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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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해그룬트: 오늘의 에세이-도래할 세계: 우리는 무엇을 중시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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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9. 18.

도래할 세계: 우리는 무엇을 중시해야 하는가?

The world to come: What should we value?

 

-- 마틴 해그룬트(Martin Hagglund)

 

인간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지 못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종이다. 여타의 종은 자연적 환경이 있고 나름의 삶의 형식을 유지하는 자연적 방식이 있다. 일부 동물은 자신의 환경을 환경다운 것으로 구축하기 위해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 하지만(댐을 건설하는 비버의 사례에서 그런 것처럼 말이다), 그들이 무엇을 만들어 내야 하고 종이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모든 환경에서 그런 것처럼, 상황이 잘못될 수 있는데, 이를테면 떨어지는 바위가 댐을 파괴할 수 있고, 물이 중독될 수 있으며, 바이러스가 퍼질 수도 있다. 그런데 비버의 삶에서 무언가가 잘못되었을 때,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지에 관한 잘못된 관념을 품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사실상 비버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잘못된 관념을 품을 수가 없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그들의 본성에 의해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인간의 경우에는 우리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영위해야 하는지에 관한 물음이 언제나 현안이 되는데, 우리는 그 사실을 잊으려고 하지만 말이다. 우리는 다른 종의 자연적 생활 방식을 검토함으로써 그 종에 이상적인 조건을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단지 우리의 현재 사회나 과거 사회를 검토함으로써 우리가 살아갈 최선의 방식을 알아낼 수는 없다. 우리는 자연에서 주어진 자리가 없는 유일한 동물--우리에게 알려진 종 가운데--이다. 우리는 스스로 보금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같은 취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번영에 역행하는 조건을 만들어 내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유행병이 닥쳤을 때,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삶의 형식에 우연히 들이닥친 어떤 자연적인 불행한 사건으로 간단히 여길 수가 없다. 모든 동물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연한 이유로 감염될 수 있지만, 다른 동물과 달리 우리는 사회적 원인과 결과에 책임이 있다. 유행병은 하나의 종으로서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는 우리 종을 어떻게 조직하는지에 관한 물음을 불가피하게 제기한다.

 

우리가 누구인지--그리고 우리가 누구이어야 하는지--에 관한 물음에 관여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청년 칼 맑스가 우리의 '유적 존재'라고 일컫는 것의 핵심에 놓여 있다. 그의 관념은 가정된 인간 본질에 대한 소박한 호소라고 종종 일축되지만, 그런 비판은 잘못된 것이다. 인간의 유적 존재는 바로 우리는 주어진 본질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확실히 생물학적 제약을 받지만--게다가 우리는 모든 그런 제약을 원칙적으로도 초월할 수 없다--우리에게는 언제나 우리가 이들 제약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관한 물음이 존재한다.

 

모든 세대가 동일한 생활 주기를 되풀이하는 다른 종과 달리, 우리 종은 우리의 삶의 형식을 재생산하는 다양한 방식을 반영하는 역사가 있는데, 요컨대 우리는 주인과 노예였고, 영주와 농노였으며,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였다. 더욱이, 우리의 유적 존재는 우리가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의 좋음 혹은 나쁨에 입장을 확실히 할 수 있음을 수반한다. 《자본》에서 맑스가 강조하는 대로, 우리는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보다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할 수 있으며, 그리고 단순한 본능보다 신념에 비추어서 자신의 실존 조건을 전환할 수 있는 유일한 종이다.

 

그렇지만 혁명적 변화는 단순히 상상과 관념을 통해서 일어날 수는 없다. 그것은 생산과 소비를 통해서 우리가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방식의 물질적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의 삶--우리가 중시하는 것--에 관한 실존적 물음은 우리 사회의 경제적 조건과 분리될 수 없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가 인간의 삶과 지구상의 다른 종의 생명을 그 자체로 목적으로서 중시한다고 공언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실상 우리가 서로를 그 자체로 목적으로서 여길 수 없는 경제적 체계 아래서 살아간다. 오히려, 우리 경제는 우리가 서로를 이윤을 산출할 목적을 위한 수단('인적 자본')으로서 여기기를 요구한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번영하고 있기보다는 오히려 상품을 생산하고 소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복지, 그리고 우리가 일부를 이루는 생태계의 복지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경제적 '가치'도 없으며, 우리가 그곳에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한에 있어서만 가치가 있을 뿐이다.

 

환경 위기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파악하려면, 그리고 도래할 더 나은 세계를 형성할 어떤 기회를 가지려면, 가치문제에 대한 맑스의 분석이 필수적이다. 유행병의 결과로서, 현재 많은 것이 우리의 경제적 우선순위를 의문시하고 이윤을 위한 생산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비판이 우리의 정치경제의 객관적 조건과 연계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단지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비판일 뿐이다. 이윤 창출이 우리의 집단적인 최우선 사항인 이유는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아래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본의 형태로 축적되고 부로서 분배되는 이윤에 의존한다. 그런 경제 '성장'이 없다면 임금, 수익, 사회 복지, 혹은 공공재가 없을 것인데, 그 이유는 국가 자체가 자본 부에 대한 과세를 통해서 재정을 조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필수 재화의 생산과 배달은, 유행병이 당면 현실을 고통스럽게도 분명히 하기도 전에, 빈곤한 노동자들의 삶을 희생시키는 것에 이미 기반을 두고 있었다. 자본 부의 창출은, 부유한 나라에서든 생산지가 이전되는 가난한 나라에서든지 간에, 저렴한 노동으로서 착취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의존했으며 언제나 의존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적 경험에서 배우는 것에 관해 진지하다면, 우리는 자신의 창에서 '필수 노동자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일 이상의 것을 행하거나 개인으로서 자신의 우선순위를 바꾸어야 할 것이다. 조직적인 집단행동을 통해서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만이 지속 가능하고 번영하는 세계에 대한 약속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들을 것이지만, 더 중요한 일은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 종의 존재가 그것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