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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 오늘의 에세이 - 평평한 존재론, 물음, 그리고 회집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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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2. 21.

평평한 존재론, 물음, 그리고 회집체

Flat Ontology, Questions, and Assemblages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지금까지 나는 규범성과 우리가 가치를 결정하는 방법에 관해 매우 훌륭한 한 친구와 길게 논의했다. 계속 거론되는 것 중 하나는 나의 객체지향 존재론이 어떤 윤리적 의미를 함축하는지에 관한 물음이었다. 특히, 나의 평평한 존재론이 모든 사물은 동등하게 소중학거나 혹은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지 여부에 관한 물음이 제기된다. 이런 물음은 내 친구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수년 전에 내가 평평한 존재론을 처음 제시한 이래로 지금까지 거론되는 것이다. 내가 처음 이 질문을 받기 시작했을 때, 나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평평한 존재론은 가치와 값어치에 관한 논제가 아니라, 존재하는 것과 세계가 어떠한지에 관한 논제다. 평평한 존재론은 벼룩이 인간만큼 소중하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벼룩이 실재적이고 인간도 실재적이라는 논제다. 사람들이 존재론적 주장을 가치 주장으로 전환하는 이상한 경향을 참작함으로써 나는 우리가 이렇게 하게 만드는 우리 심리의 어떤 특질이 있다고 짐작하게 되었다. 나는 그 이유를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그런 상황을 흔히 맞닥뜨리기에 이런 결론을 회피하기가 어렵다.

 

이 중 어느 것도 내가 나의 작업에 정치적 및 윤리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시사하지 않는다. 나의 논문들, 《객체들의 민주주의》, 그리고 《존재의 지도》에 관해 성찰할 때, 나는 내 작업의 전반적인 목적이 사람들이 더 나은 물음을 제기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수년 동안 이것을 말했지만 이제서야 그것에 관해 생각하는데, 지금까지 나는 더 나은 물음으로 내가 뜻하는 바를 설명한 적이 거의 없다. 매우 실제적인 의미에서 나의 작업은 철학자들을 겨냥하고 있지 않다. 나는 누가 어떤 철학자를 더 잘 해석하는지, 혹은 우리가 칸트주의자이어야 하는지, 헤겔주의자이어야 하는지, 아니면 사변적 실재론자이어야 하는지, 혹은 하이데거가 옳은지 아니면 바디우가 옳은지에 관한 철학적 논쟁을 견딜 수 없게 된다. 이들 물음은 모드 장점과 가치가 있지만, 그것들은 내가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내 작업의 정신을 요약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이 설계의 철학이라고 말할 것이다. 내가 나의 작업이 사람들이 더 나은 물음을 제기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할 때, 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와 그것이 회집하는 방식에 관한 더 나은 물음을 언급하고 있다. 나는 도처에서 설계 문제를 찾아내고 우리의 세계에서 수많은 잔혹 행위를 인식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설계와 더불어 그것이 우리 삶을 향상시키거나 손상하는 방식에 관해 성찰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 개혁을 살펴보자. 부시와 오바마의 교육 개혁 둘 다의 특징은 연방 보조금 지급을 학생의 성적과 연계하는 것이었다. 그 착상은, 학교의 성과가 부진하면 교사들과 학교가 대응할 자금을 회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이 끔찍한 설계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그 착상은, 학교가 실패하고 있는 이유는 교사들이 자신들의 일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들 종류의 설계 해결책은 해당 문제를 매우 피상적으로 분석한다.

 

좋은 설계는 생태적으로 생각하기를 요구하는데, 여기서 생태는 그저 '자연적 생태계'를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과 온갖 종류의 사물 사이의 관계들을 뜻한다. 미시건주 플린트라는 지역을 살펴보자. 그것은 어떤 종류의 회집체인가! 수년 전에 공장이 폐쇄되었고, 일자리들이 사라져 버렸다. 이것은 주택 소유가 붕괴되었음을 뜻했다. 그런 주택 소유의 붕괴는 재산세 수입이 붕괴되었음을 뜻했다. 재산세는 미합중국에서 교육 자금을 조달하는 주요한 방법인데, 이를테면 여름과 겨울에 난방과 냉방 같은 단순한 것들을 제공한다. 물론, 실업과 더불어 여타의 문제가 생겨나는데, 이를테면 범죄율 상승, 약물 남용, 가정 파괴, 가정 폭력의 증가 등이 있다. 한편으로, 플린트 지역에는 문자 그대로 뇌 손상을 유발하는 방식으로 물이 중독되는 전면적인 물 위기가 있는데, 그리하여 다양한 정서 및 인지 질환을 유발한다. 여기서 '탈출 속도'에 이르는 것--가난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내기--을 엄청나게 어렵게 만드는 온갖 종류의 음의 되먹임과 양의 되먹임으로 가득 찬 하나의 온전한 생태가 존재한다.

 

부시와 오바마의 '해결책'을 다시 살펴보자. 그들은 교사가 문제라고 말했다. 교사들이 단지 훈련을 더 많이 받았다면, 교사들이 단지 자신의 일를 제대로 했다면, 학생들의 성적이 향상되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했다. 연방 보조금 지원과 학생 성적 사이의 연계에 대한 전제 전체는 인간의 수행--이 경우에는 교사들--과 오직 인간에 대하여 주어진다. 그들은 가난한 학생의 성적에 원인이 되는 상황의 생태를 분석한 적이 없다. 이들 학생이 이런 종류의 생태에서 발달할 때 그들의 성적이 어떻게 좋겠는가? 이런 종류의 빈곤에 빠진 세계에서 존재할 때 그들의 성적이 어떻게 좋을 수 있겠는가? 예를 들면,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뇌의 발달에 그야말로 영향을 미치는 가난의 조건에서 양육된 어린이 중에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발생 빈도가 높으며, 그리고 그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또한 인지 기능의 감퇴를 초래한다. 여기서 내가 개괄하는 것은 《존재의 지도》에서 내가 '지도학'이라고 일컬은 것에 관한 매우 간단한 묘사다. 지도학은 어떤 회집체에 대한 지도 제작이자 어떤 회집체의 구성요소들이 움직임과 역량을 우리에게 개방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생태를 형성하는 방법에 대한 지도 제작이다.

 

좋은 설계는 좋은 지도학이 필요하다고 나는 믿는다. 좋은 설계 해결책을 고안하려면 회집체의 지도를 그려야 한다.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가 가르친 대로, 첫 번째 조치는 언제나 문제를 조사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 문제는 생태다. 내가 사람들이 더 나은 물음을 제기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를 제공하고 싶다고 말할 때, 나는 그들이 다루고 있는 생태의 조직에 대한 인식에서 생겨나는 물음을 뜻한다. 이런 생각이 많은 사람에게 떠오르지도 않는 것으로 판명된다. 그들 교육 개혁가는 자신들이 바로잡고자 시도하고 있는 교육적 위기를 생성하는 생태들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교육적 위기를 볼 따름이다. 그들은 빙산의 일각을 볼 따름이다. 나는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가 상황이 왜 이러한지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손-안에-있는 것', 즉 우리가 사용하는 장치와 매우 통합되어 있기에 그것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당연시한다. 그러므로 부시와 오바마 같은 사람들이 교육 같은 쟁점을 처리할 때, 그들은 언제나 그들을 위해 작동한 생태를 발달시켰으며, 그리고 그들은 이런 생태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리잡고 있다고 가정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끊임없이 보는 것을 보지 못한다.

 

내가 보기에, 설계 철학의 제일 원리는 평평한 존재론이거나, 혹은, 오래전에 이안 보고스트가 서술한 대로, "모든 존재자는 존재한다는 점에서 동등하지만, 동등하게 존재하지는 않는다"라는 논제다. 또다시, 이것은 규범적 진술도 아니고 가치 진술도 아니다. 우리가 흔히 정치에 관해 말하는 방식을 살펴보자. 우리는 정치를 인간들의 서로에 대한 믿음과 헌신과 관련된 철저한 인간사로 여긴다. 우리는 모든 비안간을 도외시한다. 여기서 우리는 둔중한 실재론을 실천하는데, 인간은 중심으로 여겨지고 여타의 것은 무시된다. 평평한 존재론은 우리가 인간만을 바라보지 말고 회집체의 모든 구성요소를 바라보도록 당부한다. 회집체의 작동에 있어서 그것들은 모두 어떻게 관계를 맺고 서로 상호작용하는가? 이것은 회집체의 지도 제작을 수행하는 첫 번째 조치다. 내가 내 작업의 이상적인 독자를 생각할 때, 그것을 입수하기를 가장 바라는 사람들은 철학자들이 아니라 활동가들, 설계자들, 건축가들, 혹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세계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데 관여하는 모든 사람이다. 주지하듯이, 맑스는 철학의 목적이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내 작업이 그런 일을 하는 데 조금이나마 이바지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