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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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노어 핀리: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자원 - 1. 인간 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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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7. 19.

1. 인간 본성

 

-- 엘리노어 핀리(Eleanor Finley)

 

'인간 본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자연 세계의 일부를 이루는 생명체로서의 인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인간 종을 여타 종과 구분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이들 종류의 물음을 자문했다. 고전시대 그리스 철학자이자 현대 생물학의 선구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조온 폴리티콘(zoon plitikon), 즉 세상에서 있어야 할 것에 관해 집단적으로 숙의할 수 있는 정치적 동물로 규정한 것으로 유명하다. 산업혁명 이후로 인간을 경제적 견지에서 규정하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다. 이른바 '도구 제작자 인간'은 자신의 물리적 환경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변경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해하게 될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랜 관념은 오늘날 과학이 인간 종에 관한 말하는 바의 대부분과 여전히 공명한다.


단일한 '인간 본성' 혹은 인간의 삶을 조직하기 위한 청사진은 전혀 없다.


인류학자는 인간 종을 전체론적 관점에서 연구하는 과학자인데, 요컨대 인간의 생물학, 언어, 물질문화(고고학), 사회적 체계, 그리고 일상생활을 고찰한다. 지난 일 세기에 걸쳐서 인류학자들은 세계 전역에서 인간 사회들에 관한 직접적인 이야기를 수집했다. 우리는 이것을 '민족지학적 기록'으로 일컫는다. 민족지학적 기록은, 가족과 우정, 영성 혹은 종교, 놀이와 스포츠, 정치, 그리고 생산 같은 '보편적인 것들'의 넓은 영역에서 가능성의 범위가 끝이 없음을 보여준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인류학자들은 '인간 본성'을 규정하려는 시도를 오래 전에 그만두었고, 오히려 인간 잠재력을 탐구하는 데 집중한다. 다시 말해서, 단일한 '인간 본성' 혹은 인간의 삶을 조직하기 위한 청사진은 전혀 없다.

 

그런데도 '인간 본성'이라는 관념은 선과 악에 관한 우리의 일반적인 상상에 여전히 깊이 박혀 있다. 대체로, 사람들은 사악한 행위나 부정의한 체계를 정당화하는 데 그 관념을 동원한다. 예를 들면, 탐욕스럽거나, 혹은 타인을 착취하는 것은  '인간 본성'으로 여겨진다. 표면적으로는 이들 표현이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은 동어반복인데, 즉 그냥 반복될 뿐인 '설명'이다. 성인 남자는 성인 여자와 어린이, 다른 성인 남자를 왜 강간하는가? 왜, 그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남성의 본성에 속하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일부 남성들은 강간하기로 선택하고 다른 남성들은 강간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이유는 거의 설명하지 않는다. 강간하지 않는 것 역시 남성의 역량에 속한다. 따라서 도대체 왜 굳이 '본성(자연)'을 비난하는가? 표면 아래, '자연적'인 것에 관한 진술은 사실상 우리가 도덕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것에 관한 표현이다. '인간 본성'을 거론하는 것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셈이 된다. "이 상황은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기에 시도조차 하지 마라."


'인간 본성'을 거론하는 것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셈이 된다. "이 상황은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기에 시도조차 하지 마라."


'인간 본성'에 관한 논쟁은 사실상 선과 악에 관해 말하는 은폐된 방식이다. 인류의 선함을 의문시하는 것은 타자를 존중하는 것이 윤리적인지를 의문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은 나쁘다고 판정하면, 인간을 학대하더라도 나쁘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도, 인간 행태에 대한 진지한 관찰은 정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상황은 언제나 바뀌고 있고, 따라서 당신 역시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대다수 종은 정교하게 진화했지만, 날개, 부리, 혹은 발톱 같은 육체적 적응에 한정된 반면에, 인간은 창의성과 발명을 통해서 적응한다. 세계 전역에서 지금까지 우리와 동행한 개, 고양이, 쥐, 비둘기, 그리고 많은 다른 종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양한 환경에서 번성하는 제너럴리스트다. 유연성이 하나의 종으로서 인간의 특징이다.


유연성이 하나의 종으로서 인간의 특징이다.


우리의 강한 가소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은 우리의 총체적인 체화된 경험과 생명주기를 형성하는 일단의 독특한 육체적 특질을 갖춘 영장류다. 영장류로서 우리는 눈이 두개골의 앞면에 있는 덕분에 예리한 시각 감각과 멀리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었다. 우리는 마주보는 엄지손가락과 길고 기민한 손가락이 있는 덕분에 섬세하고 정교한 객체를 조작할 수 있다. 여타 영장류와 구분되게도, 우리의 자세는 직립인데, 이것은 우리의 발과 발목, 다리, 골반의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골격적 적응을 통해서 획득된 역량이다. 이것들은 단지 인류학자 줄리안 스튜어드(Julian Steward)가 "생물학적 상수"라고 일컫는 몇 가지 독특한 인간의 특질일 뿐이다.

 

우리의 많은 두드러진 특질 중에서 인간 뇌가 유달리 두드러진다. 각각의 인간은 매우 발달한 전전두엽 피질 또는 '전두엽'을 갖추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문화'라고 일컫는 상징과 연산의 패턴으로 뒤덮인 매우 유연한 슈퍼컴퓨터다(돌고래, 참돌고래, 그리고 다른 고등한 포유류는 매우 발달한 전두엽을 갖추고 있지만, 공통의 언어가 없기에 그것들의 문화가 어떤 모습일지 상세히 알아내기는 불가능하다). 전두엽 덕분에 우리는 인식하고, 기억하고, 추리하고, 상상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뿐더러 우리 마음의 눈을 과거와 미래로 투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교통 신호의 의미를 인식하면서 정지하지 않는다면 일어날 사태를 예측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전두엽이다. 더 중요하게도, 전전두엽 피질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익힌 것을 변경하고 새로운 패턴을 발명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야기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법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인간 본성은 존재하지 않고, 인간 잠재력만 있을 뿐이다.


전전두엽 피질의 독특함은 '인간 본성'에 관한 모든 논의에 중요한데, 그 이유는 그것이 문화의 영역 너머에 인식 가능한 인간의 삶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인간 유아는 돌보는 이로부터 수년간 지속적인 자극과 사랑, 애정이 없다면 문자 그대로 생존할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인간 '본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1961년에 맑스주의적 역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맑스의 경우에 인간은 "운동의 원리"에 의해 특징지어진다고 적는다. 초기 인류학의 영향 아래서 맑스는 역사란 발명과 결정 사이의 춤이라고 이해했다. 인간 본성은 존재하지 않고, 인간 잠재력만 있을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같은 논점에 이르지만, 다른 방향에서 이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로 서술함으로써 윤리와 철학, 논쟁 같은 가장 명백히 추상적인 발명품조차도 우리 신체가 구축되는 방식에 객관적인 근거가 있음을 올바르게도 함축한다. 우리의 생물학에 힘입어 우리는 있는 것뿐만 아니라 있을 수 있는 것과 있어야 할 것도 이해할 채비를 갖추게 된다. 우리는 윤리적 동물이다. 우리는 논쟁하고, 합리화하며, 스스로 생각하는 자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