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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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고프: 오늘의 에세이-전자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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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0. 21.


전자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Do Electrons Dream of Electric Sheep?


―― 필립 고프(Philip Goff)


범심론은 의식이 모든 물질의 근본적인 특징이라는 견해이다. 인간은 풍부하고 복잡한 경험을 겪고, 말은 그보다 덜 겪고, 쥐는 그보다 덜 겪는다. 유기체가 더 단순해짐에 따라 어떤 지점에서 의식의 빛이 갑자기 없어질 것이고, 그래서 더 단순한 유기체는 어떤 주관적 경험도 전혀 겪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의식이 빛이 결코 전적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파리, 곤충, 식물, 아메바 그리고 박테리아를 거쳐 유기적 복잡성이 감소함에 따라 약해지는 것도 가능하다. 범심론자의 경우에 이런 약해지지만 결코 없어지지 않는 연속체가 무기적 물질로 더 연장되는데, 근본적인 물리적 존재자들―아마도 전자와 쿼크―은 대단히 단순한 자체 본성을 반영하는 대단히 원시적인 의식 형태들을 갖추고 있다.


범심론은 분명히 정합적이지만, 그것이 참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있는가?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사>에 기고한 최근의 글에서 나는 범심론을 옹호하기 위해 내가 '단순성 논증(simplicity argument)'이라고 부르는 것을 제시했다. 이 논증의 중요한 전제는, 물리 과학이 물질의 본성에 관해 일반적인 생각보다 더 적게 말해 준다는 테제이다. 대중의 마음에, 물리학은 공간, 시간 그리고 물질의 근본적인 본성에 대한 완전한 설명을 제공하는 도중에 있다. 그렇지만 성찰해보면, 물리 과학은 사물이 행하는 것에 전적으로 관여한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물리학은 물리적 존재자들의 행동을 대단히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게 하는 수학적 모형들을 제공하지만, 그런 존재자들의 내재적 본성―그것들이 자체적으로 어떠한지―에 관해서는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검약성 테제(austerity thesis)'라고 부른다.


검약성 테제는 어떻게 범심론에 이르게 되는가? 물리 과학은 물질의 내재적 본서엥 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반면 내성(內省)은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 내성 중에 각자는 자신의 의식적 경험의 실재―자신의 느낌, 감각 그리고 지각적 경험―를 직접 자각한다. 이원론(마음은 물리적 실재에서 분리된 별개의 것이라는 견해)의 허위성을 가정하면, 나의 의식적 경험은 내 뇌의 내재적 실재의 일부이다. 그리고 검약성 테제를 가정하면, 이것이 우리가 물질의 내재적 본성에 관해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인데, 물질 가운데 일부―뇌 속의 물질―는 의식을 포함하는 내재적 본성을 갖추고 있다. 이런 인식론적 출발점에서 바라보면, 뇌 바깥의 물질의 내재적 본성에 관한 가장 단순한 절약적 사변은 그것 역시 의식을 포함하는 본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이 뇌 속의 물질과 연속적이라는 것이다. 물질이 그저 한 종류가 아니라 두 종류의 내재적 본성을 갖추고 있다고 가정하기 위해서는 이유가 필요하다.


물론, 어떤 철학적 주장의 경우와도 마찬가지로, 이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많은 방식이 있다(운이 좋게도 나는 <<의식과 근본적 실재(Consciousness and Fundamental Reality)>>라는 내 책에서 그것들을 모두 결정적으로 해결하였다.) 여기서 나는 특별히 지속적인 불평에 대해 집중하고 싶다. 도대체 왜 물질이 우선 내재적 본성을 갖추고 있다고 가정해야 하는가? 물리학이 그저 물질이 행하는 것을 말해준다면, 그것이 물질에게 존재하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일단 전자가 행하는 것을 알게 된다면 전자가 무엇인지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아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견해―철학적 문헌에서 '인과적 구조주의(causal structuralism)'로 알려져 있는―에 따르면, 물리적 존재자들은 존재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실행자이다. 인과적 구조론은 약간의 적응이 필요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것은 정합적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이어지는 글에서 나는 인과적 구조주의자가 서술하는 우주는 이해 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고자 할 것이다.


인과적 구조주의에 대한 순환성 반대 논증


인과적 구조주의자는, 실재의 근본적인 층위에서 발견하게 되는 모든 것은 성향(disposition)이라고 믿는다. 성향은 그것이 객체로 하여금 어떻게 행동하기 쉽게 만드는지에 의거하여 특징지워지는 특성이다. 취약성과 가연성은 성향에 대한 일상적 사례인데, 취약한 사물은 부서지기 쉽고(어떤 환경에서) 가연성 사물은 연소되기 쉽다(어떤 환경에서).


물리학은 성향에 의거하여 물리적 특성을 특징짓는다. 예를 들면, 질량은 끌어당기는 성향(무거운 사물들은 서로 끌어당긴다)과 가속에 저항하는 성향에 의거하여 특징지워지고, 음(陰)전하는 (양으로 대전된 것을) 끌어당기는 성향과 (음으로 대전된 다른 것을) 밀어내는 성향에 의거하여 특징지워진다. 단순성의 고려에 의해 고무된 인과적 구조주의자는 질량과 음전하 같은 기본적인 물리적 특성들은 성향일 뿐이다. 질량이 그저 성향이라면, 그것의 본성은 원칙적으로 물리학의 수학적 모형에 의해 완전히 포착될 수 있다.


인과적 구조주의와 관련된 문제는 물질의 본성을 특징짓고자 하는 그것의 시도가 유해한 회귀 아니면 악순환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인과적 구조주의에 의하면, 어떤 성향의 본성은 그것이 초래하는 행동―철학자들이 그것의 "표현(manifestation)"이라고 부르는 것―을 알게 될 때에만 이해하게 된다. 예를 들면, 가연성의 표현은 연소인데, 가연성이 연소를 통해서 표현된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만 가연성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렇지만, 인과적 구조주의를 가정하면, 무엇이든 한 성향의 표현은 다른 한 성향일 것이고, 그 성향의 표현도 다른 한 성향일 것이며, 끝없이 이어진다. 연소가 무엇인지 알게 될 때에만 가연성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연소의 수많은 인과적 결과, 예를 들면 재와 연기의 산출을 알게 될 때에만 연소가 무엇인지 알게 되며, 재와 연기의 인과적 결과를 알게 될 때에만 그것들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데, 영원히 이어진다. 책임이 끊임없이 전가되고, 그래서 무엇이든 어떤 특성의 본성에 대한 적절한 이해는 전능한 존재자의 경우에도 불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과적 구조주의자의 세계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을 한 가지 사례로 분명히 해보자.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질량과 시공간은 서로 인과적 상호작용의 관계를 맺고 있는데, 질량이 시공간을 휘게 하고, 다음에는 시공간의 곡률이 질량을 갖춘 객체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질량이란 무엇인가? 인과적 구조주의자의 경우에, 질량이 행하는 것을 알게 될 때, 즉 그것이 시공간을 휘게 하는 방식을 알게 될 때 질량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러나, 그저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형이상학적으로 이것이 무엇에 해당하는지 정말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공간 곡률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시공간 곡률이란 무엇인가? 인과적 구조주의자의 경우에, 시공간 곡률이 행하는 것을 알게 될 때에만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는데, 그것은 시공간 곡률이 질량을 갖춘 객체들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에 대한 이해를 포함한다. 그러나 이것은 질량이 무엇인지 알 때에만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진퇴양난에 처하게 되는데, 시공간 곡률이 무엇인지 알 때에만 질량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지만, 질량이 무엇인지 알 때에만 시공간 곡률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 G. K. 체스터턴(Chesterton)은 '우리는 모두 서로의 빨래를 걷어들임으로써 살아갈 수는 없다'고 말했다.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순환성에 대한 이런 우려를 명시적으로 표명할 때 이 착상을 이용했다. '지금까지 "실재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어떤 것들을 여타의 것들에 대한 법칙에 불과한 것들로 바꾸는 다양한 방식들이 가능하다. 명백히 이 과정에 대한 한계는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세계의 만물은 그저 서로의 빨래일 것이다.'


전일론적 반응


순환성 이의 제기에 대해 알게 되는 가장 흔한 반응은 그것이 전일론(holism)에 반대하는 보증되지 않은 편견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전일론'이라는 낱말은 약간 유동적이지만, 이 맥락에서는 사물들이 상호규정된다―각 사물의 바로 그 정체성은 그것이 다른 모든 것과 맺는 관계의 문제이다라는 의미에서는 견해로 간주할 수 있다. 전일론자의 경우에, 존재자들은 다발로 오는데, 무엇이든 한 사물의 본성은 다른 모든 것의 본성과 별개로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인과적 구조주의는 일종의 전일론을 함축하는 듯 보일 것인데, 각 사물은 자체의 효과에 의거하여 관계적으로 규정되고, 이 효과는 자체의 효과에 의거하여 규정되고, 이 효과 역시 자체의 효과에 의거하여 규정되며, 그래서 결국 순환하여 되돌아올 때까지 계속하여 관계적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과적 구조주의자들은, 순환성 이의 제기는 질량 같은 주어진 특성에 대한 설명을 여타의 것들과 별개로 요구함으로써 그들의 견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고 주장한다. 인과적 구조주의는 전일론을 함축하고, 전일론은 사물의 본성은 별개로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래서 시공간 곡률과 별개로 질량에 대한 설명의 요구 자체가 인과적 구조주의는 거짓이라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는 듯 보일 것이다. 인과적 구조주의가 참이라면, 질량과 시공간 곡률(그리고 다른 모든 것)은 '한꺼번에' 규정되어야 한다.


나는, 전체적으로 고찰되는 물리적 특성들에 의해 실현되는 인과적 관계들의 추상적 패턴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에 의거하여 질량을 고유하게 규정―이른바 판독―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질량이 행하는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인과적 구조주의에 따르면, 물리적 특성은 그것이 구체적인 물리적 세계에 미치는 영향으로써 행하는 것에 의거하여 규정된다. 그러므로 인과적 구조주의가 참이라면, 어떤 물리적 특성의 본성을 알기 위해서는 그 특성이 인과적 관계들의 추상적 패턴에서 차지하는 위치뿐 아니라 그것이 행하는 것도 알 필요가 있다.


이것은 매우 추상적인 논의로 전개되어 가고 있고, 그래서 우스울 정도로 간단한 일례를 취하자. 세 개의 성냥곽이 있는데, 첫 번째 곽은 'SPLURGE'를 포함하고, 두 번째 곽은 'BLURGE'를 포함하며, 세 번째 곽은 'KURGE'를 포함하고 있다고 하자. 여러분은 순진하게 내게 묻는다. '그래요, SPLURGE가 무엇입니까?' 나는 대답한다. 'SPLURGE는 BLURGE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BLURGE가 무엇인지 알게 될 때까지 내 대답을 정말로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여러분의 다음 질문은 이렇다. '좋습니다. 그런데 BLURGE는 무엇입니까?' 나는 응답한다. '오, 그것은 쉽습니다. BLURGE는 KURGE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KURGE가 무엇인지 알게 될 때까지 내 대답을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약간 짜증이 나기 시작하면서―이제 알려주기를 요구한다. '도대체 KURGE는 무엇입니까???!!' 내 응답은 이렇다. '그것은 SPLURGE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여러분은 이 대화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고 결정하는 것에 대해서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논의가 SPLURGE, BLURGE 그리고 KURGE 사이에 현존하는 인과적 관계들의 추상적 패턴에 대해 무언가를 가르쳐 주었더라도, 그것들 가운데 어느 것이라도 그것이 실제로 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지한 채로 남게 된다. 인과적 구조주의에 의해 제시되는 물리적 실재에 대한 서술의 경우에도, 더 복잡한 방식일지라도, 마찬가지로 참이다. 인과적 구조주의가 참이라면, 무엇이든 어떤 것이 행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획득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그래서 어떤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를 획득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것이 이해 불가능한 견해가 아니라면, 나는 무엇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


과학에 대한 새로운 구상을 향하여


오백 년 동안 물리 과학은 실재의 인과적 구조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산출했다. 이 지식 덕분에 우리는 꿈꾸지 못한 방식들로 세계를 조작할 수 있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사회를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변형한 특별한 기술을 생산했다. 이런 경이로운 발달은 우리의 형이상학적인 갈망에 적나라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작동하는 무언가를 마침내 찾아내었고, 그래서 자체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실재의 본성을 결국 알아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갖추게 되었다.


슬프게도, 그것은 물리 과학이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리 과학은 갈릴레오부터 줄곧 물질이 무엇인지 말해주고자 하는 노력을 그만두고 그것의 추상적인 인과적 관계들의 지도를 그리는 것에만 집중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매우 성공적이었다. 자연적인 인간의 호기심은 이것에 머무를 수 없다. 어떤 시점에서 인간 사회는 다시 한 번 실재의 본성―물질이 행하는 것뿐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을 이해하고자 하는 아름다운 계획으로 복귀할 것이다. 그리고 명백히 더 사변적인 그런 계획의 맥락에서 나는 범심론에 내기를 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