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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A. 푹스: 오늘의 서평-코펜하겐 해석은 논파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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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7. 3.


<애덤 베커(Adam Becker)의 『무엇이 실재적인가?: 양자물리학의 의미에 대한 미완의 탐구(What is Real?: The Unfinished Quest for the Quantum Physics)』에 대한 서평>


코펜하겐 해석은 논파당해야 하는가?

Copenhagen Interpretation Delenda Est?


―― 크리스토퍼 A. 푹스(Christopher A. Fuchs)


"만약 당신이 왕을 친다면 왕을 죽여야만 한다"고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유명한 법학도에게 충고한 적이 있다. 애덤 베커의 첫 번째 저작으로 생생하게 쓰인 이 책에서 드러나는 명백한 의도는, 이른바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의 핵심 입안자인 닐스 보어(Niels Bohr)라는 왕을 치는 것이다. 베커는 보어를 죽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보어가 천하무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저자의 약점 때문이다. 베커는 논파하겠다는 자신의 의도에 사로잡혀서 그 주제에 관한 많은 숙제를 등한시한다. 뒤표지에 제시된 사전 호평은 "엄청나게 잘 연구된 이 책에서"라고 선언하지만, 보어, 하이젠베르크, 파울리, 폰 바이츠제커, 로젠펠트를 비롯하여 하이젠베르크가 더 적절히 "코펜하겐 정신"으로 명명한 것(왜냐하면 많은 코펜하겐 해석이 있기 때문이다)에 기여한 다른 사람들을 진지하게 연구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호평이 결코 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재빨리 감지할 것이다. 참고문헌 목록은 풍부한 듯 보이지만(206개의 항목), 더 자세히 검토해보면 코페하겐주의자들이 발표한 글의 모음집이 겨우 다섯 권에 불과함을 알게 되는데, 보어의 실질적인 인용문은 두 편의 에세이와 1회의 인터뷰에서 비롯될 뿐이다. 하지만 보어의 철학적 논문집에 수록된 36편의 다른 에세이나 레온 로젠펠트와 C. F. 폰 바이츠제커의 방대한 글, 보어가 양자 객체에 관하여 실재론자인 방식들을 설명하는 헨리 폴스, 아카디 플로트니츠스키, 존 호너 등의 분석에서 비롯된 자료는 어떻게 되는가? 코펜하겐 해석이 실재에 관하여 실제로 말하는 것을 둘러싸고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라고 큰소리를 항의하는 어떤 저자의 경우에는 그가 정말로 알고 싶어 했는지 의아스럽게 여겨질 것이다.


"당신의 적을 알라"라는 학술적 구호 대신에 단 하나의 인용문이 널리 기재되는데, "양자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추상적인 양자물리학적 서술이 존재할 뿐이다"라는 진술이 보어 자신이 발설한 것처럼 제시된다. 그 책의 미주를 살펴보고 그 흔적을 실제 원전까지 추적하기만 하면 베커가 더 잘 알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인용문은 보어 자신이 발설한 것이 아니라, 보어가 죽은 후에 보어의 말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회상한 아게 페테르센(Aage Petersen)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수사학적 기법은 텍스트에서 꾀어서 주석에서 뒤집는 큰 패턴의 일부다. 몇몇 사례는 오락만을 추구하는 독자에게 실질적이지 않다. 일례를 들면, 데이비드 봄의 숨은 변수 이론을 보고할 때 받는 화자의 나쁜 대우에 관한 매혹적인 이야기를 들은 후에 미주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게 된다. "이 이야기는, 기껏해야, 꽤 가감해서 들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페테르젠 인용문의 사례는 더 교활한데, 그 이유는 그 책의 주제 대부분이 그 인용문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양자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이 진술로 보어나 페테르센이 의도했던 바는 무엇일까? 낱말들이 어떤 의도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기본적으로 자유롭게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저자가 확실히 행하는 바다. 베커가 구성하는 보어와 다른 코펜하겐주의자들은 거의 어떤 실재도 절대 믿지 않는다. 그들은 유아론자 ... 또는 실증주의자 .... 또는 기회주의자 ... 또는, 글쎄 그것은 사실상 중요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아무튼 베커가 이런 입장들의 차이를 인식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베커는 저명한 실용주의 철학자 찰스 모리스(Charles Morris)를 실증주의자라고 한다.] 하지만 종종, 그의 명시적인 과녁은 코펜하겐 해석과 실증주의 사이에 있다고 생각되는 관련성, 즉 "논리실증주의의 전복과 과학적 실재론의 발흥이 과학철학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는데, 게다가 궁극적으로는 코펜하겐 해석 자체의 뿌리에 주요한 타격을 입혔다"는 진술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물리학과 철학』에서 하이젠베르크가 왜 이렇게 적었을까? "양자론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은 결코 실증주의적이지 않다는 점이 ... 인식되어야 한다." 또 다시, 이번에는 『물리학과 그 너머』에서 파울리의 말을 바꾸어서 이렇게 적었다. "실증주의자들은 양자역학이 원자 현상을 올바르게 서술한다고 추측했고, 그래서 그들은 불평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우리가 추가해야 했던 다른 것―상보성, 확률들의 간섭, 불확정성 관계, 주체와 객체의 분리 등―은 그들에게 한낱 장식에 지나지 않는 것, 전과학적 사유로 되돌아가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공정하게 말해서, 베커는 자신이 코펜하겐 해석과 실증주의를 동일시하는 데서 나타나는 약점을 인식한다. 하지만 더 큰 패턴에 따라, 굳이 미주를 면밀히 조사하면 그의 확신에 찬 해설이 약해지는 것을 알게 될 뿐일 것이다. 두드러진 한 구절에서 베커는 이렇게 적는다. "보어 자신이 실증주의자였는지 여부는 많은 논쟁의 주제였고 지금도 그렇다. ... 하지만 보어의 견해가 나타내는 특별한 점들은 그의 견해가 모호하다는 사실[과] 실증주의적 추론이 코펜하겐 해석을 변호하는 데 보편적으로 동원되었고, 게다가 그런 변호는 흔히 보어 자신의 견해로 제시되었다는 사실보다 역사적으로 훨씬 덜 중요하다." 다른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나 역시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보어는 베커가 대변하고자 하는 방식을 수용할까? "양자물리학에서 실재와 관련하여 아무 문제도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실재에 관해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양자론은 아무 해석도 필요 없는데, 그 이유는 그 이론이 서술하는 것들이 정말로 실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양자물리학은 세계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확실히 그렇지 않다! 자신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보어가 토머스 쿤에게 말한 대로, "저는 느꼈습니다 ... 철학자들은 정말로 패하지 않는 매우 기이한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중요하고 우리는 매우 중요한 것을 정말로 배울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본능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 [저는] 철학자로 불리는 어떤 사람도 상보적 서술이 의미하는 바를 사실상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합당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어는 양자론이 발견됨으로써 우리가 자연에 관한 깊고 심오한 것을 알게 된다고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미주 중 하나에서 베커는, 역사적 작업에서의 쿤과 철학자 노우드 러셀 핸슨―베커가 분명히 존경하는 두 사상가―이 철학적으로는 반실증주의적이면서도 코펜하겐 해석에 꽤 열중한다는 사실에 놀란다. 베커가 알지 못한 것을 어쩌면 그들이 알고 있었다는 생각, 즉 쟁점이 그가 상상한 것보다 더 미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대한 성찰은 그의 선택지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모든 코펜하겐주의자 중 파울리가 그들이 겨냥한 것(그들의 오류가 무엇이든 간에)과 베거가 그들을 묘사하는 방식 사이의 차이를 가장 잘 서술했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아인슈타인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었을 때도 변함없이 매우 큰 득을 보았다. '물리학은 결국 실재의 서술이다'라고 그는 내게 말했는데, 끊임없이 내 쪽으로 비아냥거리듯이 힐끗 보면서, 계속해서 '아니면 내가 물리학은 누군가가 그저 상상하는 것의 서술이라고 말해야 할까?'라고 말했다. 이 물음은 양자역학 같은 종류의 이론을 통해서, 자연에 대한 설명의 객관성에 관한 더 넓은 구상의 결과로서 물리적 실재와 꿈이나 환각 사이의 차이의 흐려지게 된다는 점에서, 물리학의 객관적 특질이 상실될 것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우려를 명백히 보여준다. ...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더 좁은 형태의 실재 개념을 옹호했다."[강조가 추가됨.] 코펜하겐주의자들은 양자론에서 고전물리학에서보다 덜 강건한 실재를 본 것이 아니라, 고전적 유형의 견지에서 포착될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것을 보았다. 현대의 물리학의 철학자 대부분과 명백히 베커 자신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 관념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들의 반응은 놀랍지 않은데, 무언가가 자신이 알아들을 수 있는 한정된 어휘로 표현될 수 없을 때 좌절감만 초래되지 않을까?


그러나 이것은 논쟁의 바로 그 기초를 망칠 구실이 절대 아니다. 이 책에는 역사적 오류가 많이 있는데, 대부분은 사소하다. 예를 들면, 위그너(Wigner)는 1963년에 "측정 문제"라는 용어를 도입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적어도 요르단(Jordan)의 1949년 논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38년 노벨상의 가치는 2017년의 가치로 평가하더라도 백만 달러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크라머스(Kramers)와 가모브(Gamow), 폰 바이츠체커(von Weizsaker), 파이얼스(Peierls), 휠러(Wheeler)는 보어의 제자가 아니라 박사후과정 연구원이었다. 하지만, 이 책의 주제를 고려하면, 한 가지 오류는 절대 용서할 수 없는 것인데, 요컨대 베커는 사실상 아인슈타인, 포돌스키, 로젠(EPR) 논증을 잘못 다루었다! 두 개의 얽힌 입자와 국소성 가정으로 시작하는 시나리오에서 베커는 이 입자와 저 입자에 대한 각각의 측정을 가정함으로써 각각의 입자가 위치와 운동량을 가짐을 입증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그것은 EPR이 고찰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가설적 측정은 한 입자에 대해서만 행해지는데, 이것으로부터 그들은 나머지 다른 한 입자에 대해서 같은 측정을 수행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추론한다. 저자가 스스로 논증을 이해하지 못할 때, 그는 "[보어의 대응]이 EPR 논증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불분명하다"라고 선언하면서 그것을 "혼란스러운 글"로 일축할 권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이 생생하게 쓰여졌다고 말했고, 사실상 그렇다. 그 책은 파울리가 "더 좁은 형태의 실재 개념"이라고 부른 것의 노선을 따라 양자론을 해석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에 관해 보고할 때 빛나는데, 전문적으로 말하자면, 여기서 비국소성은 실재의 진정한 양태이고 양자 상태는 양자계에 대한 정보나 지식, 믿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양자계의 실제 속성을 나타낸다고 이해한다. 데이비드 봄과 휴 에버릿 III세, 존 벨을 비롯하여 그런 전개에 관여한 다른 사람들에 대한 베커의 묘사는 설득력이 있고 인간적이다. 이 위인 중 많은 사람이 베커의 영웅이고, 그래서 그는 주의 깊게 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하지만 이 서평에서 내가 코펜하겐에 비판적인 그 책의 측면에 집중하기로 선택한 이유는 철저히 긍정적인 서평이 많이 있기 때문인데, 그런 것이 물리학의 철학 공동체의 분위기다.


매우 부정직한 책의 경우에는 피해를 관리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나는 보어, 파울리, 하이젠베르크와 여타의 사람이 결코 현인, 즉 궁극적인 권위자가 아니라고 인정하는 첫 번째 사람일 것이다. 그들의 견해에는 흔히 비정합적인 것들이 들어 있다. 하지만, 이 책이 빠뜨리고 있는 것은 코펜하겐 해석이 양자 정보 및 컴퓨팅 공동체의 매우 많은 사람에게 사유를 촉발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E. T. 제인스(Jaynes)는 코펜하겐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난제를 이렇게 서술한다. "우리의 현재 [양자역학적] 형식은 ... 부분적으로는 자연의 실재를 묘사하면서 부분적으로는 자연에 관한 불완전한 정보를 서술하는 독특한 혼합물인데, 지금까지 아무도 분리할 방법을 알지 못한 오믈렛으로 하이젠베르크와 보어에 의해 모두 뒤섞여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분리 작업이 기초적인 물리학 이론의 후속 진전을 위한 전제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양자 정보의 도구와 개념은 언제나 코펜하겐 해석의 더 깊은 요소를 이해하는 데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베커의 책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은 해석적 경로인데, 그것이 현재 세계 전역에서 양자 기초 연구의 상당한 부분을 이끌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 공동체의 연구자 중 한 사람인 D. M. 애플비(Appleby)의 에세이에서 인용하면, "보어를 최종 진리의 권위자로 수용하라고 요청받는다면 나는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더 유연한 취지로, 즉 모호하다고 해서 덜 획기적이지는 않은 통찰의 원천으로서 그의 글에 접근한다면, 그것은 몇 가지 흥미로운 의문을 제시한다. 나는 이 사유 노선이 유익할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추구할 가치가 있다고 느낀다." 내 마음에 떠오르는 걱정은 이렇다. 청년 학도가 코펜하겐주의자들에 관해 무언가를 스스로 읽을 기회를 갖기 전에 코펜하겐 해석을 "유아론과 서툰 추리의 뒤범벅"이라고 이야기하는 애덤 베커의 책을 읽는다면 어쩔 것인가? 그 학도는 애플비가 제시한 추구를 결코 좇지 않을 것이고, 그 때문에 물리학은 빈곤해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