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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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소 비에이라: 오늘의 에세이-과정인가 아니면 사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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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1. 13.


무엇이 더 근본적인가: 과정인가 아니면 사물인가?

When is more fundamental: processes or things?


―― 첼소 비에이라(Chelso Vieira)


형이상학은 실재의 구성 요소들을 검토함으로써 현존이 작동하는 방식, 심적 존재자와 물리적 존재자 사이의 구별짓기 그리고 존재와 실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철학의 난해한 분야인 것만은 아닌데, 인간들은 세계를 헤쳐나가기 위해 형이상학적 가정들을 사용한다. 무엇이 현존하는지 그리고 무엇이 근본적인 것인지에 대한 가정들은 우리 삶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사실상 우리의 형이상학적 가정들을 덜 의식할수록 우리는 그것들에 더욱더 종속되어 있다.


서양 형이상학은 실체라는 범주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흔히 세계를 원자적 분자, 자연적 종, 은하 들로 구성된 사물들의 세계로 간주한다. 객체는 범형적인 존재 양식, 대우주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이다. 현존하는 것은 객체로서 현존한다. 즉, 사물은 어떤 종의 것인데, 그것은 어떤 특정한 성질과 잘 규정된 공간적 및 시간적 한계를 갖는다. 예를 들면, 피도(Fido)는 내 개인데, 그는 회색이며 일 년 전에 태어났다. (그런 단순한 진술이 실체 형이상학 내에서 일단의 형이상학적 논쟁을 초래할 것라는 점을 지적할 가치가 있는데, 실재론자는 '개'라는 자연 종 같은 보편자들이 존재한다고 믿는 반면에 유명론자는 그것들이 지성적 추상물일 뿐이라고 믿는다.)


실체 형이상학이 서양의 '공통 감각'을 떠받치는 듯 보이지만 나는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한 잔의 물에 대한 상투적인 것을 고찰하자. 절반이 비어 있는가 아니면 절반이 차 있는가? 그 물음은 낙관적 해석 아니면 비관적 해석에 대한 근거로 쓸모 있는 사물들의 정적인 배치를 가정한다. 물리적 구성에 대한 올바른 서술에 관한 끝없는 논쟁이나 심리적 평가의 정당성에 관한 논쟁에 관여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잔의 물'이라는 고립된 틀이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면 어쩔 것인가? 누구나 비게 될 채워진 잔보다 채워지게 될 빈 잔을 선호할 것이다. 변화에 관한 정보를 결여하고 있는 어떤 분석도 핵심을 놓치는데, 그것이 바로 실체 형이상학이 놓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과정 철학자들은 세계를 정적인 무관한 품목들의 집합체로 간주하는 것을 넘어서 세계를 구성하는 과정들을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객체가 아니라 과정이 근본적인 것이다.


소크라테스 이전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과정 형이상학에 대한 가장 유명한 이미지를 제공한다. 그는 말한다. '같은 강에 두 번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현존은 변화에 의존하기 때문인데, 두 번째 들어가는 강은 최초에 들어갔던 강에서 바뀌었다(그리고 여러분도 도중에 변했다). 그리고 실체 철학자들은 실재의 가장 근본적인 구성 요소들을 정위하기 위해 가장 작은 구성 객체들을 탐색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지만, 과정 철학자들은 이것이 불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현대 물리학자들도 그렇다. 현재 전자는 어떤 장 속의 에너지 다발로 이해되며, 그리고 양자 진공 요동은 다발 없는 장은 존재하지만 장 없는 다발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한다. 사물은 과정으로 환원될 수 있는 듯 보이는데, 역은 그렇지 않다. (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서술했듯이, 우리는 '사물' 대신에 '사건'에 관해 생각해야 한다.)


실체 형이상학의 경우에 변화는 되풀이되는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전통적으로 보편자가 그 문제를 교묘히 회피하는 대중적인 방식이었다. 이런 정적인 존재자는 정확히 규정하기 어렵지만, 많은 다양한 특수한 사물에서 예화되는 '초사물(hyper-thing)'으로 간주될 수 있다. 예컨대 유형, 종류 그리고 관계처럼 보편자는 특수자들이 공유하는 것이다. 보편자는 본질적으로 특수자와 다른데,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특수자―피도라는 내 개와 같은―는 생성과 부패를 겪지만 종―보편자―은 영원하다고 주장했다. 특수한 이 사례는 과학이 과정 형이상학을 선호하는 듯 보이는 다른 일례를 제공한다. 진화론 덕분에 종은 불변하고 영원한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다. 종은 진화한다. 종은 변화한다. 결국 개는 늑대로부터 진화하여 전적으로 다른 종을 구성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실체보다 변화의 패러다임을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


과정 형이상학은 다른 중요한 철학적 관념들을 재평가하게 만든다. 동일성을 고찰하자. 사물이 자기 동일성을 상실하지 않은 채 변화하는 까닭을 설명하기 위해 실체 철학자들은 변화하는 내내 여전히 그대로 있는 어떤 근본적인 핵심―본질―을 상정할 필요가 있다. 테세우스의 배가 예시하듯이, 이 핵심이 어떠한지 적시하기 쉽지 않다. 어떤 배가 긴 항해를 계속하고, 그래서 상당한 수리를 필요로 하는데, 새로운 판자가 낡은 판자를 대체하고, 새로운 노가 부패한 노를 대체하는 등의 수리 결과 때문에 그 배가 항구로 귀환할 무렵에는 출발했을 때 그 배에 속했던 단 하나의 조각도 남지 않게 된다. 물질적으로 완전히 달라졌는데도 이것은 동일한 배인가? 실체 철학자들의 경우에 이것은 일종의 역설인 반면에 과정 철학자들의 경우에 이것은 동일성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물론 그것은 동일한 배이다. 동일성은 어떤 사물의 정적인 자체 등가성이 더 이상 아니다. 결국, 수리되지 않았다면 그 배는 자체의 기능성을 상실했었을 것이다. 대신에, 독일 철학자 니콜라스 레셔(Nicholas Rescher)가 <<과정 속의 관념들(Ideas in Process)>>(2009)라는 책에서 주장하듯이, 동일성은 바로 프로그램적 전개이다. 즉, 어떤 과정의 동일성은 자체 프로그램의 구조적 동일성이다. 다른 특별한 조건이 없는 한 모든 강아지는 개인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결정론적인 것으로 간주될 필요가 없다. 과정들 사이의 상호작용들이 변이를 위한 여지를 개방한다고 레셔는 주장한다.)


더미의 역설(paradox of the heap)이 예시하듯이, 과정은 두 가지 상이한 사태 또는 두 객체 사이의 간격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어떤 모래 더미를 택해서 모래 알갱이 하나를 제거하자. 그것은 여전히 더미인데, 알갱이 하나는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러나 그 제거 행위를 충분히 여러 번 반복하면 결국에는 단 하나의 알갱이가 남게 될 것이다. 명백히 이것은 더미가 아니다. 언제 그것은 더미가 아니게 되는가? 사태의 마지막 상태가 아니라 그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더미와 비(非)더미 사이의 경계를 정확히 지적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개체도 늑대와 개 사이의 정확한 전환점이 아니다.) 특히 이것은 우리의 자연 종 분류에서 작동하는 무의식적인 추상화에 대해 경고한다. 앙리 베르그손(Henri Bergson) 같은 과정 철학자들은 이런 부정적인 결론에 머무르는데, 과정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할 수 있을 뿐이라고 믿는다. 어쨌든, 덴마크 철학자 요한나 자이브트(Johanna Seibt)가 지적하듯이, 과정에 집중하는 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시각을 필요로 한다는 점은 정말 옳을 것이다.


세계를 상호연계된 과정들의 다양체로 간주하는 것은 과학적 및 철학적 이점이 있지만, 더 산문적인 편익도 존재한다. 과정 철학은 더 장기적인 기간, 흐릿한 경계 그리고 연계된 관계 들을 살펴보도록 요청한다. 프로그램적 과정―결정론적이지는 않는―으로서의 동일성은 되풀이되는 작은 변화들을 통한 혁신을 환영한다. 이런 형이상학적 가정 하에서 의미 있는 생은 '진정한' 자아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경계를 확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