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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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하겐: 천천히 읽기(1.1)-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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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2. 11.


천천히 읽기(1.1):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Slow Reading (1.1): Gilles Deleuze, <<Difference and Repetition>> (pg. 1)


―― 벤자민 하겐(Benjamin Hagen)


[...]

첫 문장: "반복은 일반성이 아니다"(25). <<차이와 반복>>에 대한 대부분의 안내서는 처음 몇 단락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들뢰즈는 반복과 일반성를 구별짓는다. 그는 이렇게 구별짓는다. [...] 그렇지만 이런 논평에서는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는 듯 보인다. 첫 문단을 거듭해서 읽은 후에 나는 들뢰즈가 자신의 첫 문장을 얻거나 다듬고자 작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것과 관련된 까닭에 강한 인상을 받는다. 왜 이렇게 시작하는가? 어느 누구가 실제로 반복과 일반성을 동일시하는가? 나는 진정으로 묻고 있다. 여기서 들뢰즈가 참고하고 있는 철학적 전통이 존재하는가?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 어쩌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


내 방식으로, 나는 들뢰즈가 반복에 관한 그의 의미를 다음과 같은 자명한 이치와 대조시키고 있다고 추정한다. A 일반에 관해 말할 수 있도록  A가 다른 한 A와 식별 가능한 특징들을 공유하는 한에 있어서만 항 A가 반복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단풍나무 일반에 관해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각각의 단풍나무가 그것이 여타의 단풍나무와 공유하는 일반성 또는 특성들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특수한 사물들이 공유 특성들을 반복하게 되는 조건으로서의 일반성에 관한 이런 의미는 그가 반복을 이해하고 싶은 방식이 전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듯 보인다. 단순한 내 사례를 사용하면, 들뢰즈는 특수한 단풍나무들이 잎 모양과 색깔, 성장 속도, 껍질 조직, 목재 경도, 나뭇결 등을 반복하기 때문에 우리가 단풍나무 "일반"에 관해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반복은 이런 특징들과 아무 관계도 없다! 들뢰즈는 첫 단락을 첫 문장의 약간 바꾼 유용한 재서술로 끝을 맺는다. "반복과 유사성 사이에는 본성상의 차이가 있다. 그 유사성이 지극히 큰 경우라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 여기서 일반성과 유사성의 대등성을 감안하면, 단풍나무 사례를 다음과 같이 정교화할 수 있다. 일반성들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특수한 단풍나무들은 서로 유사하지만, 서로를 반복하지는 않는다. 좋다.


둘째 단락에서 들뢰즈는 이런 처음의 구별짓기에 어떤 개념적 내용을 부여한다. 반복과 일반성은 각각의 "행동[들]"에 상응하는 별개의 "관점[들]"을 표현한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일반성은 "두 가지 커다란 질서를 거느린다. 그것은 유사성들이라는 질적 질서와 등가성들이라는 양적 질서이다."(25) 이런 두 질서는 독자적으로 두 가지 "각각의 상징들", 즉 순환 주기와 동등성들에 상응한다. 하나의 관점으로서의 일반성에 상응하는 행동은 (일반성의 질서와 상징들을 감안하면) "특수한 것들 사이의 교환과 대체"이다.(25)


양적 질서: 나는 25달러 일반을 이해하는데, 왜냐하면 각각이 애초의 일반 가치를 상실하지 않은 채 서로 대체되거나 교환될 수 있는, 25달러를 구성할 수 있는 특수한 동등한 것들이 다양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예를 들면, 25개의 1달러 지폐, 5개의 1달러 지폐와 4개의 5달러 지폐, 1개의 10달러 지폐와 3개의 5달러 지폐 등).


질적 질서: 나는 단풍나무 일반을 이해하는데, 각각의 특수한 단풍나무가 다양한 발달 순환 주기를 따르기 때문이다. 이런 순환 주기들을 이해함으로써 나는 특수한 단풍나무들 사이의 유사성들을 식별할 수 있게 되는데, 그것들이 이런 순환 주기에서 별개의 단계들에 처해 있을지라도(그래서 서로 전혀 닮지 않은 듯 보일지라도) 말이다. 예를 들면, 어느 단풍나무가 훼손되었다면, 나는 그것을 파낸 다음에 일반성이라는 관점을 저버리지 않은 채 대체 묘목을 심을 수 있다. 그 묘목은 동일한 순환 주기를 따를 것이다. 알려진 범주들에 따라서 그것은 훼손된 나무와 유사하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같은 것이다.


일반성은 어느 특정한 방식(교환 또는 대체)으로의 행동에 상응하는 두 개의 질서(질적 질서와 양적 질서)와 두 개의 상징(순환 주기와 동등성)을 갖추고 있는 관점에 관련된다. 들뢰즈는 반복의 질서들이나 상응하는 상징들을 아직 묘사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에게 명확하게도, 반복은 하나의 관점인 동시에 하나의 행동, "대체할 수 없는 것과 관련해서만 [...] 필연적이고 정당화된" 행동, 즉 "교환 불가능하고 대체 불가능한 독특성과 관계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들뢰즈는 일반성의 사례들을 제시하지 않는 반면에, 어떤 흥미로운 반복의 사례들은 제시한다. "반영, 반향, 분신, 영혼들 등은 유사성이나 등가성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진짜 쌍둥이 사이에 대체가 성립할 수 없는 것처럼, 하물며 영혼의 교환이라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다."(26) 제임스 윌리엄스(James Williams)는 각각의 "반복의 경험은 반복의 지속과 연계된 강렬한 반응들을 수반한다"고 설명한다. 나는 윌리엄스가 약간 성급히 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들뢰즈의 요지의 엄격한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 주목하는 대신에 안달하는 독자를 진정시키고자 한다. 들뢰즈의 사례들은 흥미로운데, 그것들이 기묘하거나 강렬하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평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내 자신과 거울 속의 내 반영 사이에 맺어진 관계와 이 단풍나무와 저 단풍나무 사이에 맺어진 관계의 차이를 감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단풍나무들은 서로 유사하다. 내 반영은 나를 반복한다(그러나 나와 유사하지 않다). 반영, 반향, 분신 그리고 영혼들을, 마치 그것들이 자체가 반영하고, 반향하고, 배가하거나 영혼을 불어넣는 것과 일반성들을 공유하는 것처럼, 유사성에 의거하여 언급하는 것은 터무니없을 것이라고 들뢰즈는 주장하고 있는 듯 보인다. 나의 반영, 반향, 분신 그리고 영혼은 범주적인 그 어떤 것(양적 또는 질적)도 나와 공유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나를 대체할 수 없다. 누구도 내 우정을 내 반영 또는 내 반향의 우정으로 대체할 수 없다. 내 쌍둥이와 친구가 된다는 것은 상이한 우정을 개시하는 것이다("일반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 우정은 우리 자신의 우정과 유사할 것이지만). 이런 반복들은 "원본"이라고 잠정적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을 그것의 가치, 강도 또는 반응성과 무관하게 표현한다. 여기서 나는 윌리엄스와 의견이 일치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내 반복들은 (이 논증에 따르면) "[어떤] 차이의 지속"을 표현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나를 하나의 독특한 것으로 표현하고, 그것들은 내("내"가 무엇이든 간에)가 만들어 내는 차이를 표현한다.


들뢰즈는 개념적 구별짓기의 최초의 단계를 이렇게 종결한다. "만일 교환[또는 대체]이 일반성의 기준이라면, 절도와 증여는 반복의 기준이다. 그러므로 양자 사이에는 어떤 경제학적 차이가 있다."(26) 여기서 윌리엄스의 서술("반복의 경험은 강렬한 반응들을 수반한다"는 서술)에 대한 어떤 증거를 볼 것이다. 나와 내 반영의 문제에서 절도나 증여의 경제를 정위하는 것은 어렵다(거울이 나 또는 내 영혼을 절도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인데, 이미지의 생산―거울, 사진 또는 비디오에서―이 내 영혼의 절도를 구성한다는 여러 문화적 전통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중요한 "분신" 서사들은 확실히 경제와 강도에 있어서의 이런 변화를 예증한다. 예를 들면,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윌리엄 윌슨(William Wilson)>이라는 단편 소설에서 주인공의 불안은 교환이나 대체의 문제와 아무 관련도 없지만, 윌슨의 감각 탓으로 그의 독특함이 절도당한다(이른바 정체성 절도에 대한 우리 자신의 현대적 불안을 예시한다). 내 우정 속에서 나는 독특한 것(나)을 증여한다. 친구(또한 특이한 것[그]을 증여하거나 억누른다)와의 관계에서 나는 대체 불가능한 것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출현하는데, 나의 독특함이 증여되거나 절도당할 때 실제로 내가 통제하고 있는가? 분신의 경우이든 우정의 경우이든 간에, 행위 주체성의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내가 우정을 계발하거나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나의 독특함은 나의 의식적인 동의가 없다면 증여되거나 절도당할 수 없다. 내가 앞서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독특한 것으로서의 나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한 개체로서의 나에 관해 말하는 것과 같은가? 다른 기회에 검토할 문제이다.


요약하면, 한편으로 사물들이 특수한 양 그리고/또는 질을 공유한다면 그것들은 일반적으로 서로 유사할 수 있는데, 그래서 서로 대체되거나 교환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사물들은 서로 반복하지 않는다. 그것들 각각의 "교환 불가능하고 대체 불가능한" 독특함이, 예를 들면, 반영 또는 분신 또는 반향 또는 영혼에 의해 표현되게(증여되게, 절도당하게) 될 때에만 사물들은 반복을 경험한다.


다음 글에서 나는 들뢰즈의 세번째 단락에서 거론되는 몇 가지 더 흥미로운 반복 사례들, 축제, 혁명 그리고 예술 작품을 살펴볼 것이다. 이것들은 어떤 식으로 반복 일반이 될 것인가? 그리고 왜 들뢰즈는 네번째 단락에서 "법칙들의 질서"를 제기하는가? 상황이 빠르게 복잡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