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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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네일: 오늘의 에세이-자연은 연속적인가 아니면 이산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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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6. 2.

 

 

자연은 연속적인가 아니면 이산적인가? 원자론적 오류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Is nature continuous or discrete? How the atomist error was born?

 

―― 토머스 네일(Thomas Nail)

 

자연은 이산적이라는 근대적 관념은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에서 비롯되었다.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는 모두 자연은 그들이 아토모스(atomos)라고 부른 것, 즉 '분할할 수 없는 개체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에게 자연은 움직이고 있는 이산적인 원자들의 총체였다. 창조주 신이 없었고 영혼의 불멸도 없었고 움직이지 않는 것도 (원자들 자체의 변치 않는 내적 본성은 제외하고는) 없었다. 자연은 벅잡한 조성을 갖고서 움직이고 있는 원자적 물질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원자론은 자체의 역사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중세 시대 내내 이어진 기독교적 전통에 의해 궁극적으로 거의 분쇄되었다. 플라톤은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데모크리토스의 책을 눈에 띌 때마다 파괴하라고 말했고, 나중에 기독교 전통은 이 요구를 충실히 이행했다. 오늘날에는 에피쿠로스의 짧은 편지 몇 편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원자론은 끝장나지 않았다. 포지오 브라치올리니(Poggio Bracciolini)라는 이탈리아인 책사냥꾼이 벽지의 수도원에서 고대 시집 한 권을 찾아낸 1417년에 원자론은 다시 출현했는데, 그 시집은 에피쿠로스의 영향을 크게 받은 로마 시인인 루크레티우스(c99-55 BCE)가 저술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이었다. 이 두툼한 철학적 서사시는 우리가 운이 매우 좋게도 물려받은 고대 유물론에 대한 가장 상세하고 체계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그 책에서 루크레티우스는 자연학에서 윤리학, 미학, 역사, 기상학, 종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기초적인 쟁점들에 대해 숨이 막힐 정도로 대담한 이론을 제기한다. 기독교 교회의 희망과 최선의 노력에 맞서서 브라치올리니는 그 책을 출판해내었고, 그 책은 곧 유럽 전역에 배포되었다.

 

이 책은 16세기와 17세기의 과학혁명을 촉발한 가장 중요한 영감의 원천 가운데 하나였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시대 지식인들은 거의 모두 그 책을 읽고서 어느 정도 원자론자가 되었다(그들은 흔히 신과 영혼을 고려했다). 사실상 이런 이유 때문에, 길고 중요한 이야기를 매우 짧게 요약하면, 과학과 철학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자연의 근본적인 이산성을 가정하고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대체로 루크레티우스의 영향 덕분에 이산성에 대한 탐색은 우리의 역사적 DNA의 일부가 되었다. 서양에서 근대 과학의 해석적 방법과 경향의 철학적 기초는 자연에 대한 루크레티우스의 작은 책을 매개로 한 고대 원자론에서 사실상 비롯되었다. 루크레티우스는, <<1417년, 근대의 탄생(The Swerve)>>(2011)이라는 책에서 스티븐 그린블랫(Stephen Greenblatt)이 말하는 대로, "세계가 근대화된 방식"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근대의 서양 사상은 루크레티우스의 시에 대한 완전한 오독에 의거하고 있다. 그것은 물론 계획적인 오독은 아니었고, 오히려 독자들이 그리스 원자론에 대해 간접적으로 파악한 약간의 지식(대체로 원자론을 반대한 적들의 증언에서 비롯된 것)을 루크레티우스의 텍스트에 투사하는 단순한 오류를 저지른 오독이었다. 그 독자들은 루크레티우스의 저작과 그의 선배들의 저작 사이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보다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가정했다. 중요한 점은, 그들이 '원자'라는 낱말과 '입자'라는 낱말을 번역된 텍스트에 삽입했다는 것인데, 루크레티우스는 그 낱말들을 결코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른바 '원자론자'가 꽤 기묘하게도 생략한 것은 아닌가? 루크레티우스는 아토무스(atomus, 가장 작은 입자)나 파르티쿨라(particula, 입자)라는 라틴어 낱말들을 쉽게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루크레티우스가 최선의 노력을 다했음에도 그가 사용한 두 가지 매우 다른 라틴어 용어, 즉 코르포라(corpora, 물질)과 레룸(rerum, 사물)은 이산적인 '원자'에 대한 동의어로 일상적으로 번역되고 해석되곤 했다.

 

게다가 근대인들은, "솔리다 프리모르디아 심플리키타테(solida primordia simplicitate, 단일한 연속체)" 같은 구절들에서 나타나듯이, 루크레티우스의 책 전체에 걸쳐 사용된 연속체와 주름이라는 거의 편재적인 언어를 번역해 버리거나 아니면 완전히 무시했다. 고전 텍스트와 양자물리 둘 다에 관심이 있는 보기 드문 유형의 학자로서 나는 라틴어 원본에 존재하는 이런 물질적 연속체에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나는 최근에 번역하고 주석을 붙인 <<루크레티우스 I: 운동의 존재론(Lucretius I: An ontology of Motion)>>(2018)라는 책에서 이 모든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지만 그 책의 알맹이는 이렇다. 단순하지만 체계적이고 편재하는 이런 해석적 오류가 근대 과학 및 철학의 역사에서 단일한 최대 오류라고 할 만한 것을 구성한다.

 

이런 오류 탓에 근대 과학과 철학은 2012년에 출판된 책에서 숀캐럴(Sean Carroll)이 "우주의 끝에 있는 입자(particle at the end of the universe)"라고 부르는 것을 500년 동안 탐색했다. 그 오류는 다양한 자연주의와 유물론의 훌륭한 미덕들을 낳았지만, 덜 찬양할 만한 기계론적 환원주의와 가부장적인 합리주의, 인간에 의한 자연의 공공연한 지배도 낳았는데, 이것들 가운데 어느 것도 루크레티우스의 라틴어 원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중력, 전기장과 자기장, 궁극적으로 시공간 같은 명백히 연속적인 현상을 대면했을 때에도 아이작 뉴턴과 제임스 맥스웰, 심지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그런 현상을 설명하려고 원자론적 '에테르'라는 관념으로 되돌아갔다. 고대인들로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에테르는 감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작은 입자들로 구성된 미묘한 액체성 실체로 간주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에테르의 존재를 더 이상 믿지 않거나 루크레티우스를 권위 있는 과학적 텍스트로 읽지 않는다. 하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우리는 근대인들이 애초에 물려준 연속성 대 이산성이라는 동일한 문제를 여전히 대면한다.

 

오늘날 이론물리학은 중대한 전환점에 놓여 있다. 일반상대성과 양자장 이론은, 지금까지 엄청나게 성공적으로 예측한, 물리학자들이 현재 '표준모형'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하는 두 가지 가장 큰 부분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 이론들이 하나의 포괄적인 이론의 두 가지 양태로 아직 통일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그런 통일은 시간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현재의 선도적인 이론들(끈 이론과 고리 양자중력)은 여전히 실험적 확증을 산출해야 하지만 말이다.

 

양자중력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 이론의 옹호자들에 따르면 그것은 자연의 궁극적인 얼개(시공간)가 결코 연속적이지 않고 오히려 입자적이어서 근본적으로 이산적임을 세계에 보여줄 태세를 갖추고 있다. 그런 원자론적 유산은 해석적 오류에서 비롯되었더라도 결국 지켜질 것이다.

 

단 한 가지의 문제가 지속되는데, 양자장 이론은 모든 이산적인 에너지 양자(입자)가 완전히 연속적인 양자장들의 여기나 요동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장은 근본적으로 입자적이지 않다. 양자장 이론의 경우에 만물은 알갱이들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지만, 알갱이들은 모두 우리가 입자적인 것으로 측정할 뿐인 주름 잡힌 연속적인 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물리학자들이 '섭동 이론'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무한히 연속적이어서, <<무한성 수수께끼(The Infinity Puzzle)>>(2011)라는 책에서 프랭크 클로오스(Frank Close)가 서술하는 대로, "자기의 완전한 이산적인 측정을 교란하"는 것에 대한 이산적인 척도다. 물리학자들도 이런 연속적인 장의 하위 입자적인 운동을 가리키는 이름이 있는데, '진공 요동'이라고 한다. 양자장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물질(에너지와 운동량)일 뿐이다. 그러므로 양자장은 결코 '무'가 아니라 완전히 실증적인 공허(진공의 흐름 자체)와 더 비슷하거나, <<보이는 것은 실재가 아니다>>(2016)라는 책에서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가 서술하는 대로, 해변으로 밀려드는 주름 잡힌 방울이 모든 이산적인 것이 되는 파상적인 대양('디랙 바다'라고 적절히 불리는 것)과 더 비슷하다. 다시 말해서, 이산적인 입자는 연속적인 장에 형성된 주름이다.

 

근대 과학의 핵심에 놓여 있는 중요한 의문, 즉 "자연은 연속적인가 아니면 이산적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대답은 단순한 만큼이나 급진적이다. 시공간이 양자 알갱이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연속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양자 알갱이가 무한히 연속적인 진동하는 장의 주름이어서 연속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자연은 그냥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주름 잡힌 연속체다.

 

이 논점은 루크레티우스와 우리가 저지른 애초의 오류를 곧장 떠올리게 한다. 원자론의 전통 내에서 작업하는 동시에 그 전통에 맞서서 작업한 루크레티우스는 끊임없이 흐르면서 움직이고 있는 무한히 연속적인 자연에 대한 최초의 유물론적 철학을 제시했다. 루크레티우스에게 사물은, 자체의 기복으로 직조된 단일하고 연속적인 얼개(텍스툼)에 형성된 접힘(듀플렉스), 주름(플렉스), 방울이나 기포(포라미나)일 뿐이다. 자연은 무한히 혼란스럽게 움직이거나 요동을 치고 있지만, 비너스의 탄생처럼 준안정한 형태로 해안에 밀려들기도 하는데, 루크레티우스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첫 행들에서 적고 있듯이, "당신 [비너스] 없이는 그 어떤 것도 빛의 신성한 해안으로 생겨 올라오지 못한다." 지금까지 2000년이 걸렸지만, 마침내 루크레티우스는 우리와 동시대인이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