체계적 야망이 거부당하게 되었는데, 흄(Hume)의 저작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18세기 후반에 충분히 많은 과학적 혁신이 있었지만, 17세기에 기계론이 제공했으며 그리고 결국 이해 일반에 대한 모형으로서 작동할 수 있게 만들었던 그런 종류의 과학의 정당화는 이제 상실되었다. 자연 철학이 더 이상 단일한 체계로 간주되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고유한 통일성도 없는 일단의 이론 및 실험적 결과로 간주되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인지적 모형이라는 동일한 역할을 더 이상 전적으로 동일한 방식으로는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자연 신학과 자연 철학의 연합이 기계론에 제공했었던 그런 종류의 보장된 정당성이 쇠퇴했으며, 그리고 그것을 대체할 것이 전혀 없었는데도 18세기 중엽에 왜 과학 문화―무엇보다도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기획, 즉 특수한 과학적 발견이나 진전에 무관하게 가치가 있는 것으로서의 과학에 대한 믿음―가 붕괴하지 않았는지 물어야 한다. 확실히 17세기에 (거대한 저항에 맞서) 그런 구상이 성공적이었던 까닭은 그것이 이전에 지니고 있었던 힘을 더 이상 갖추고 있지 않았다. 자연 철학은 더 큰 지위를 맡고 있었었지만, 의문은 그것이 이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 여부였다.


18세기 후반에 과학은 사실상 자체의 지위를 유지했었지만, 포괄적인 체계로의 복귀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과학의 지위는 더 이상 물리 과학에 대해서 주로 시험당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실상 스스로 만들어낸 새로운 영역, 즉 인간 과학에서 시험당했다. 1750년대부터 줄곧 세 가지 세트의 의문들이 과학, 종교 그리고 형이상학 사이의 관계들에 관한 논쟁을 지배했다. 첫번째 것은 체계적 이해와 비체계적 이해의 장점과 단점에 대한 평가였다. 두번째 것은 명제적 이해―모든 이해가 무언가가 사실이라는 점을 아는 것으로 해석되는 과학적 탐구와 전통적으로 결부되어 있는 그런 종류의 이해와 비명제적 이해, 즉 열망, 두려움, 계획, 믿음 등에 의거하여 세계에 접근하는 것 사이의 대조였다. 세번째 것은 세계 및 세계에서 인간의 지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성과 감성이 담당하는 역할에 관여했다. 체계, 명제적 이해 그리고 이성이, 예상할 수 있듯이, 함께 옹호되었던 것처럼 반체계적 논증, 비명제적 이해 그리고 감성도 함께 옹호되었다. 여기서 감성이 특히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성과 감성 사이의 관계를 재고함으로써 17세기 기계론에 의해 제공된 지식 모형이 불신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중엽에, 예를 들면, 프랑스에서 세계에 대한 우리 이해의 근저에 놓여 있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라고 하는 주장이 디드로에 의해 가장 두드러지게 제기되었는데, 왜냐하면 감성만이 우리의 감각적 상태는 우리에 외재하는 것에 의해 초래된다는 깨달음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감성이 떠맡은 근본적인 역할은 세계에서 인간의 지위를 이해하는 것이 이제 세계를 이해하는 것과 동등한 것―몇몇 경우에는 앞서는 것―으로 간주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18세기 후반부터 줄곧, 인간 과학의 출현이 고찰되어야 한다. 이런 의문이 현재 작업 중에 있는 인간의 자연화와 자연의 인간화에 관한 내 연작의 제3권의 핵심이다. 나는 자연화를 이전에는 순전히 개념적인 문제로 취급되었었던 의문들을 경험적 탐구에 노출시키는 것으로 간주한다. 인간적인 것의 자연화를 위한 두 가지 주요한 프로그램은 감성을 자연화에 이르는 경로로 간주했다. 주로 프랑스적 현상이었던 인류학적 의학은 신경 감수성에 관한 생리학의 진전에 의거하여 전체로서의 인간을 생리학화한 다음에 의학화하였는데, 인간 본성에 대한 이전의 신학적 및 형이상학적 설명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동시에, 주로 독일적 현상이었던 철학적 인류학도, 비록 매우 다른 방식으로 실행했더라도, 감성을 자연화에 이르는 경로로 사용하였다. 그것은 형이상학 저자들에 의해 감각이 자연화되었었던 방식에 집중하였으며, 그리고 이것을 이성의 자연화를 위한 모형으로 사용했다.


두 경우 모두에서 종교적 및 철학적 영역에 고유한 것으로 간주되었었던 의문들이 경험적 탐구의 주제로 변환되었다. 과학은 인간이 자연적 영역과 맺는 관계를 이해하는 수단으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이해에 이르는 새로운 경로로서 새로운 정당성을 나타내게 되었다.


서양에서 과학 문화의 공고화는 선형적 전개를 좇지 않았다. 일단의 기술적 문제 해결 분과학문에서 자연 속 인간의 지위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구성하기 위해 신학과 연합할 수 있었던 것으로의 자연 철학의 변환은 그것과 기독교적 세계 이해 사이에 확립된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일단 확립된 다음에 과학은 기술적 성취를 넘어서는 포괄적인 형태의 이해라는 역할을 유지할 수 있었다. 18세기에 인간의 복지와 자기 이해에 명료한 영향을 미친 전적으로 새로운 경험적 탐구 영역이 개방되었고, 그래서 과학―이제 "도덕" 과학 또는 인간 과학의 형태로―은 훨씬 더 확고하게 서양 문화의 중심으로 투사되었다.


이런 전개는 지속될 수 없었다. 19세기 초엽에 체계적 사유는 마치 복수라도 하려는 듯 다시 주목을 끌게 되었으며, 그리고 19세기 중엽에는 기술과의 밀접한 연합을 통해서 과학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정당성이 확립되었다. 그런데 이것도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의문시될 것이었는데, 그때 무기와 결부됨으로써 손상된 과학과 기술을 분리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예전에 H. L. 멘켄(Mencken)은, 모든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 언제나 단순한 해법이 존재하며,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잘못된 해법이라고 지적했다. 지금까지 과학 문화의 출현은 흔히 단순한 성공 스토리로 간주되었다. 그렇지 않다. 쟁점을 더 명료하게 파악하고자 시도할 때 우리는 복잡한 문제를 있는 그대로 인식해야 한다. 오로지 이런 복잡성을 극복함으로써 우리는 근대 시대에 전개된 과학적 발달과 공고화의 순전한 우발성을 직면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