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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네일: 오늘의 에세이-객체지향 존재론/행위자-네트워크 이론/운동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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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8. 21.

객체지향 존재론이란 무엇인가?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이란 무엇인가? 운동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What is Object Oriented Ontology? What is Actor Network Theory? What is the Philosophy of Movement?

 

객체란 무엇인가? 지식을 확보하려고 주체와 객체를 다시 결합하는 문제를 피하기 위한 한 가지 흥미로운 방식은 애초에 그 분열을 도입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이 객체일 따름이라면 어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주체를 대단히 복합적인 종류의 객체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객체에 관한 나의 독자적인 운동학적 이론을 제시하기 전에 나는 객체에 관한 두 가지 주요한 이론의 강점과 약점을 살펴보고 싶다. 이들 이론은 세계를 주체들과 객체들로 분할하기보다는 오히려 객체들과 그 관계들로 분할한다.

 

관계적 존재론

 

이런 접근법의 한 가지 형태는 '관계적 존재론'으로 일컬어진다. 이 관점에 따르면, 어떤 객체는 그것이 다른 객체들과 맺은 관계들 전부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으로 일컬어지는, 인기 있는 형태의 관계적 존재론에서는 관계가 일차적이고 객체는 기존의 네트워크에서 노드로서 창발한다. 객체는 자신이 행하는 것이거나, 혹은 분산된 네트워크를 통해서 자신이 작용하는 방식이다. 관계적 존재론에서는 다른 객체들과 관계를 맺지 않고 있는 객체 같은 것은 전혀 없다.

 

더욱이, 이 관점에 따르면, 객체들 사이에는 미리 주어진 위계가 전혀 없다. 관계는 언제나 변화하여 달리 될 수 있다. 객체가 어떤 정적 본질도 갖추고 있지 않은 이유는 더 넓은 네트워크가 객체들을 규정하고 서로 변별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있든 말든 간에 상황은 언제나 이러하다. 객체는 태어나고 죽지만 네트워크 패턴 자체는 그렇지 않은데, 그 이유는 이들 패턴이 모든 객체를 앞서고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네트워크에서 생겨나는 변화와 참신성의 원천이 객체 자체가 아니라면 그 원천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한 가지 답변은 이른바 '생기적 신유물론'이라는 또 다른 종류의 관계적 존재론에서 비롯된다. 이 관점에 따르면, 관계는 '생동적'이고, '가상적'이며, 객체의 어떤 물질적 운동 없이 관계의 변화를 창출하는 '힘'이다. 그 이론의 옹호자들은 이것을 객체에 관한 '정적' 관점으로 일컫지 않지만, 그것은 여전히 가상적 혹은 관계적 변화를 지지하여 운동 혹은 운동적 변화를 소거하는 관점이다. 예를 들면, 프랑스인 철학자이자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의 창시자인 브뤼노 라투르는 건축에 관한 '정적' 관점을 거부하고, 오히려 그 관점을 "언제나 건물로서의 연속적인 흐름을 기록할 수 있는 연이은 정지 화면들"에 관한 이론으로 대체하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다음에 논의될 인물인 그레이엄 하먼은 올바르게도 이렇게 말한다. "시간에 관한 정지 화면 모형은 정지의 문제를 증대할 따름이기에 이들 고립된 일시적인 순간들은 모두 '궤적'으로 일컬어질 수 있는 것으로 연계된다고 주장해야 한다고 하는 명령에 의해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런데 나 자신의 접근법과의 차이점을 논의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객체에 관한 비운동 기반 이론 중 하나를 살펴보자.

 

객체지향 존재론

 

'객체지향 존재론'에서는 객체들과 관계들이 전부다. 객체에 관한 관계적 관점과 마찬가지로, 이 관점은 객체들이, 인간이 있든 없든 간에, 변화하는 관계들의 네트워크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객체지향 존재론자의 경우에, 객체는 자신의 관계들로 환원될 수 없다. 객체는 "특정한 경계와 구분점"이 있는 '이산적'이고, '안정'하며, '알 수 없는' '물자체'다. 각각의 객체는 서로 떨어져 '진공포장된' 상태로 있고 오로지 그것에 '독특한' 비밀 또는 '물러서 있는 본질'을 자신의 내부에 품고 있다. 이 이론의 창시자이자 주창자인 그레이엄 하먼은 그것을 주체 없는 칸트주의의 일종으로 서술하는데, 요컨대 만물은 알 수 없는 객체 자체다.

 

하먼이 객관주의자에게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하먼의 말에 따르면, 객관주의자는 어떤 객체를 그 구성 요소들(질료와 입자들)로 환원함으로써 그 객체를 '아래로 환원'하기 때문이다. 하먼이 또한 구성주의적 관점과 관계적 관점을 거부하는 이유는, 하먼의 말에 따르면, 이들 관점은 어떤 객체를 그 관계들의 네트워크로 환원함으로써 그 객체를 '위로 환원'하기 때문이다. 과학이 제시하는 전형적인 설명은 어떤 객체가 더 큰 객체--이것 역시 독자적인 성분들을 갖추고 있다--의 성분일 따름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 객체를 '이중 환원'한다고 하먼은 말한다.

 

객체 존재론자가 우려하는 바는, 어떤 객체를 순전히 그것이 다른 객체들과 맺고 있는 관계들로 규정함으로써 그 객체 자체가 무언가 다른 것에 의해 해소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객체 자체의 '실재적 본질'이 그것의 변동하는 관계들의 외양 뒤에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이 관점에 따르면, 객체의 본질과 실재를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다른 객체들과 맺은 모든 관계에서 분리된 객체의 '표현되지 않은 저장고'을 '진공포장'하는 것이다.

 

이 이론은 객체의 변화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먼은 객체를 두 부분으로 분할한다. 한 부분은 그 관계들과 더불어 변화하고 나머지 다른 한 부분은 "해당 객체가 다른 것으로 바뀌게 할...수 있을 감춰진 폭발성 에너지"를 품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하먼은 관계적 존재론이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사물이 자신의 현행 관계들 배후에 무언가를 비축하고 있지 않다면, 아무것도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먼은 말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객체의 본질이 모든 변화와 운동의 원인이지만, 이따금 그럴 뿐이다. "안정성이 표준이다." 그 이유는 대체로 객체가 "초연하며 [그리고] 도대체 작용하지 않고서 그저 현존할 따름이고, 너무나 비관계적이어서 어떤 활동에도 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먼은, 객체의 본질은 "영원한 특질"을 지니고 있지 않고 심지어 "일시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존재에 관한 관계적 이론들은 "정적" 이론이라고 비난함과 더불어 객체의 감춰진 부분은 세계를 "초월"하기에 어떤 활동에도 관여하지 않음을 궁극적으로 인정한다. 내가 이해하기에, 운동은 어떤 종류의 활동이 필요하기 때문에 객체 존재론의 궁극적인 입장은 여전히 부동과 정지의 입장이다. 그래서 하먼이 변화는 "아무 작용도" 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런 형이상학적 믿음은 알려진 모든 물리 법칙을 위배하게 된다.

 

움직이는 객체들

 

그렇다면 운동의 철학은 무엇이고, 그것은 이전 이론들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전진 방법을 어떻게 제공하는가? 운동의 철학은 과정 철학의 일종이다. 이것은 객체를 정적 형태로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준안정의 과정으로 여김을 뜻한다. 일부 운동은 규모가 작고 반복적이어서 해당 객체는 강의 소용돌이처럼 비교적 안정한 상태에 여전히 있을 수 있게 된다. 일부 다른 운동은 더 극적이어서 격렬한 폭풍우처럼 객체들을 파괴하거나 아니면 변환할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앞서 언급된 이론들은 어떤 종류의 정지 상태에 따라 객체를 규정한다. 그리하여 이들 이론은 운동과 참신한 변환, 객체의 창발을 철저히 이론화할 수 없다. 이들 이론 중 단 두 가지 이론의 한계를 각각 간단히 살펴본 후에 운동의 철학과 어떻게 비교되는지 파악하자.

 

객관주의와 관련된 문제는 그것이 객체를 그 발견과 관찰의 조건에 의해 변화하지 않는 것처럼 다룬다는 점이다. 이런 견해는 객체의 역사와 관계, 행위주체성을 무시하고서 객체를 전적으로 수동적인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객체가 수동적인 것에 불과하다면, 이들 객체가 어떻게 다른 객체들과 나란히 출현하거나 관찰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다른 한편으로, 구성주의와 관련된 문제는, 객체가 인간이 생각하거나 진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런 객체 역시 다른 객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활력과 행위주체성을 박탈당하게 된다. 객체가 운동하고 새로이 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그것은 어떻게 출현하여 변화하는가? 구성주의 역시 인간 주체와 자연적 객체 사이의 근본적 차이를 상정할 수밖에 없는데, 그리하여 인간과 자연은 각각 자신의 세계에 갇혀 버리게 된다.

 

적어도 객체에 관한 관계적 이론들은 이런 분리를 거부하고 객체가 자신의 관계를 통해서 작용함을 인식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관계가 객체에 앞서 그리고 객체를 넘어서 객체를 전적으로 결정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객체의 행위주체성과 운동은 어디에 있는가? 객체는 어떻게 그런 관계 속에 새롭고 생성적인 운동을 도입할 수 있는가? 라투르의 경우에, 객체를 구성하는 관계들은 본성상 완전히 확정적이어서 그 지도를 그릴 수 있다. 관계의 변화는 객체의 운동이나 그 물질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 속 일련의 갑작스러운 '정지 화면'처럼 발생한다.

 

마지막으로, 객체지향 존재론은 객체를 불변의 본질, 사회적 구성물, 혹은 관계로 환원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더라도, 그 이론은 객체를 전적으로 희생하고서야 그것을 구조한다. 결국에 우리는 객체의 본질이 세계를 완전히 초월하고 자신의 어떤 관계로부터도 단절되어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 이론의 핵심 모순은, 객체의 본질이 모든 변화와 운동의 원인이지만 여하튼 작용하거나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부동성과 정적 변화의 철학이다.

 

객체에 관한 이들 이론은 더할 나위 없이 다르지만, 그것들은 모두 객체의 운동을 움직이지 않는 무언가(본질, 심적/사회적 표상, 평평한 관계성, 혹은 완전히 비활동적인 본질)로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여기서 문제는, 이들 이론이 주체와 객체의 분열이든 객체와 관계의 분열이든 간에 어떤 종류의 분열로 시작한다는 점이다.

 

운동의 철학의 경우에 다른 점은 무엇인가? 주요한 차이점은, 운동을 무언가 다른 것으로 설명하고자 하기보다는 오히려 "우주에는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역사적 진술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반증 가능한 주장이다. 그것이 틀린 것으로 실험적으로 입증된다면, 나는 나의 입장을 포기하고서 대안의 철학적 결과를 탐구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런 시각에서 바라보면, 나는 객체란 독특하여서 자신의 확정적인 부분들이나 관계들로 환원될 수 없다는 하먼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그 이유는 객체를 구성하는 물질의 운동이 근본적으로 확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질, 혹은 물리학자가 더 정확히 '에너지'라고 일컬을 것은, 최소의 층위에서는 '블확정적인 요동'이다. 이들 요동은 입자, 실체, 혹은 객체가 아니고, 게다가 직접 관찰되거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객체가 불확정적인 에너지로 '환원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 없다. 환원의 핵심에 놓여 있는 확정적인 '무언가'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운동은 '불확정적인 운동'이고 관계는 '불확정적인 관계'다. 내가 보기에, 물질의 불확정적인 운동은 더 높은 차원의 혹은 외부적인 인과적 설명이 없거나, 혹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실험적으로 검증된 것이나 어떤 암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해소하고자 하는 이론들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당분간 나는 현행의 불확정적인 운동이 자연의 근본적인 특질일 실제적 가능성에 나의 철학적 내기를 건다. 루크레티우스가 서기전 일 세기에 물질의 불확정적인 비껴남을 자신의 철학의 핵심에 두었을 때 수 세기 동안 논평자들은 부인하였지만, 이제는 입증된 과학이 되었다.

 

객체지향 존재론자는 이런 대안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그레이엄 하먼은 물리학자 캐런 배러드의 작업에 관한 최근의 논문에서 양자 불확정성이라는 관념에 이미 대응하였다. 그 논문에서 하먼은 "아래로 환원하기는 개별 객체들을 진실이기에는 너무나 앝다고 여기고서 그것들을 더 작은 사물들 혹은 불확정적인 유출의 원초적 덩어리로 대체하고자 한다"라고 서술한다. 이 진술에 대응하여 나는 두 가지를 말할 것이다. 우선, 배러드의 경우에, 그리고 나 자신의 경우에, 객체는 양자 장만큼 '진실한' 것이고 '대체'라는 관념이 터무니 없는 이유는 객체가 장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장 이론이 가난을 설명하지 못함은 명백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기에 이것 역시 무관한 논점이다. 둘째, 우주 전체에는 불확정적인 유출보다 더 '원초적인 덩어리'는 그야말로 있을 수 없다. 과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물질/에너지가 실체가 아니며 고정된 선험적 특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발견이었다. 덩어리는 미분화된 것이지만, 불확정적인 요동은 모든 차이를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분화 과정이다. 내 생각에, 하먼은 배러드와 나 자신에 대한 자신의 이의를 무효화하는 방식으로 양자 불확정성과 요동의 의미를 잘못 이해했다.

 

정지에서 운동으로 가는 것은 출발점을 조금 이동한 것처럼 들릴 것이지만, 그것은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앞서 언급된 이론들은 자신의 출발점에서 독특하게 비롯되는 방법이 있고, 객체에 관한 운동지향 이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객체의 운동과 창발, 참신성을 설명할 수 있는 객체에 관한 이론을 원한다면, 이들 처음 선택지는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객체에 관한 운동학적 이론은, 세계가 부동의 불변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거나 설명될 수 있다고 애초에 가정한 다음에 운동과 과정을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대신에 이런 논리를 뒤집는다. 그 이론은 양자 유출의 역사적 발견에서 시작한 다음에 이런 새로운 출발 원리가 주어질 때 출현하는 과학적 지식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운동의 철학은,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나타나는 대로의 생기력에 기반을 두고 있거나 혹은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서술한 대로의 정적인 섬광등 같은 '계기'에 기반을 두고 있는, 과정에 관한 낡은 모형들과 구별되는 새로운 종류의 과정 철학을 제시한다. 이런 세 번째 종류의 과정 철학을 가리키는 나의 용어는 '과정 유물론' 혹은 '운동학적 유물론'이다.

 

객체가 본질, 관념, 혹은 관계가 아니라면, 운동의 과정 철학의 견지에서, 객체란 무엇인가? 객체에 관한 운동학적 이론에서 '객체'라는 낱말의 운동학적 기원은 라틴어의 어원, 즉 ob-('맞서다')+iacio('내가 던지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객체는 근본적으로 운동학적인 과정이다. 객체는 운동으로 내던져진 것이고 자신에 등을 돌리거나 자기 주위를 회전한다. 객체는 주름이다. 객체는 이산적이고 진공포장된 원자라기보다는 오히려 더 크고 더 많은 복잡한 매듭을 만들어내면서 스스로 접히는 연속적인 과정과 유사하다. 객체는, 그 라틴어 기원이 시사하는 대로, 시간과 공간 속의 이산적이거나 정적인 블록이 아니라 운동학적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