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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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에드워즈: 오늘의 에세이-비트코인과 가치: 노동 이론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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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 3.


비트코인과 가치: 노동 이론 시각

Bitcoin and Value: A Labor Theory Perspective


―― 이반 에드워즈(Evan Edwards)


1758년에 출판된 프랑수아 케네(Francois Quesnay)의 <<경제표(Tableau Economique)>>라는 책―일반적으로 고전 정치경제학의 최초 텍스트들 가운데 하나인 것으로 간주된다―의 중심 테제는 농경이 부의 일차 원천이라는 것이다. 이 중요한 통찰은 최초의 근대 경제 이론인 중농주의(physiocracy)를 생성한 토대적 주장이었다. 퓌시스(Physis)와 크라토스(kratos)라는 그리스 낱말에서 파생된 그 술어는 "자연에 의한 지배"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정치경제학적 견지에서 고찰된 국민국가의 진정한 기능은 "자연적 질서"에 입각하여 정향되어야 한다. 자연의 패턴들을 식별하고, 농경적 재화의 인민에의 전달에 입각하여 도시들을 정렬하는 등의 일을 행하면 생산과 분배와 관련된 문제들이 없어질 것이다. 게다가 케네와 중농주의자들은, 모든 재화는 궁극적으로 자연 자원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지구로부터 이런 재화의 경작과 채굴이 가치의 일차 원천이라고 추정했다. 바로 여기서 고전 정치경제학에서 발견되는 근본적인 구별짓기―부(wealth)와 가치(value)의 구별짓기―를 볼 수 있다.


17세기의 원경제학 텍스트들에서 이미 부와 가치 사이의 암묵적인 구별짓기가 작동하고 있었다. 사용 가치(worth), 즉 부는 어떤 주어진 집단이나 개체가 보유한 유용한 재화의 축적를 가리켰다. 의복, 식량, 주택, 가축 등은 모두 부로 간주된다. 어떤 특수한 사물의 사용 가치는 그 객체가 어떤 특수한 욕구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갖추고 있는 역량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부는 일상 생활에서 사용될 수 있는 사물들을 가리켰을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가치, 즉 교환 가치는 해당 사물의 가격이나 비용―시장 환율―을 가리켰다. 18세기 및 19세기 경제학자들이 대체로 발견하게 될 재화에 대한 이런 평가는 재화의 생산에 투입해야 하는 노동의 평균량에 의거했다. 잠시 후에 그것이 왜 맞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케네의 경우에 부와 가치는 서로 매우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농사, 축산 그리고 채광이 다른 거래들을 작동시키는 원료를 제공하는 한 토지가 모든 부의 원천이었다. 부라는 관념을 제시하는 것에 덧붙여 <<경제표>>에 내장된 가치 이론도 찾아내게 된다. 케네의 독법에 따르면, 가치는 농경적 재화의 생산자들에 의해 창출된다. 상인과 장인 들―케네에 따르면 "불임" 계급의 구성원들―은 생산된 가치 주위를 움직일 뿐이고, 해당 재화의 실제 가치에 거의 아무 기여도 하지 않는다. 케네의 경우에 농경적 재화의 높은 사용 가치는 밭에서 수행된 노동이 대량의 가치를 산출한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다시 말해서, 부와 가치에 대한 중농주의적 이론은 가치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 이해의 논리에 부합되는데, 우리는 고급의 사용 가치를 갖고 있는 재화가 가치가 있다고 깨닫는다. 가장 흔하게도 이것이 내 학생들이 갖추고 있는 가치에 대한 이해이다. 결국, 소비자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문제는 내 앞에 있는 생산품이 그것에 부착된 가격표만큼 사용 가치가 있는지 여부이다.


그러나 이것은 더 근본적인 무언가를 은폐한다. 재화를 구매할 때 나는 그 재화가 유용하다고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생산하는 행위가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나는 현존하는 재화에 지불하지 않고 있는데, 시리얼 상자에 돈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나로 하여금 그 생산품을 입수할 수 있게 하는 농부, 공장 노동자, 관리자, 잡화상, 수송 전문가, 기계 소유자 등에 지불하고 있다. 구매 행위에서 나는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것을 생산한 노동은 좋은 것이다. 사람들은 이 노동을 계속 수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재화를 구매하는 것은 그것을 생산한 노동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재단이 연구에 자금을 지원하고, 정부가 교육과 사회적 서비스에 자금을 지원하며, 투자자가 신생 기업의 주식을 구매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이 네 가지 사례 모두에서 주장은 동일한데, 한 행위자는 다른 한 행위자의 노동이 가치가 있고, 그래서 그 노동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제공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런 유형들의 자금 지원을 연계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거의 배타적으로 시장에 의거하여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노동자들에 의해 생산된 재화를 구매함으로써 자금을 지원하고 싶은 노동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은 개별 소비자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여기서 원칙은 국가 기반 및 재단 기반 자금 지원의 경우와 동일한데, 우리는 자신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생산 활동에 자금을 지원한다.


가치와 "가치"


그러므로 부와 가치 둘 다의 원천에 관해 케네와 중상론자들에 의해 제기된 주장은 어떤 종류의 활동을 추구해야 하는가에 관한 주장이다. 그들에게는 농경적 재화의 경작과 분배가 사회 조직의 중심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치에 관한 경제적 주장은 여타의 가치 주장과 동일하다. 기독교도, 무슬림, 불교도 그리고 유대인 들은 어떤 가치들을 그들의 생과 공동체의 핵심에 위치시켜야 한다. 내가 정직이 좋은 가치이거나 또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가치 있는 행위라고 믿는다면, 나는 나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도록 부추길 상황에 처하지 않음으로써 그 가치에 입각하여 내 생을 조직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내가 동물의 생이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면, 나는 내가 동물을 먹거나 해치지 않을 필요가 있도록 내 생을 조직할 것이다. 가치는 명시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우리의 개별적 및 집단적 생을 조직한다. 또 다시, 우리는 시장이 경제적 행위자들의 이론적으로 자유로운 집단적 구매 선택을 통해서 이런 가치를 식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우리의 시장 사고 방식은 애덤 스미스(Adam Smith)와 그의 계승자들의 유산이다. 스미스의 <<국부론(Wealth of Nations)>>은 중농주의자들의 저작에 이미 존재하는 관념을 일반화하여 노동은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주장한다.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 농경적 노동만이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기보다는 스미스는 팔 수 있는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이라면 무엇이나 가치가 있는 것, 즉 "생산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인, 교사, 성직자 등의 노동과 같은 다른 노동은 팔 수 있는 상품을 생산하지 않고, 그래서 노동이 수행되는 재료에 두드러진 양의 노동을 기여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스미스는 근본적으로 가치가 덜한 유형의 노동을 수행하는 개체들의 계급―케네의 경우에는 "불임" 계급, 스미스의 경우에는 "비생산적"인 노동자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케네의 모형을 재생산한다. 그러므로 스미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가장 가치 있는 종류의 노동이라고 깨닫는 것은 상품의 생산이다. 케네와 달리 스미스의 경우에는 우리가 어떤 종류의 상품을 생산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소비자들의 구매력이 어떤 종류의 생산적 노동에 자금을 지원해야 하는지 궁극적으로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일한 기준은 이 노동이 유용하고 팔 수 있는 재화를 생산하는가이다(여기서 "유용한"이라는 낱말은 가능한 한 모호하게 규정된다). 또한 그것이 우리가 하나의 문화로서 아무 목적도 없는 까닭이라고 어떤 시장 비판가들은 주장한다. 시장 논리는 상품의 생산을 가치 있게 여기지만, 그것 이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다.


이것을 염두에 둠으로써 우리는 비트코인의 경우가 매우 흥미로운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 우선 비트코인의 개념적에서 두 가지 관련된 핵심 개념, 즉 "채굴(mining)"과 "삼식 부기(triple-entry accounting)"을 간력히 검토해야 한다.


비트코인 경제에서 작동 중인 이론적 장치들


삼식 부기라는 더 복잡한 개념으로 시작하자. 이 술어는 방대한 함의를 갖는 비교적 직관적인 부기 방법을 가리킨다.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것의 선행자들, 즉 단식 부기와 복식 부기를 간략히 검토하자.


단식 부기는 엄청나게 신뢰할 수 없다. 그것은 모든 부채(debt)와 자산(credit)이 한 장소에 기록되는 부기 체계를 가리킨다. 즉, 단 하나의 행위자가 교환 기록을 갖는다. 내가 여러분에게 자산에서 기기 하나를 판매한다면, 나는 그것을 내 원장에 표기하고 어떤 시점에 수금하기 위해 여러분을 찾게 된다. 내가 그 영수증을 분실하거나, 또는 누군가가 "우연히" 그것을 원장에서 지운다면, 그 교환이 이전에 일어났다는 것을 검증할 방법이 없다. 이것은 악명 높게도 어려운 회계 감사 과정을 낳는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복식 부기는 12세기와 13세기에 자본주의의 발흥이 시작된 움직임 속에서 등장했다. 시장에서 점점 증가하는 복잡성을 극복하기 위해 상인들은 부채와 자산을 두 장소에 표기하기 시작했는데, 구매자와 판매자 둘 다 거래 기록, 즉 이론적으로는 필요할 때마다 상대방에게 책임을 귀속시키는 데 사용될 수 있는 기록을 간직했다. 물론 이 부기 절차는 나름의 쟁점들이 있으며, 그리고 비트코인 공동체의 많은 사람이 2008년 불황은 최소한 복식 부기 체계가 활용할 수 있는 불투명한 부기 행위 때문이라고 믿는다. 삼식 부기는 복식 부기의 핵심 문제, 즉 투명성의 결여를 해결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삼식―또는 "블록체인(blockchain)"―부기에서 각 거래는 세 개의 "영수증", 즉 해당 사건의 기록을 갖게 된다. 물론 교환에 관여하는 당사자들은 부채 또는 자산을 기록한다. 여태까지 복식 부기도 그랬다. 그러나 블록체인 체계의 핵심적인 차이점은 거래가 발생할 때 제3자가 그 거래를 "관찰하"여 제3의 교환 기록을 작성한다. 그 다음에 이 제3의 기록은 공개적으로 볼 수 있는 기존의 모든 거래 기록에 연결된다. 그래서 삼식 부기에서는 어떤 "숫자 날조" 또는 "장부 조작"도 없다. 제3자, 그리고 거래의 관찰자로서의 그의 역할이 누군가의 재산에 대한 충돌하는 보고서가 없다는 것을 보장한다.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또한 그것은 중앙 집중의 문제를 피해가는데, 왜냐하면 블록체인의 각 사용자가 궁극적으로 그 체계와 관련된 회계 감사의 보증인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소송하는 어떤 중앙 당국도 존재하지 않으며, 공동체 전체가 부채와 자산의 명료한 전자적 흔적을 통해서 소송한다. 그런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교환하기 위해 먼저 어떻게 비트코인을 얻는가?


비트코인은 두 가지 방식, 즉 교환이나 "채굴"을 통해서 취득할 수 있다. 첫번째 방법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상품이나 통화를 취급하는 방식으로 비트코인을 다루는 것이다. 즉, 그것은 비트코인을 수익용 거래에 사용할 수 있거나 어떤 재화를 취득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사물"로 취급한다. 물론 이런 일은 비트코인의 가치와 비트코인의 순환에 외재적인 어떤 다른 재화의 가치를 비교할 때에만 일어난다. 이것이 말해주지 않는 것은 애초에 비트코인이 가치를 갖게 되는 까닭이다. 내가 이 의문을 설명할 때 마주치게 된 두 가지 주요한 사상 학파, 즉 희소성 이론가과 효용 이론가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비트코인이 가치가 있는 까닭은 그것이 희귀하며, 그리고 그것의 수량의 상한선이 21백만 개로 정해져 있어서 여전히 희귀할 것이라는 점 때문이라고 상식적인 가정을 한다. 그러나 희소성은 가치를 부여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세상에는 전혀 아무 가치도 없는 희소한 것들이 풍부하다. 희소한 것들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그것들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행위를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또 다시, 우리는 물질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찾아내고 생산하도록 고무시키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지불한다.


사람들이 비트코인에 가치를 할당할 때 취하는 나머지 다른 한 접근 방식은 비트코인이 어떤 사용 가치를 함유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런 개인들은, 비트코인이 유용한 까닭은 비트코인의 소유자로 하여금 국가가 감시하는 교환 체계의 바깥에서 막대한 양의 부를 축적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다시 말해서, 비트코인은 개인으로 하여금 과세할 수 없는 현금을 전유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은 참이지만, 이 설명은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그것은 실제적 문제에 부딪친다. 정상 시장에서 재화를 구매하기 위해서는 비트코인을 어떤 법정 통화로 전환해야 하는데, 그것은 국가가 관찰할 수 있는 흔적을 만들어낸다. 비트코인 경제가 충분히 거대해져서 "정상" 시장에 두드러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 암호화폐에 대한 어떤 종류의 국가 감시를 시행할 강한 추진력이 존재하게 될 것이고, 그래서 이렇게 인식된 효용을 무화시키거나 축소시킬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생각이 아니다.


두 번째 문제점은 더 이론적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통화는 내재적인 사용 가치가 전혀 없다고 주장한 최초의 인물이다. "화폐는 무의미한 것이며 본성상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관행적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통화를 바꿔버렸을 때 그것은 아무 가치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적었다. 이것은 "화폐가 생의 필요한 욕구들 가운데 어느 것에 대해서도 아무 소용이 없으며, 그리고 그의 소원의 끝없는 탐욕스러움 때문에 그에게 제공되는 모든 음식이 금으로 변해버리는 전설적으로 유명한 미다스처럼... 화폐를 잘 비축한 사람도 흔히 생존의 단순한 필수품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통화로 취급될 때, 비트코인은 내재적인 효용이 아니라 우리가 욕망하는 것들을 획득하는 수단을 제공할 뿐이다. 그래서 가치는 비트코인의 인식된 효용에 결부될 수 없다.


노동, 가치 그리고 비트코인


그렇다면 비트코인 경제에서 가치를 제공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쨌든 앞에 제시된 이론이 거의 맞다면, 그 대답은 노동이다. 그 다음의 논리적 단계는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이다. 비트코인 경제에서는 어떤 종류의 노동이 발생하는가? 이것이 "채굴"이 진입하는 지점이다.


채굴이 비트코인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사용자가 앞에서 개괄된 교환에서 제3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내가 어떤 거래를 관찰하여 블록체인에 기재할 때, 나는 블록체인에 다른 한 사항도 기재할 수 있다. 이 사항은 내가 얼마간의 비트코인을 획득했다는 것이다. 내가 거래들을 관찰하여 공개 기록부에 기재하는 데 투자한 시간과 에너지가 더 많을수록 더욱더 많은 "비트코인"이 "산출되"는데, 21백만 개까지 산출된다. 그 상한선에 이르게 되면, (국가 지원 통화를 특징짓는 것처럼) 어떤 새로운 비트코인도 "만들어지"거나 인공적으로 "체계 속에 투입되"지 않지만, 거래 관찰 행위는 교환되는 코인의 일부 형태로 여전히 "임금"을 산출할 것이다. 일종의 "거래 수수료"이다.


당분간 기본적으로 비트코인은 직접적으로 또는 알고리즘을 통해서 블록체인을 구축하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자금이다. 새로운 비트코인이 더 이상 산출되지 않는 시점 이후에도 관찰하고 공개 기록부를 구축하는 행위가 비트코인 경제에서 가치의 원천일 것이다. 앞에서 제시된 견지에서 서술하면, 투자자가 깨닫고 있든지 그렇지 않든 간에, 비트코인에 대한 투자는 블록체인의 구축이 가치 있는 작업이다, 즉 사람들이 추구해야 하는 목적이다라는 관념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비트코인 선물 거래의 개시가 매우 흥미롭다. 상승 시세에 내기를 거는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는 바는 본질적으로 이런 특수한 형태의 노동―또 다시 그들이 투자한 인간 또는 기계에 의해 수행된다―이 더 가치가 있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삼식 부기 체계는 우리가 대규모로 갖추어서 사용해야 하는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런 식의 부기는 선거와 은행 체계의 투명성 같은 매우 강력한 몇몇 편익이 있고, 그래서 지속 가능한 시장과 자유 민주주의 둘 다의 지속적인 현존을 보증하는 데 유용한 도구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체의 단점도 있다. 암호화를 통한 블록체인에서 프라이버시는 보호될 수 있지만, 에퀴팩스(Equifax) 해킹 이후 시대에 자기 정보에 주의를 기울이는 투표자와 거래자 들로 하여금 그런 투명한 공개 체계를 신뢰하도록 설득하는 일은 어려울 것이다. 비트코인과 다른 암호화폐들의 지속적인 현존에 대해 낙관적인 사람들은 투자할 때 이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비트코인은 여타 시장들과 다르게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그것은 현재 통화 또는 상품으로 다루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둘 다 아니다. 노동 이론 시각에서 바라보면, 비트코인의 가치는 삼식 부기가 우리 문명에 중요하다는 관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 비트코인에 대한 투자는, 순전히 경제적인 저널과 출판물 들에서 제시되는 통속적인 취급에도 불구하고, 어떤 관념에 대한 투자인데, 그것은 블록체인으로 교환을 검증할 수 있는 하부구조의 구축에 투자하는 것이다.


최근의 <블룸버그> 기사에서 체굴자 엘레인 우(Elaine Ou)에 따르면, 비트코인 연결망은 초당 대략 7건의 거래를 처리할 수 있을 뿐인데, 이것은 실제로 유의미한 수준으로 은행 거래를 처리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몇 배 더 낮은 크기의 속도이다. 현재 "정상" 시장에서 발생하는 그런 종류의 거래들을 허용하기 위해서는 방대한 채굴 시설이 구축되어야 하며 건전하고 비용 효율적인 에너지 그리드를 공급받아야 할 것이다. 블록체인 속에 새로운 사항들을 프로그램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는 막대하고, 그래서 전지구적 규모의 은행에 필요한 수준 근처에는 전혀 이르지 못하고 있다. 대규모의 재생 에너지 그리드를 획득하는 것이 블록체인 자체를 성장시키는 데 필수적인 것이고, 그래서 비트코인에 대한 투자는 또한 간접적으로 에너지 부문에서 재생 에너지의 빠른 증가에 내기를 거는 일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다.


케네로의 복귀


기술적으로 가속되는 기묘한 방식으로 비트코인 체계는 중농주의자들의 체계와 놀랍도록 유사한 점들을 갖추고 있다. 스미스와 다른 시장 자유주의자들과 달리, 케네는 어떤 특정한 형태의 노동을 다른 형태들의 노동의 가치에 대한 척도로 인정했는데, 농경적 노동이 18세기 프랑스에서 부와 가치의 일차 원천이었다. 비트코인은 유사한 특정한 형태의 노동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삼식 부기의 현존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및 가상적 하부구조의 창출이다. 사실상 그것은 그런 금융 및 선거 감시 체계가 중요한 작업이고, 그래서 자금을 지원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중농주의자들의 주장은 결국 시장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으로 대체되었지만, 그들은 시장 자유주의자들이 제시할 수 없었던 한 가지 주장을 제시했는데, 식량과 의복 같은 필수재의 생산을 향해 정향된 목적론적 판본의 인간 활동에 대한 주장이다. 현재 비트코인 연결망은 투기, 오해 그리고 탐욕에 의해 끔찍하게 파행적인 듯 보이지만, 투명한 공개 은행 체계를 창출하기 위해 그것이 할 수 있을 일에 대한 인식은 그것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