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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고프: 오늘의 에세이-갈릴레오, 범심론 그리고 의식이라는 어려운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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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3. 5.


갈릴레오, 범심론 그리고 의식이라는 어려운 문제

Galileo, Panpsychism, and the Hard Problem of Consciousness


―― 필립 고프(Philip Goff)


범심론과 어려운 문제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의식은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때때로 언급된다. 이것은 분명히 참이 아니다. 우리 자신의 느낌과 경험보다 무엇이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질 수 있겠는가? 의식의 불가사의는 의식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의식이 왜 존재하는가이다.


지금까지 신경과학은 인간 행태 및 관련된 내부 작동의 근저에 놓여 있는 물리적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깨어 있는 인간의 작동하는 뇌 같은 어떤 물리적 체계들이 왜 경험을 갖는지에 대한 설명을 시작조차 하는 사람도 전혀 없다. 현대의 뇌 촬영 기법은 지금까지 뇌 속의 물리적 과정들과 그 뇌의 소유자가 갖는 경험 사이의 풍성한 상관관계들의 집합체를 제공했다. 예를 들면, 복내측의 시상 하부에서 자극을 겪는 사람은 허기를 느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상관관계가 왜 성립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복내측의 시상 하부 자극이 어떤 종류의 느낌도 전혀 일으키지 않은 채 뇌 속에서 자체 작업을 수행할 것이라는 점은 전적으로 구상할 수 있는 듯 보인다. 이것이 데이비드 차머스(David Chalmers)가 "의식이라는 어려운 문제"라고 부른 것으로 유명한 난제이다.


물질론자들은 우리가 언젠가는 의식이 현존하는 까닭을 뇌 속에서 전개되는 전적으로 비의식적인 물리적 과정들에 의거하여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한다. 그러나 이런 예상은 현재 장기적인 실패의 역사가 있다. 어려운 문제에 대한 현존하는 모든 물질론적 "해답"과 관련된 문제는 그것들이 언제나 결국에는 의식을 재규정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경험 자체를 설명할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시작한다. 그러나 도중에 어딘가에서 갑자기 그것들은 경험이 아니라 경험과 관련된 어떤 복잡한 행태적 작동―인간이 자신의 내부적 상태를 관찰하거나 환경에 관한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 같은을 가리키는 데 '의식'이라는 낱말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복잡한 형식들의 행태를 설명하는 것은 중요한 과학적 노력이다. 그러나 어려운 문제는 주체를 바꿈으로써 해결될 수 없다.


나는 대안적 연구 프로그램에 끌린다. 전적으로 비의식적인 뇌 과정들에 의거하여 의식을 설명하는 대신에 분석적 범심론자는 더 단순한 의식 형태들에 의거하여 생물학적 의식(즉, 인간과 다른 동물의 의식)을 설명하기를 희망한다. 이런 더 단순한 의식 형태들은 기본적인 형태들의 물질 속에, 궁극적으로는 뇌의 가장 작은 구성 요소들(그것들이 어떤 것으로 판명되든 간에)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된다. 범심론적 가설은, 물리적 세계의 궁극적인 구성 요소들, 아마도 쿼크와 전자는 매우 기본적인 형태들의 경험을 겪으며, 그리고 인간 및 동물 뇌의 복잡한 경험은 기본 물질의 단순한 경험에 정초된다는 것이다. 이십 년 전에 범심론은 과학자들과 과학적인 사고 방식을 갖춘 철학자들에 의해, 사실상 그렇게 간주되었더라도, 즉각적으로 일축당했었을 것이다. 더 최근에는, 아마도 의식에 대한 물질론적 설명의 우울한 이력 때문에, 점점 그 수가 늘어나고 있는 소수의 철학자와 신경과학자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범심론의 잠재력을 진지하게 탐구하고 있다.


이것은 의식에 대한 과학적 설명에의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분석적 범심론은 독자적인 과학적 기획(매우 초기의 발전 단계에 있지만)이다. 물론 가장 기본적인 의식 형태들은 결국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이, 설명은 어딘가에서 종결되어야 한다. 모든 이론은 자체의 원초적인 것들을 갖추어야 한다. 유일한 의문은 그것들이 소여를 설명하는지 여부와 얼마나 잘 설명하는가이다.


물리학의 철학적 토대


대부분의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여전히 영혼이든 미시적 층위의 의식이든 간에 부가적인 존재자를 전혀 가정하지 않은 채 의식이 설명될 수 있다는 희망을 고수한다. 이 희망은 일반적으로 물리 과학의 성공적인 역사에 관한 대담한 서사에 의해 뒷받침된다. 이 영광스러운 역사의 매 시점에 철학자들은 어떤 현상들―빛, 생명, 화학―은 너무 '특별'해서 물리 과학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선언했지만, 과학적 진보의 끊임없는 행진에 의해 나중에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을 뿐이라고 주장된다. 그렇다면 철학자들의 부정적인 언급에도 불구하고 의식도 동일한 길을 갈 것이라고 예상할 모든 이유가 있다.


그렇지만 물리 과학과 그것의 부인할 수 없는 올바르게 찬양받는 성공의 역사에 관한 상이한 사고 방식이 존재한다. 과학 혁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움직임은 수학이 자연 과학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갈릴레오의 선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우리의 철학적 세계상을 혁명적으로 바꾼 이후에야 이것을 행할 수 있다고 느꼈다. 갈릴레오 이전에는 일반적으로 물질이 감각적 성질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가정되었는데, 토마토는 빨갛고, 파프리카는 매운 맛을 내며, 꽃은 달콤한 냄새가 난다. 그러나 이런 감각적 성질들―토마토의 빨강, 파프리카의 매운 맛, 꽃의 달콤한 냄새―이 수학의 추상적인 간결한 어휘로 어떻게 포착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방정식이 파프리카의 매운 맛이 어떠한지 어떻게 포착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감각적 성질이 수학적 어휘로 포착될 수 없다면, 당연히 수학적 어휘는 물질의 완전한 본성을 결코 포착할 수 없는 듯 보였다.


이 문제에 대한 갈릴레오의 해결책은 물질에게서 그것의 감각적 성질들을 벗겨내어 영혼에 귀속시키는 것이었다. 달콤한 냄새는 실제로 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꽃의 냄새를 맡는 사람의 영혼에 있다. 매운 맛은 실제로 파프리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맛보는 사람의 영혼 속에 있다. 갈릴레오의 경우에, 색깔도 실제로 객체의 표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관찰하는 사람의 영혼에 있다. 그래서 물질이 아무 성질도 갖추고 있지 않다면, 원칙적으로 그것을 순전히 정량적인 수학의 어휘로 서술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것이 수리물리학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물론 갈릴레오는 감각적 성질들의 현존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것들을 물질을 영혼, 즉 물질적 세계 바깥에 존재하여 자연 과학의 영역 바깥에 존재하는 어느 존재자에 거주하는 의식의 형태들로 간주했다. 다시 말해서, 갈릴레오는 의식을 자체의 탐구 영역 바깥에 둠으로써 물리 과학을 창안했다. 갈릴레오가 시간 여행을 거쳐 현재에 도착하여 의식을 물리적 뇌 과정에 의거하여 설명하는 방법이라는 '어려운 문제'가 있다는 것을 듣게 된다면, 그는 확실히 이렇게 응대할 것이다. '물론 존재합니다. 저는 의식을 물리적 세계에서 추방함으로써 물리 과학을 창안했습니다!'


이것은 그것 자체로 의식에 대한 순전히 물리적인 설명이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논증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물리 과학이 언젠가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물리 과학의 역사적 성공에 호소하는 논증의 기반을 약화시킨다. 의식이 물리 과학의 탐구 영역의 바깥에 방치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물리 과학이 대단히 잘 해냈다는 사실은 그것이 의식 자체를 적절히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할 아무 이유도 제공하지 않는다.


의식은 독자적으로 하나의 소여인가?


데이비드 차머스가 의식을 '어려운 문제'라고 선언한 지 이십 년이 되었다. 그것이 어려운 문제라는 것에 대한 광범위한 동의가 있지만, 이것은 흔히 신경과학을 조금 더 수행하기만 하면 그 문제는 사라질 것이라는 모호한 진술이 수반된다.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의식이 제3자의 관찰 및 실험의 소여와 동일한 층위에서 독자적으로 하나의 소여인지 여부를 결정할 시기이다.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과 키스 프랭키쉬(Keith Frankish) 같은 철학자들은 의식이 현존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이것은 어려운 문제에 대한 그들의 해결책이며,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정합적인(꽤 미심쩍지만) 견해이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의식이 현존한다고 믿고 있지만 그것의 현존을 설명하기 위한 가설을 구상하기를 거부한다. 대신에 그들은 의식을 우리가 이미 믿고 있는 사물들, 관찰 및 실험의 소여를 설명하기 위해 가정된 사물들의 세계로 압착시키고자 한다. 이런 연구 기획은 지금까지 잘 되지 않았다. 의식의 존재를 믿는다면, 그것의 현존을 설명하기 위한 가설을 구상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범심론은 이것을 행하는 가장 유망한 방식인 듯 보이는데, 영혼의 가정과 관련된 유명한 난제들을 피하게 된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잘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 이것을 알아보는 데 필요한 진지한 학제적 연구가 물질론적 패러다임의 이데올로기적 집요함, 갈릴레오가 17세기 가톨릭 교회로부터 겪은 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이데올로기적 집요함의 방해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