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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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얽힘 그리고 왜 변화가 매우 어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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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8. 5.


얽힘 그리고 왜 변화가 매우 어려운가?

Entanglements and Why Changes is So Difficult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왜 사회적 변화가 매우 어려운가? <<얽힘(Entangled)>>에서 이언 호더(Ian Hodder)는, 이를테면, 대안이나 변화를 어렵게 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이 세계에 얽매이게 되는 네 가지 형태의 얽힘들을 개괄한다. 이런 얽힘은 연쇄나 고리를 형성하는 의존성의 형식이다. 우선 인간-인간(HH) 얽힘이 존재한다. 이 얽힘은 사회과학과 정치철학, 정치적 비판이 대체로 집중하는 것이다. HH 얽힘은 표상, 규범, 법률, 기호, 권력의 영역이다. 직전의 포스트글에서 나는 시민권 지위에 대해서 HH 얽힘을 거론했다. 시민권 또는 불법체류자로 뷴류됨이 물질적 결정이 아니라 기표 또는 들뢰즈와 과타리가 "무형적 변환"이라고 부른 것의 결과일지라도 그것은 이런 기표들의 그물 안에 빠지는 사람에게 심대한 물질적 영향을 미쳐서 그 사람에게 어떤 움직임과 삶의 형태들이 가능한지 결정한다.


"불법체류자"라는 기표는 이민자의 질량과 같은 존재의 특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무형적 기표가 이민자의 존재의 운명을 주재한다. 기표는 온갖 종류의 법률과 권리, 사회적 권역 내에서 가능한 움직임을 연결하는 그물 또는 고리, 연쇄 속에 존재한다. "블랙"이라는 기표를 아메리카 남부에서 차별 철폐 이전에 작용한 대로 고려하자. "블랙"은 어떤 인간들의 물질적 존재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어떤 직업에 종사할 수 있고, 어떤 학교에 다닐 수 있고, 어떤 식수대에서 물을 마실 수 있으며, 버스와 식당에서 어디에 앉을 수 있는지 규정한 기호학적 표식이었다. 식당, 식수대, 화장실, 버스, 학교 건물과 관련하여 흑인들이 그것들과 상호작용하지 못하게 물리적으로 막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이런 상황을 규정하는 것은 일련의 의미작용적 관계들이다. 이런 점에서 "블랙"이나 "불법 체류 이민자" 같은 기표는 체스 말과 유사하다. 어떤 체스 말을 루크로 만드는 것은 그것의 물리적 특성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루크로서의 그것의 지위는 기호학적으로 결정된 것이지 그것을 구성하는 나무, 그것의 모양 등에서 비롯된 결과가 아니다. 이것에 대한 증명은, 만약 루크 한 개를 잃어버린다면 동전 같은 다른 무언가로 그것을 항상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이 경기자들에게 충분히 구별 가능한 것이기만 하면 된다.


의미작용적 HH 관계는 사물 자체의 특징이 아니라 인간들이 얽매이게 되는 범주들과 기표들의 연쇄망이기 때문에 그 관계는 변할 수 있다. 표상의 층위에서 대체로 전개되는 이런 형태의 정치를 "기호정치"라고 부를 수 있다. 기호정치는 의미화의 자연성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의미화는 임의적이고 구성되는 것이어서 달리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기호정치는 귀족과 농노 신분의 구별짓기와 관련하여 자연적이거나 신성한 것은 전혀 없고, 오히려 인간 육체의 층위에서 귀족과 농노는 물질적으로 동일하므로 이런 구별짓기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구별짓기임을 예증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런 구별짓기의 해체는 봉건적 질서에 어떤 필연성도 없음을 보여주었다. 기호정치는 들뢰즈와 과타리가 "언표의 집단적 조립체"라고 부른 것을 겨냥한다.


기호정치는 심대한 해방적 역능을 갖추고 있는 한편으로, 의미화 그물이 전복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흔히 상황은 거의 변하지 않은 채로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이 사태는 사회를 기호, 소통, 규범, 기표의 조립체로 구상하는 것은 너무 협소함을 시사한다. 의미화와 결부되어 있지만 그 자체는 언표의 집단적 조립체 또는 기표의 체제에 속하지 않는 삶의 형식들과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들에 우리를 가두는 다른 얽힘 형태들이 존재해야 한다. 이것은 육체들이나 사물들 사이의 관계로서 들뢰즈와 과타리가 "기계적 조립체"라고 부르는 것이다. 호더는 들뢰즈와 과타리나 기계적 조립체를 언급하지 않지만 이 범주에 속하는 세 가지 얽힘 형태―인간-사물(HT) 얽힘 또는 의존성, 사물-인간(TH) 얽힘 또는 의존성, 사물-사물(TT) 얽힘 또는 의존성를 논의한다. 이 관계들은 자기가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런 것이라는 덕분에 역능이나 중력을 행사한다. 우리는 이런 사물들에 대한 의존과 돌봄의 관계들에 얽히게 된다. 이런 세 가지 얽힘 형태를 논의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것은 그것들이 본질적으로 담론적이거나 기호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에 대한 감각을 얻으려면 그것들에 대한 얼마간의 친숙함과 실천수행을 향한 눈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책을 읽음으로써 기타 연주법을 배울 수는 없다. 기타 연주법을 배우려면 기타를 집어들고 연주해야 한다. 나는, 부르디외를 좇아서, 이론이 기계적 조립체를 간과하는 경향이 영구적으로 있는 것은 이론가들이 주로 텍스트와 개념을 다루어서 실천과 수행의 영역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이런 경향은 플라톤의 <<메논>>과 하인의 실천적 지식에 대한 경멸(그리고 여기서 그리스 철학은 하인들에게 노동과 오락을 떠맡기는 귀족주의적 담론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찾아볼 수 있는 서양철학의 오랜 유산이다.


여기서 내가 HT, TH, TT 얽힘을 상세히 다룰 수 없는 것은 저녁 식사를 하고 내일 노르웨이로 떠나는 여행 준비를 끝낼 필요가 있어서지만, 아마도 한 가지 보기가 이런 관계들의 핵심을 예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기후변화와 관련된 사례를 고찰하자. 기호정치의 층위에서 기후변화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고 기후변화 부인론자들과 싸우는 데 엄청난 노력이 소모된다. 부인론자들이 여전히 많이 존재하지만, 여러 가지 점에서, 이런 기호정치적 노력은 지금까지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매년 더욱 더 많은 사람이 기후변화의 실재성과 심각성을 믿는다. 기후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사람들이 점점 더 확신하게 되는 사실을 감안할 때, 기후변화을 유의미하게 해결할 행동은 여전히 거의 없는 까닭은 무엇인가? 대답의 일부는 우리 삶에서 기계적 조립체들이 작용하는 방식의 층위에 놓여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언표의 집단적 조립체의 층위에서 맺어지는 HH 관계와 마찬가지로 사물들 사이의 관계와 사물들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의존성의 연쇄나 고리, 그물에서 발생한다.


백인들이 도시에서 교외로 이주하는 사례를 고찰하자. 여기서, 물론, 이전에 도시에서 살았던 사람들 사이에는 인종과 범죄에 대한 믿음과 관련된 HH 관계들이 있다. 그렇지만 교외로 이주하면 사람들을 어떤 삶의 형식들로 고착시키는 일련의 인간-사물(HT) 얽힘들이 출현한다. 인간들은 이전과 다른 특수한 방식들로 모든 종류의 사물에 의존하게 된다. 사물들은 결코 별개로 또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언제나 일련의 관계를 서로 맺으면서 존재한다. 교외로 도피하게 되면 자기 집에만 집중할 것이지만, 그 집은 그곳에서의 생활을 가능하게 만들거나 적절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종류의 다른 사물들과 관련된 그물이다. 도시에서는 근처에 그리고 때때로 구석구석에 걸어갈 수 있는 작은 마켓이 있다. 반면에 교외에서는 식량을 집으로 가져오는 방법이 문제가 된다. 식료품점이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자동차가 있어야 하는데 집으로 식품을 나를 만큼 충분히 큰 차가 있어야 하며, 그리고 흔히 여전히 도심에 있는 직장을 오가려면 자동차가 있어야 한다. 게다가 식품을 보관하려면 에너지를 더 소모하는 더 큰 냉장고가 필요하다. 물론 그런 상점들이 매일 식품을 조달하려면 수송 체계와 전환 체계 전체가 필요하다. 기온이 섭씨 44도에 이를 수 있는 텍사스 같은 지역에서 산다면 에어컨을 갖출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에어컨을 가동하려면 여러분은 전력망, 석탄, 석탄의 채굴 등과 얽히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생존 형태를 영위하려면 모든 종류의 사물들에 어떻게 얽히게 되는지에 대한 작은 지도학일 뿐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더 안전한 환경을 제공하려면 교외 주택에서 사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믿음이나 욕망으로 기호학적 층위에서 시작했지만, 교외 주택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종류의 사물들에 의존하게 만드는 그물이나 빙산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기호학적인 것의 층위에서 우리는 기후변화가 실재적이고 해결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품고 있지만, 기후변화를 초래하는 것들에서 우리 자신을 단절하기 어렵게 만드는 일련의 HT 얽힘들에 연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물론, 상품 물신주의라는 마르크스의 개념에 따르면, 기호정치의 층위에서는 이런 관계들을 식별하기 어렵다. 우리가 이런 얽힘들의 고리나 집합을 식별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들이 사물들에 "블랙박스화"되어 있기에 다른 것들과 맺고 있는 관계들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기계적 조립체의 층위에서 사물과 사물, 사물과 인간 사이의 관계들은 변증법적이다. 우리는 자기가 사는 삶의 형식을 유지하는 모든 종류의 방식으로 사물들에 의존하게 될 뿐 아니라 자기가 의존하는 이런 사물들을 유지할 필요도 있다(TH 얽힘들). 고속도로, 밭, 상점, 주택, 자동차 등이 유지되어야 한다. 옥수수 밭과 곡물 밭이 우리에게 신뢰할 만한 에너지원을 제공하는 한 우리는 이런 밭들을 통해서 자유를 성취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열정치), 이제 우리는 그 밭들을 유지하고 그 밭들이 생성하는 시간적 리듬과 사물-사물(TT) 의존성들에 따라 살아야 함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런 사물들의 고리 또는 조립체들에 포획되는데, 그것들에 의존하는 동시에 그것들이 우리에게 의존하는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창조하는 세계의 중력에 포획된다.


사람들은 때때로 내게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그 물음은 그런 의문들에 대한 선험적인 대답이 있음을 전제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HH, TT, HT, TH 조립체들이 어떻게 결합되는지에 대한 선험적인 대답은 전혀 없고, 그래서 그것들을 바꾸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선험적인 대답도 전혀 없다. 이런 조립체들이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대해서는 단호히 경험주의적이어야 하는데, 이것은 이런 조립체들이 어떠한지 알아내려면 세계 자체로 가야함을 뜻한다. 이런 까닭에 내 책에 <<존재지도학(Onto-Cartography)>>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지도학은 지도를 그리는 행위다. 어떤 변화를 산출할 수 있으려면, 조립체들이 어떻게 조직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중력을 행사하는지 알기 위해 기호학적 층위뿐 아니라 물질적 층위에서도 조립체들에 대한 지도를 그려야 한다. 그런 지도들을 갖춤으로써 내가 해체와 테라포밍이라고 부르는 것을 실행할 수 있게 된다. 해체는 기호학적 조립체들과 기계적 조립체들의 층위에서 존재한다. 해체는 우리를 어떤 삶의 형식들에 가두는 의미작용 층위와 물질적 층위에서 그런 조립체들을 분리하는 것에 있다. 그런데 테라포밍, 즉 움직이기, 관계맺기, 느끼기의 새로운 방식들을 가능하게 하는 언표의 집단적 조립체들과 기계적 조립체들의 층위에서 대안적 조립체들과 삶의 형식들을 창조하는 활동도 존재한다. 해체와 테라포밍은 흔히 함께 간다. 어쨌든 진정한 변화를 산출하려면 기호학적인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