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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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모 피글리우치: 오늘의 인용-스토아주의적 윤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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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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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말하자면, 도덕의 기원에 관한 현대적 논의에서는 그 쟁점을 바라보는 네 가지 방식, 즉 철학자들이 "메타윤리적" 입장이라고 부르는 것이 존재하는데, 회의주의자, 합리주의자, 경험주의자 또는 직관주의자가 될 수 있다. 이 맥락에서 회의주의자라면 기본적으로 윤리적 판단이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 알 길이 전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도덕적 회의주의자는, 예를 들면, 사람들이 "살인은 그릇된 짓이다"라고 말할 때, 그들은 특수한 종류의 오류(범주 오류로 알려져 있는)를 범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사실 진술(살인이 저질러졌다)과 가치 판단(무언가가 그릇된 것이다)처럼 서로에게 속하지 않는 것들을 뒤섞는 것이다. 명백히 회의주의자는, 존재/당위 간극은 연결될 수 없고, 그래서 사실상 사실은 판단과 아무 관계도 없다고 생각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도덕적 회의주의자는 만찬회에서 흔하지 않다.


합리주의는, 관찰하기와 실험하기에 대조적으로, 문제에 관해 그저 생각함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철학의 일반적인 입장이다. 이것은 이른바 안락의자 철학자의 상투형에 안성맞춤이지만, 너무 빨리 비웃지 말자. 논리학자와 수학자 들은 언제나 합리주의적 수단으로 새로운 지식을 산출하고, 그래서 문제는 정말로 윤리학이 수학이나 논리학과 같은 것인지 여부이다. 몇몇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는다.


흔히 합리주의에 대립되는 것은 경험주의인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경험적 사실, 즉 관찰과 실험에 의거하여 지식에 이르게 된다는 태도이다. 물론 과학은 궁극적인 경험주의적 분과학문이고, 그래서 경험적으로 윤리적 지식에 이르게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튼 과학적으로 기반을 둔 방식으로 존재/당위 간극을 연결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직관주의가 있는데, 윤리적 지식은 이성에 의한 것이든 관찰에 의한 것이든 어떤 종류의 추론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대신에 그것은 옳은 것과 그릇된 것에 대한 강한 직관의 형태로 우리에게 내장되어 있다. 그것은 어떠한 것일까? 글쎄, 예를 들면, 나는 다른 영장류 동물들이 위험이나 괴로움에 처해 있는 듯 보이는 비친족을 도우는 것 같은 원도덕적 행동을 나타낸다고 언급했다. 보노보 침팬지들이 옳고 그름에 관한 철학서를 읽은 적이 있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그저 본능적으로 행동하고, 그래서 그런 본능이 자연 선택에 의해 그들에게 내장되었을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소규모 영장류 집단들의 생존에 중요한 친사회적 행동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최근의 공통 조상을 보노보와 공유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자신의 조상들도 친사회적 행동이 적응적 행동인 소규모 집단으로 살았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에게 도덕적 본능이 있으며, 그리고 우리보다 선행하는 영장류로부터 그것을 물려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많이 확대 해석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윤리학에 대한 스토아주의적 접근 방식은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그것은 실제로 이 네 가지 매끈한 범주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상 스토아주의적 학설은 직관주의, 경험주의 그리고 합리주의의 조합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런데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은 가장 명백하게 회의주의자가 아니었다.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은 윤리학적 관심에 대한 "발달" 이론을 견지했는데, 그것에 따르면 우리는 본능(이성이 아니라)에 의해서만 인도되는 생을 시작하며, 그리고 그 본능은 자기 배려와 매일 상호작용하는 사람들―일반적으로 부모, 형제 자매 그리고 다소간확대 가족―에 대한 배려를 선호한다. 그 당시에 우리는 본질적으로 순수한 직관주의자처럼, 우리의 윤리학적 직관이 인간으로서의 바로 그 본성에 내장되어 있는 듯 행동할 것이다.


점진적으로 우리는 이성의 시기―대충 말해서, 6살에서 8살까지의 어린이일 때―에 접근함에 따라 자신의 관심사를 확대하도록 배우게 된다. 그 당시에 우리는 자신의 사유와 행동을 더 분명히 구별하기 시작하고 세계와 세계 속 우리의 지위에 관해 더 잘 파악하기 시작한다. 이 시점부터 줄곧 자기 성찰과 경험의 조합―즉, 합리주의적 과정 및 경험주의적 과정―에 의해 우리의 본능은 향상되며, 때때로 교정되기도 한다.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은, 우리가 심리적으로 그리고 지적으로 더욱 더 성숙할수록 균형이 우리의 본능에서 멀어져 (경험적으로 특징지워지는) 추리의 전개를 향해 더욱 더 이동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 인간임의 근본적인 양상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의 친교를 좋아한다는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다면 우리는 실제로 존재할 수 없었다는 더 깊은 의미에서 우리는 사회적이라는 점이다. 그 함축은, 우리가 정치체의 선을 위해 무언가를 행할 때 사실상 (아마도 간접적으로) 자신에게 득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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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시모 피글리우치(Massimo Pigliucci), <<스토아주의자가 되는 법(How to Be a Stoic)>>(2017), pp. 5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