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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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뒤프레: 오늘의 에세이-변태의 형이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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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2. 10.


변태의 형이상학

Metaphysics of metamorphosis


―― 존 뒤프레(John Dupre)


철학이 나무라면 형이상학과 인식론은 그것의 두 가지 주요한 가지이다. 인식론은 우리가 세계에 관해 어떻게 수 있는지 묻는다. 형이상학은 가장 근본적인 층위에서 세계가 어떠한지 파악하고자 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졌고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면, 인식론자는 일어난 일에 대한 증거의 질을 검토하기 시작할 것이다. 한편, 형이상학자는 그것이 소리를 내었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나와 같은) 과학철학자들은 사물과 사건의 현존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우리는 인식론을 행한다. 우리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지식에 집중한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물음들을 제기한다. 실제로 그렇다면, 왜 과학은 사물을 알아내는 데 그토록 성공적인가? 이런 성공의 근저에 놓여 있는 방법이 존재하는가? 가치는 과학적 탐구를 어떻게 형성하는가? 주류 형이상학은 우리를 제자리에 붙들어 놓는데, 일반적으로 과학적 탐구는 정말로 대단히 협소하여 현존, 존재 그리고 실재에 관한 심오한 의문들을 다룰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과학이 바로 우리가 이런 의문들에 대답하기―특히, 생물학과 생화학의 기묘함과 복잡성으로를 시작해야 하는 지점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암의 기원에서 개인적 정체성의 본성에 이르기까지 생명과학은 항상 그 수가 늘어나는 고립된 사실들을 제공하는 것만은 아니다. 또한 생명과학은 세계가 실제로 어떠한지에 대한 더 넓은 그림―사물들이 어떠하고 그것들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에 대한 많은 일반적인 가정을 반박하는 그림을 직조하기 위한 최선의 데이터도 제공한다. 바다에서 물고기를 처음 끌어올릴 때 우리는 현명하게도 그런 이례적인 존재자가 어떻게 그곳에 있게 되었는지에 대해 불가지론적인 태도를 유지할 것이다. 많은 상이한 종류의 물고기를 수천 마리 끌어올린 후에 우리는 파도 아래 저곳에 전적으로 기묘한 생명 세계가 존재한다고 추론할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과학의 목적은 세계에 관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에 확실히 과학은 우리 실재의 가장 깊은 층위들에 관한 무언가, 즉 형이상학을 말해줄 것이다.


때때로 '자연주의적 형이상학(naturalistic metaphysics)'으로 불리는 과학 기반 형이상학이라는 이 계획은 지금까지 놀랍도록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브리스톨 대학의 철학자 제임스 래디먼(James Ladyman)과 케이프타운 대학의 철학자 돈 로스(Don Ross)는 <<모든 것은 가야 한다(Every Thing Must Go)>>(2007)라는 책에서 강력을 변론을 제시한다. 그 책이 예시하듯이, 그 논쟁은 전문적이고 신랄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자연주의적 형이상학을 비판가들로부터 변호하기보다는 그것이 철학사의 케케묵은 것들 가운데 하나―실재는 아무튼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사물들로 이루어져 있는가, 아니면 사물은 우리 지각이 전개되는 무질서한 과정들의 흐름으로부터 뽑아내는 일시적인 형태일 뿐인가?―에 대한 해답을 향해 조금씩 움직이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보여줄 것이다.


시작할 좋은 지점은 본질주의(essentialism)에 대한 의문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철학적 전통은 본질, 즉 사물을 규정하는 특성―<<인간 지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1689)이라는 책에서 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가 서술하듯이, 무엇이든 어떤 것의 존재,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것, 그것의 정체을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로크는 본질이 실재적인 것이라는 점은 의심하지 않았더라도, 그것을 발견하는 데 필요한 '미시적 눈'을 결여하고 있는 우리가 도대체 그런 본질을 식별할 수 있을지 의심쩍게 여겼다.


그런데 개구리를 개구리로 만드는 어떤 내부 본성과 두꺼비를 두꺼비로 만드는 무언가 다른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 둘 사이에 본성의 심한 차이가 정말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이것들은 자연적 세계의 거주자들 가운데 다소간 실용적인 구분, 실질적으로 상이한 방식으로도 마찬가지로 잘 이루어졌을 구분을 짓는 말에 불과한 것인가? 자연주의적 형이상학의 경우에 이것은 결국 경험적 체험, 즉 과학으로부터 해결되어야 하는 의문이다.


단백질의 사례를 살펴봄으로써 본질주의의 문제를 더 구체화할 수 있다. 단백질은 유기적 세계의 일벌인데, 세포들 사이의 신호 수송에서 화학적 반응의 촉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담당하고 있다. 단백질은 아미노산으로 알려져 있는 긴 분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고리로 연결되어 극도로 복잡한 모양으로 접힌다.


그렇다면 단백질이란 무엇인가? 과학자들은 아미노산들의 순서를 파악하고, 구조 또는 형태의 지도를 그리며, 이런 특성들의 조합이 단백질로 하여금 자체의 특정한 생리학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을 관찰함으로써 각 종류의 단백질을 규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익숙하다. 불행하게도 상황은 전적으로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진부한 은유는 단백질(효소 형태의)이 '자물쇠와 열쇠'처럼 작동한다는 것인데, 그래서 그것이 작용하는 것에 꼭 맞게 된다. 그러나 점점 더 그 둘이 사실상 서로 적응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인데, 자물쇠 속의 열쇠라기보다는 즉석에서의 협상인 듯 보인다. 게다가 다양한 유형들의 단백질은 '겹치기로 작업'할 수 있는데, 상이한 상황에서 상이한 작업을 수행한다. 단백질의 능력은 흔히 그것의 맥락에 의존한다. 예를 들면, 인산포도당이성화효소는 세포 내부에서 에너지를 방출하는 과정에서 수행하는 역할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세포 외부에서는 신경 성장의 촉진 같은 최소한 네 가지 구별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범주적 순수주의자에게 무엇보다도 최악의 것은 '고유하게 무질서한 단백질', 즉 한 형태에서 다른 한 형태로 빠르게 전환하는 모양 전환 거대 분자의 발견이었다. 현재의 추정은 진핵 생물 단백질의 40%가 이런 식으로 행동할 수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10%의 단백질이 그러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런 데이터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주류 형이상학에 진입하게 되면 그런 실험적 증거는 실제로 중요하지 않을 것인데, 과학은 너무 제한적이고 편협하며 틀리기 쉬워서 무언가가 무엇인지 또는 무엇이 아닌지에 관해 참으로 근본적인 것은 전혀 말해주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자연주의적 형이상학자의 경우에는 이런 끊임없는 생물적 흐름의 관측이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의 철저한 점검에 대한 필요성을 가리킨다. 자연주의적 형이상학은, 형태와 기능에 의거하여 고정된 본질을 갖추고 있는 사물을 탐색하는 대신에 훨씬 더 역동적인 세계상―여기서는 어떤 '사물성'도 전적으로 일시적인 것이다―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복잡성의 한 층위로 올라갈 때 '사물'은 보존될 수 있을까? 예전에 본질주의자들은 유전학이 다양한 유기체 사이의 차이점들에 대한 해결의 열쇠를 제공할 것이라고 희망했다. 그렇지만 실제적인 유전학적 지식은 사라졌다. 종 사이에서 가장 많이 변화하는 유전자는 관련 종 내에서도 가장 많이 변화하는 경향이 있고, 그래서 유전자만으로는 개별 유기체를 한정할 수 없을 것이다. 진화는, 충분히 넓은 시각을 취한다면 종 사이에 어떤 예리한 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준다. 버섯과 나비의 경우에, 또는 고사리와 코끼리의 경우에, 원칙적으로는 일련의 연속적인 조상을 어떤 최초의 공통 조상까지 거슬러 추적할 수 있을 것인데, 그래서 내부에 어떤 예리한 경계도 없는 완전한 연계 순서를 제공할 수 있다. 예리한 경계가 전혀 없다면, 그런 경계를 규정하는 본질도 확실히 존재하지 않는다.


확실히 몇몇 '사물들'은 꽤 구별되고 지속 가능한 듯 보인다. 주기율표는 화학 원소들의 깔끔한 분류를 제공하는데, 그것들의 원자 번호에 의해 본질적으로 구별 가능할 것이다. 나는 생물과학의 외부에서는 '사물성'이 만연할 것이라는 점을 기쁘게 인정하며, 그리고 나는 오래된 이 논쟁 전체를 종결지을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내게 현대 물리학은 사물처럼 보이기보다는 훨씬 더 과정처럼 보인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지만 말이다). 내가 강력히 제기하는 유일한 주장은, 이런 심오한 의문들을 해결하는 최선의 방식은 경험 과학을 전면에 그리고 중심에 두는 것―막연한 철학적 추상물들에 의존하기보다는―이라는 점이다. 최소한 생물 세계에서는 '사물'의 형이상학이 지속되기 어렵다. 한때 이산적이고 개별적인 '단백질'과 '유기체' 들이 존재했지만, 현재는 대단히 역동적인 과정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


생물학이 우리로 하여금 실재에 대한 과정 시각을 채택하도록 어떻게 재촉하는지 마무리짓기 위해 정반대 견해의 토태, 사물의 의미를 고찰하자. 서양 철학적 전통에서 사물은 최소한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갖는다. 첫째, 사물은 자기충족적이다. 그것의 현존은 자체의 내부적 특성에만 의존한다. 둘째, 사물의 기본 상태는 정지 상태이다.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은 사물이 동일한 상태로 머무르고 있을 때가 아니라 변화할 때이다.


생명은 이런 두 가지 조건 가운데 어느 것에도 부합되지 않는다. 자기의존성을 고려하자. 생명 체계는 열역학적 평형으로 알려져 있는 상태에서 멀리 떨어져 존재하는데, 자체 에너지가 가장 넓은 가능 공간에 걸쳐 확산되는 대신에 특정한 영역에 집중되고 혈관이나 신경계 같은 규정된 경로를 따라 흐르게 된다. 초 물리학에 관한 한, 그런 현상은 매우 비개연적인 것이다. 이런 이례적인 배열을 유지하는 것은 끊임없는 활동 또는 신진대사를 필요로 하는데, 그것은 결국 유기체가 섭취, 호흡, 광합성 등을 통해서 자체 환경으로부터 에너지를 추출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독립성의 어떤 허식도 거짓임을 나타낸다.


유기체들은 자체 환경에 의존할 뿐 아니라 공생을 통해서도 서로 의존한다. 이끼와 산호 같은 친숙한 사례들을 넘어서 거의 모든 동물과 식물이 자체 현존을 위해 더불어 살고 있는 수많은 미생물에 의존한다. 우리 자신의 내장은 수조 개의 이런 미생물 세포가 살고 있으며, 우리 피부와 다양한 다른 틈과 구멍도 그렇다. 우리는 이런 미시적 동반자들을 형편 좋게 따뜻하고 보호받는 적소의 기회주의적인 거주자일 뿐이라고 간주하는 것에 익숙하지만, 우리의 내장 박테리아가 소화, 면역 체계 그리고 심지어 발달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라는 점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그것들이 우리 뇌와 신경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증거가 늘어나고 있다. 이런 발견 결과는 생명체가 자기충족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또는 심지어 그것이 어디에서 끝나고 다른 한 생명체가 어디에서 시작하는지 구획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우리가 사물성과 연계되어 있다면 이것은 전적으로 대단히 문제적인 것이지만, 상호의존적인 얽힌 과정들의 세계에서는 꽤 예상될 것이다.


정지 상태라는 기준도 마찬가지로 허약하다. 열역학적 비평형의 경우에 관측되었듯이, 정지 상태는 생명 체계에 대한 선택지가 결코 아니다. 정지 상태는 죽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모든 유기체―그리고 세포와 기관―는 생명 순환 주기가 있고, 그래서 상이한 단계에서 매우 상이한 특성들을 갖출 수 있다. 금발의 소년이 은발의 노인이 된다. 애벌레가 알에서 부화되어 번데기, 성충 그리고 마침내 곤충이 된다. 우리가 사물성을 신봉한다면, 그것은 무언가가 계속 현존하면서 자체의 근본적인 특성에 대해 어떻게 그런 심대한 변화를 겪을 수 있는지에 관한 실제적인 난처한 입장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과정은 어떤 중요한 것이 여전히 동일한 채로 있음으로써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과정을 계속해서 유지시키는 활동들 사이의 인과적 연계에 의해 지속된다. 예를 들면, 곤충의 생명 순환 주기의 매 단계에서 그것은 한 차례의 신진대사적 과정들 덕분에 자체의 현재 형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일단의 과정들이 애벌레에서 번데기로의 전환과 번데기에서 성체로의 전환을 관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적 세계를 어떻게 분할해야 하는가? 과정 시각으로 살펴보면, 생물학적 존재자(심장 세포, 심장, 인간)는 생물학적 활동의 역동적인 흐름에서 일시적인 소용돌이일 뿐이다. 그것이 예시하는 이런 패턴 또는 범주를 포착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여러분이 성취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에 따라서 여러분이 헤엄치고 싶은 소용돌이에 대한 실용적인 물음이 된다.


예를 들면, 합중국 동부에서는 일반적으로 대략 50개의 참나무 종이 구분된다. 임업, 통나무 생산 또는 정원수 선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의 경우에 이 범주들은 필수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또한 참나무는 두 개의 더 큰 집단, 적색 참나무와 백색 참나무로 분할되는데, 각 집단 내의 많은 종 또는 심지어 모든 종이 서로 교배할 수 있다. 그래서 한 종을 상호교배하는 개체들의 집단으로 간주한다면, 사실상 훨씬 더 적은 종, 아마도 단 두 개의 종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생식적으로 연계된 종들의 그런 집단은 때때로 '신가메온(Syngameon)'으로 불린다.) 다른 한편으로, 숙련된 분류학자는 일반적으로 인정된 50개의 종뿐 아니라 수많은 잘 알려진 잡종과 그렇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잡종도 구별짓기를 원할 것이다.


과정 형이상학의 아름다움은, 이런 종류의 유연성과 비결정성을 인식할 수 있지만, 현실이 허용하는 만큼 분석적 예리함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세계에 관한 정말로 두드러진 것은 사물이 얼마나 많이 변화하는지가 아니라 사물이 어떤 기간 동안 안정성을 성취하는 방법이다. 시간에 따른 소용돌이의 특별한(일시적이지만) 현존에 대한 설명은 대부분의 생물학―그리고 사실상 의학―에 대한 꽤 훌륭한 서술이다.


과학이 형이상학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자연주의적 형이상학은 과학을 진작시킬 수 있는가? 일부 과학자들은 자기 세력권에 칩입하는 철학자들을 의심스럽게 여기지만, 더 환영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그리고 그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가장 단호한 경험주의자도 형이상학적 틀이 필요하다. 1936년에 기업가들은 변함없이 죽은 경제학자의 노예가 된다고 말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처럼 1967년에 이론 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인 J H 우저(Woodger)는 이렇게 적었다. '일반적으로 생리학자들은 그런 것들에 관해 결코 고민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사실상 그들이 "형이상학" 바로 위에 있을 뿐―그것 속에서 목을 내밀고 있다―일 때 스스로가 그것 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물성'은 메커니즘(mechanism)에 대한 탐색을 고무함으로써 과학적 작업에 매우 실제적인 영향을 미친다. 메커니즘은 상호작용들이 흥미로운 현상을 생성하는 정확히 배열된 일단의 안정한 것들이다. 흔히 과학자들은 메커니즘의 규명을 과학적 통찰의 황금 기준으로 간주한다. 이런 접근 방식은 확실히 장점이 있는데, 모든 것이 동시에 검토될 수는 없고, 그레서 과학은 전체의 잘 규정된 부분들에 대한 주의 깊은 집중에 의존한다.


그렇지만 기계론적 설명은 어떤 조건 아래에서만 성공적일 수 있다. 첫째, 구성 조각들이 관련 시기 동안 안정해야 한다. 그래서, 예를 들면, 대부분의 효소는 연루되는 세포 과정 동안 다소간 고정될 것이다. 그러나 효소도 생성에서 부패, 즉 단백질의 분해(proteolysis)―그것 자체가 다른 단백질들에 의해 촉진된다―로 이어지는 생명 순환 주기가 있다.


둘째, 기계론적 설명은 특정한 맥락 내에서만 적용될 수 있다. 사실상 이 단서는 놓치기 쉬운데, 왜냐하면 실험실은 관련 없는 화학물질이나 온도 변화 같은 왜곡 인자들을 차단할 수 있다는 목적을 갖고서 설계되기 때문이다. 정합적인 결과가 얻어지지 않는다면 연구자들은 시각이나 주변 소음 수준 같은 더 은밀한 인자들을 제어할 수 있다. 어쨌든 목적은 정합적인 결과를 산출하는 데 필요한 방식들로 안정화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연에서는 주변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과 독립적인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심장 박동의 항상성은 그것의 구성 조직과 분자 들의 적절한 거동에 의존할 뿐 아니라, 운동은 말할 것도 없이 그것에 산소와 관련 영양분을 제공하는 더 거대한 유기체에도 의존한다. 생명 체계가 변함없는 결과를 어떻게든 제공한다면, 그것은 항상 변화하는 상황에 적절히 반응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과정 사유는 의학에 대한 심대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과학적 설명의 부담을 본질에 기반을 둔 사물들의 상호작용에서 벗어나서 무작위적인 과정들이 아무튼 식별 가능한 패턴들로 결정화하는 방식으로 이동시키기 때문이다. 암을 고찰하자. 과학자들이 일반적으로 하듯이, 인간 환자를 하나의 메커니즘으로 간주할 때 우리는 '손상된' 내부 부분들, 흔히 유전자에서 질병의 원인을 찾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변화를 표준으로 생각하고 안정성을 설명할 필요가 있는 현상으로 생각한다면, 초점이 어떻게 이동하는지 주목하자. 생명 순환 주기에 걸친 인간 유기체의 지속성은 세포의 분열, 분화 그리고 파괴(세포자멸사)의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한 균형을 필요로 한다. '암'이라고 불리는 조건은 이런 균형의 다양한 실패, 어떤 유형 또는 유형들의 세포의 제어되지 않은 증식을 포함한다. 암은 특정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오작동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예상된 상태일 것인데, 그래서 우리가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은 자기조절이 암을 겪지 않는 우리의 두드러진 경향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사실상 쇠약해진 유전자들이 암의 원인인 만큼이나 암의 결과인 듯 보인다.)


미생물 질환의 경우에도 유사한 전환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인간 미생물 군집(microbiome)의 기능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먼 길을 걸어왔지만, 과학자들은 좋은 미생물, 나쁜 미생물 그리고 중립적인 미생물 사이의 구분을 약간 지나치게 열심히 제시하였다. 이런 시각에서 바라보면 의학의 과업은 쉬운 듯 보이는데, 그것은 나쁜 박테리아를 인식하고 파괴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몇몇 벌레들은 정말로 나쁘지만, 미생물이 여러분에게 좋은지 아니면 나쁜지 여부는 흔히 맥락의 문제이다. 내장에서 유익한 박테리아가 몸의 다른 부분들에 침입하면 사실상 매우 좋지 않은 것이 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미생물은 홀로 작동하지 않는다. 여러분의 내장에 수천 개의 상이한 변종이 존재하며, 그리고 이것들은 흔히 상호연계된 기능들을 수행한다. 결과적으로, 어떤 특수한 변종이 행하는 일과 그것이 작용 대상인 숙주에게 유익한지 여부는 미생물 공동체의 전체적인 구성에 의존할 것이다. 게다가, '미생물'이라는 낱말은 박테리아에 적용되는 경향이 있지만, 건강을 부여하는 미시적 존재자들에 대한 조사에 있어서 바이러스를 포함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는 의식이 고양되고 있다. 많은 바이러스―박테리아 개체군을 조절하는 파지 같은가 인간 생명에 대해 유익한 듯, 아마도 필수적인 듯 보인다.


이런 사례들은 생물학으로 형이상학을 탐지하는 것과 형이상학으로 생물학을 탐지하는 것이 과학적 및 철학적 물음들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에 중대한 차이를 생성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자연주의적 형이상학을 채택하기로 선택하는 것은, 정의상, 궁극적으로 자신의 세계상을 최선의 과학에 정초하는 것이다. 자연주의적 형이상학자는 자기 꼬리를 먹고 있는 뱀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이 두 가지 영역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게 될 수 있을까?


나는 두 가지 가능한 답변을 제시한다. 하나는 과학과 형이상학 사이의 관계는 변증법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둘 가운데 어느 것도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서로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과정에 대한 나의 열정을 감안하면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닐 것인데, 변증법은 생물학적 조직 위계의 상이한 층위들에 있는 요소들 사이의 관계와 같은 모든 종류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 적실하다. 세포 속의 분자들은 세포의 총체적인 거동을 설명하는 데 필수적이지만, 동시에 그런 부분들의 본성은 그것들이 세포 자체의 총체적인 본성에 의해 형성되는 방식들을 분석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나의 두 번째 답변은 약간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형이상학은 과학 연구의 구체적인 것들보다 훨씬 더 일반적인 것이다. 성공적인 현대 과학은 매우 특정한 문제들에 집중의 깊이를 요구한다. 불가피하게도 여러분은 이런 집중에 대해 협소한 시각이라는 비용을 치른다. 그렇지만 자연주의적 형이상학의 목적은 상이한 협소한 전문 분야들의 넓은 지형에서 비롯되는 통찰들을 화해시킴으로써 훨씬 더 넓은 시각을 제공하는 것이다. 자연주의적 형이상학은 과학적 이해 또는 최소한 과학의 실질적인 부분에 대한 정합적인 그림―단일한 물고기의 생리학뿐 아니라 해저 생태계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을 제공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런 일반적인 그림은 과학의 어떤 한 영역이 가정하는 것과 일치할 수도 있고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여전히 과학 자체의 실천에 대한 구체적인 의미를 함축할 것이고, 그래서 더 넓은 그림과 갈등을 일으키는 과학의 부분들에 대한 깊은 비판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의 나무 아래에는 인식론자와 형이상학자 둘 다를 위한 여지가 있다. 그러나 생명 세계에 관한 한, 두 종류의 철학자는 그늘에 겸손한 과학자를 위한 여지를 만드는 것과 관련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번째 동료로부터 배움으로써 우리는 생물학이 기계의 딱 한 조각에서 한 가지 정확한 역할을 수행하도록 주의 깊게 조형된 레고 조각들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 오히려 생명체는 많은 단백질 형태를 취할 수 있는 과정―혼돈의 바로 옆에서 일시적으로 역동적이고 항상 변화하지만 균형이 잡혀 있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