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칼튼 클락: 오늘의 인용-평형에서 정보 처리로

댓글 0

카테고리 없음

2017. 2. 7.


"

기능적으로 분화된 세계 사회에서는 그 어떤 실재적인 평형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경제 성장과 환경 보호의 균형을 유지시킬 수 있다"와 같은 것들을 말할 때 사람들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정말로 의미하는 바는 자연적 환경에 과도한 피해를 유발하지 않은 채 경제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도한 피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논의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자연적 환경에 피해를 끼치지 않고 있다(아니, 그렇지 않다면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지 않다)고는 정직하게 말할 수 없다.


평형 모형은 복잡성을 다룰 수 없다. 그것은 기계론적 세계관에 속한다. 그런데 자기생산적 체계, 구조적 연결 그리고 자극을 다룰 때 우리는 균형에 관해 말하고 있지 않다. 예를 들면, 경제는 다른 체계들을 자극할 수 있고 파괴할 수도 있지만, 체계들 사이에 균형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방대한 소통의 체계로 이해되는 사회는 지구의 모든 생명을 자극할 수 있고 파괴할 수도 있지만, 어떤 균형도 존재할 수 없다. 체계와 그것의 환경 사이에는 균형이 존재할 수 없다. 무엇이든 두 면을 갖는 형식에서는 유표 영역과 무표 영역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 영역은 무시되거나 보이지 않는다.


자극과 더불어, 어느 체계가 그것의 환경에 의해 방해받을 수 있다고 말할 때처럼, 우리는 "장애(disturbance)"에 관해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루만이 주장하듯이,


만일 장애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는 이 개념이 더 이상 균형 이론과 관련된 개념이 아님을 분명히 의식해야 한다. 균형 이론도 장애라는 개념을 사용했고, 균형에 관한 전체 이론 모델은 장애와 관련해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나의 방향은 장애의 용이함과 개연성의 측면에서 전개되었다. 이 점은 저울을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즉 저울 어느 한쪽에 단지 몇 그램 정도의 미량을 더 올려놓기만 해도 이미 균형에 장애가 발생한다. 균형에 관한 이런 식의 사고는 17세기에 부상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사고는 무역균형이나 국제관계의 균형을 매우 인위적으로 설명하는 결과를 낳았다. 예를 들어 프랑스가 군인 몇 명을 보강하면 프로이센도 균형을 맞추기 위해 군비를 증강해야 한다는 식으로 설명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와는 달리 균형 이론 모델과 관련된 또 다른 방향은 균형 자체가 균형이 유지될 수 있도록 만드는 내부 구조나 장치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장애가 발생하면 [...] 균형을 회복하게 [된다...]. 이 역동적 균형 모델에서 균형은 원칙적으로 은유일 뿐이다. 그렇지만 균형을 안정성을 위한 조건으로 예견하고 균형을 통해 체계를 안정적인 체계로 서술하며 [...] 체계의 구조 보존이나 존속 보존을 균형 개념과 연결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161-2)


균형에 의해 보증되는 안정성 대신에 안정화, 불안정화 그리고 재안정화에 관해 말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역동적 체계(예를 들면, 개체군)들의 진화를 설명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안정성의 평형과의 연동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루만이 적고 있듯이,


그러나 이런 균형 이론은 오늘날 여러 측면에서 의문의 대상이 되었다. 일단 자연과학에서도 불균형이야말로 안정적일 수 있다는 사고가 있고, 경제학에서는 너무 많은 상품이 공급되거나 시장에 구매가 너무 적을 때 또는 반대로 너무 많은 구매자가 있는데 공급되는 상품은 너무 적을 때 비로소 경제 체계가 안정적이라고 말한다.... [어떠한 경우든 안정성을 갖는 것은 균형이 아니라 불균형이다.] 이러한 이론은 과거의 모델에 의문을 제기하는 하나의 경향이다. 다른 한편 자기생산, 구조적 연결, [조작적] 폐쇄성에서 출발할 때에도 균형 모델은 이미 의문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균형과 불균형 모두 안정성에 기여하는 기능적 등가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 그래서 균형 모델을 포기한다면 어떻게 장애를 체계 내재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제기된다.(163)


우리는 졍보 처리의 견지에서 생각할 수 있다. 자극, 교란 또는 장애는 재안정화가 이어져야 하는 불안정화를 초래한다. 안정된 체계는 구조(또는 구조적 패턴)와 일단의 가능한 조작들로 이루어져 있다. 자극(또는 다른 무엇으로 부르든 간에)은 체계 내의 그리고 체계용 정보가 될 수 있다.


하나의 장애, 하나의 정보, 하나의 교란은 수많은 가능성의 영역으로부터 현재성을 가진 이것 또는 저것을 체계에게 부여한다. 장애, 정보, 교란은 체계로 하여금 탐색 과정이나 확인 과정을 개시하게 할 수 있다.(163-4)


구조는 기대들의 패턴일 것이고, 이런 기대들은 가능한 해석의 범위를 한정한다. 어떤 종류의 음악(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음악을 닮은 소리 패턴)을 듣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개가 짖는 소리로 해석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 소리 패턴을 음악으로 식별한다. 그 다음에 음악의 종류를 식별하려고 모색할 것이다. 우리가 이런 일을 행할 수 있는 속도는 체계의 역량에 의해 한정된다. 루만이 서술하듯이,


해석적 가능성들의 범위는 체계의 속도와 정보 처리 역량에 상응한다.


그러므로 "장애"는 체계 내에서 조작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는 정보 처리의 촉발을 의미한다... 그래서 장애라는 개념은 평형 모형으로부터 분리시켜 정보 처리 과정으로 부르는 것이 더 좋을 수 있을 것을 서술하도록 변경할 수 있다.


집고양이 같은 개체군은 유전자 풀로 이해될 수 있는데, 이것 역시 폐쇄된 자기생산적 체계로 부를 수 있다. 그런 체계는 자체 환경에 의해 불안정해진다면 내부적으로 정보를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유전자 풀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지 않다.

"

―― 칼튼 클락(Carlton cl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