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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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휴네먼: 오늘의 에세이-지식, 인간의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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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2. 8.


지식, 인간의 실천

Knowledge, that human practice


―― 찰리 휴네먼(Charlie Hueneman)


일반적으로 우리는 지식이 누군가의 머리 속에 사물의 실제 모습과 일치하는 어떤 종류의 스토리 또는 설명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일상적인 구상은 최소한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그것은 사물의 실제 모습이 있다고 가정하는데, 어떤 특수한 스토리 또는 설명이 그런 모습을 포착하는 데 성공적이고, 그래서 독자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상이한 이유 때문에 모두가 성공적인 다수의 스토리 또는 설명이 존재할 수는 없다. 둘째, 그것은 지식이 누군가의 머리 속에 있는 것과 세계 속에 있는 것 사이의 일종의 일치일 뿐이라고 가정하고, 그래서 누군가가 지식을 갖고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데 사용하는 신호와 표식들을 전부 무시한다. 거의 틀림없이, 실제로 지식이라는 것은 마음과 세계 사이의 어떤 종류의 영성적 공감이라기보다는 이런 신호와 표식들이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주장했을 때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은 훨씬 더 현실주의적이었다. 어떤 종류들의 지식 덕분에 우리는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되며, 그리고 도중에 우리가 어떤 수다스러운 소음을 생성하는가는 실제로 중요하지 않다. 어느 뱃사람이 바다를 건너서 결국 자신이 원하는 곳에 닿을 수 있다면, GPS를 사용했든 사크로 보스코(Sacro Bosco)의 구체를 사용했든 간에, 그는 지식을 갖고 있다. 이것은 실천적 지식이다. 다른 종류들의 지식은 그렇게 직접적으로 실천적이지 않고, 그래서 여기서 상황이 미묘해진다. 때때로 처리할 필요가 있는 일은 사회적인 것, 정치적인 것 또는 문화적인 것이고, 그래서 그것은 "처리하는 것"의 문제라기보다는 유용한 총체적 시각을 제공하는 것의 문제이다. 시각을 유용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 어떤 특수한 청중이 중요하다고 간주하는 것의 전부 또는 대부분을 조립한다는 점이다. 어느 연회에서 네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고, 그 중 세 사람이 각자 역설하고 있는 주장을 갖고 있으며, 네번째 사람이 그런 세 주장을 그럭저럭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설명을 고안해낸다면, 그 네번째 사람은 지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런 종류의 "연회에서 이야기하기" 지식은 학술적 또는 이론적 지식이다.


실천적 지식과 이론적 지식 둘 다 권력의 실례인데, 실천적인 것은 사물에 대한 권력이고 이론적인 것은 대화에 대한 권력이다. 과학적인 것으로 지칭되는 지식의 영역들에서는 이론적 부분이 다양한 정도의 꼭 맞음(자연 과학) 또는 느슨함(사회 과학)으로 실천적 부분에 속박되어 있다. 그런데 실천적 영역과 이론적 영역 둘 다에 스며들어 있는 것은 뒤섞인 다양한 사회적 압력이다. 왜냐하면 일을 처리할 필요가 있고, 어떤 성취들만 수행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은 사회이기 때문이다. 어떤 대화들을 다른 대화들보다 더 높이 평가하고 통합될 필요가 있는 것과 그럴 필요가 없는 것에 가치를 설정하는 것은 사회이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은, 지식은 여러분을 진전시키는 것, 여러분에게 이점을 부여하는 것, 여러분에게 영예를 수여하는 것, 또는 그렇지 않다면(맞습니다, 프랜시스) 여러분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이런 결론이 어떻게 사회적 환경, 정치적 환경 그리고 문화적 환경 속에 철저히 스며들어가 있는지 이해하기는 쉽다.


어떤 양의 야만적 권력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비진리를 믿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도록 강요할 수는 있을지라도, 비진리를 참인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의 제기는 너무나 한정된 "권력"에 대한 이해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권력은 공공연하고, 물리적이며, 야만적일 수 있는데, "진리" 위원회와 강제 노동 수용소와 완전한 악몽을 포함한다. 그런데 그것은 어리석은 권력―학교 폭력의 권력일 뿐이다. 권력은 사회적 집단과 제도와 과학적 아카데미에 대해서도 행사된다. 이런 더 정교한 권력 행사는 안착하여 우리가 되고 싶은 사람, 우리가 생각하고 싶은 방식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고 싶은 어휘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이런 사회들의 구성원이 되고자 자청하는데, 언급할 올바른 종류들의 것들을 훈련받고 지도받기를 요청한다("대학원"). 그리고 최선의 경우에는 증거와 실험과 문헌 연구가 모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제기되는 의문, 데이터가 기록되고 해석되는 방식, 연구 노선이 가치가 있는지 여부에 대한 판단을 비롯한 이런 중요한 인자들은 모두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간에 사회적 권력의 행사를 통해서 결정된다. 게다가 잘 인식하자. 결국, 집단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반적으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이것은 불쾌한 항의인 듯 들릴 것이지만,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지식이 존재하는 다른 방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자기 또는 스니커즈 또는 배심원 판결과 마찬가지로 지식도 인간적 현상인데, 궁극적으로 독자적인 일단의 제약을 제공하는 자연적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과정들에 의해 관장된다. 지식이 그렇지 않다고 우기는 것 자체가 친숙한 권력 행위인데, 자연적 질서에 호소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신성한 권리에 의한 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