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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 하먼 : 인터뷰 - 브뤼노 라투르의 정치철학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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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4. 26.

 

※ 아래 글은 2015년에 그레이엄 하먼이 <Sonic Acts>와 가진 인터뷰에서 "브뤼노 라투르의 정치철학"과 관련된 발언을 옮긴 것이다.

 

 

GH : [...]

작년에 출판된 <<브뤼노 라투르 : 정치적인 것을 다시 회집하기(Bruno Latour : Reassembling the Political)>>라는 책에서 제가 보여주려고 노력한 것은, 정치란 주로 진리와 관련된 것도 아니고 권력과 관련된 것도 아니라 오히려 불확실성과 관련된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  

 

제가 지나가는 길에 언급하였기에 브뤼노 라투르의 정치 이론에 관해 조금 더 말해 봅시다. 그의 이론은 결코 묵시론적이지도 않고 극적이지도 않으며, 심지어 그의 저작들을 처음 통독했을 때 가시적이지도 않습니다. 저는 '라투르는 좌익인가 우익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 책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친숙한 좌익-우익 스펙트럼에서 그를 어디에 위치시킵니까? 좌파로부터 당신은 라투르가 부르주아 신자유주의자라는 말을 들을 것이지만, 좌파는 모든 사람을 그렇게 부릅니다. 저는 그것이 전적으로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라투르를 사적으로 알고 있으며, 그리고 그의 정치적 견해들이 때때로 놀랍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를 때때로 보수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프랑스의 중도적 사민주의자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는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저는, 라투르를 좌익 혹은 우익으로 분류할 수 없는 이유는 이들 정치적 지향이 이른바 자연상태에 관한 상이한 견해들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만약 당신이, 루소가 생각하는 대로,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하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인간의 불평등을 부자연스럽고 정의에 어긋난 것으로 여길 것이고, 그리하여 끊임없이 도덕적으로 비난하고 가능하다면 사회적으로 전복할 필요가 있다고 여길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마키아벨리, 홉스 혹은 슈미트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본성적으로 악한 성향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질서를 최우선시할 것이고, 갈등을 삶의 필연적인 부분으로 간주할 것이며, 평등주의적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모든 시도보다 신중한 안정을 선호할 것입니다. 라투르에게 이런 도식을 부과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는, 라투르는 결코 인간 본성에 관한 이론을 갖고 있지 않으며, 게다가 그는 인간을 정치적 영역의 일부로만 간주한다는 점입니다. 페르 쇼우텐이 매우 유익하게 지적한 대로, 그가 영장류 학자 셜리 스트럼(Shirley Strum)과 함께 수행한 개코원숭이에 관한 연구에서 라투르의 독창적인 정치적 사유의 탄생을 좇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서술한 대로, 개코원숭이와 관련된 문제는 이들 원숭이가 사회적이라는 점입니다. 개코원숭이들은 누가 서열이 더 높은지 파악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가련한 개코원숭이는 항상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어야 합니다. '내가 위계에서 밀려 났는가? 누군가가 내 짝을 강탈하고 있는가? 최근에 누가 최상의 음식을 먹고 있는가?' 개코원숭이는 자신이 직면하는 이런 불안정한 상황에 대해 끊임없이 걱정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대체로 이런 식으로 결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깨어나고, 당신은 자기 직업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당신은 자기 배우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으며, 당신은 자기 은행 계좌, 직책, 이름, 여권 번호, 시민권을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 위기 시기를 제외하면,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알려져 있고,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지위를 매일 협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라투르의 흥미로운 착상은 생명 없는 객체들이 일반적으로 우리를 위한 안정화 기능을 수행하는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 반지, 여권, 은행 계좌, 우편 주소, 사회보장번호, 운전 면허증이 있습니다... 이것이 저를 그런 저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 없는 객체들입니다. 우리가 그저 들판에서 함께 서 있는 일단의 벌거벗은 사람들이라면, 어떤 종류의 위계 혹은 심지어 어떤 종류의 정체성도 갖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다시는 인식할 수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특히 그럴 것인데, 언어 역시 또 하나의 중요한 생명 없는 객체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라투르는 자연상태에 관한 좌익 혹은 우익 이론을 결코 갖고 있지 않다고 간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라투르는 좌익/우익 스펙트럼과 아무 관계도 없는 반면에, 그는 제가 진리 정치 대 권력 정치라는 더 중요한 근대 정치적 이원론으로 간주하는 것과 아주 많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대다수 사람은 주로 진리 정치인이거나 아니면 권력 정치인입니다. 비록 모든 사람이 둘 다의 혼합물이지만 말입니다. 좌익적 형태(루소, 마르크스)와 우익적 형태(레오 스트라우스) 둘 다로 나타나는 진리 정치는 우리가 기본적으로 이미 정치적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관념입니다. 저는 정치적 진리가 평등주의라고 알고 있다고 합시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모두 평등하지만, 현재 우리는 평등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무언가가 잘못 되었음이 틀림없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착취하고 있음이 틀림없거나, 혹은 어떤 특권을 지닌 사회적 계급이 우리을 억압하는 일에 관계하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라투르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데, 그는 그런 이야기가 정치적 토론을 단절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정치적 토론을 이기기 위해 과학을 도입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지구온난화와 관련된 사실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후 논쟁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은 아무도 모든 사실을 실제로 알지는 못한다는 점입니다. 합의가 진전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사실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익의 진리 정치도 있는데, 그것은 유럽보다 미합중국에서 더 일반적입니다. 물론, 널리 조롱받는 저자이지만 영향력이 매우 큰 아인 랜드(Ayn Land)가 있는데, 랜드는 자유방임 자본주의가 정치적 진리라고 전적으로 확신했습니다. 아마도 주류 지식인들에게 더 흥미로운 인물들은 레오 스트라우스의 제자들인 스트라우스주의자들인데, 레오 스트라우스는 히틀러 치하 독일에서 탈출하여 시카고 대학교에 가게를 차렸고, 지금까지 오랜 시간 동안 미합중국의 보수적 사상에 심원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약간의 시간을 들여 스트라우스주의자들의 책을 읽고 강연을 들으면 깨닫게 될 것은 그들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기본적으로 실상을 제대로 파악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저는 이것을 완전한 오독이라고 간주하지만 말입니다―은 영원히 변치않는 인간형들의 위계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인간들 사이에는 어떤 평등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역사 시대에는 현명한 사람들과 바보들의 유사한 혼합물이 존재합니다. 역사주의는 틀렸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배우든, 우리가 어떤 기술을 개발하든 간에 중요하지 않은데, 어떤 인간형들의 고유한 가치의 견지에서 지속 가능한 서열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철학자들이 가장 상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철학자들보다 대중의 수가 엄청나게 많고, 그래서 대중은 철학자들을 쉽게 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소크라테스를 떠올리면 됩니다. 스트라우스주의자들은 이것이 진짜 위험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들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관심은 대단히 많은 허망한 바보가 지배하는 도시에서 철학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 교훈은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참된 위험을 도시로부터 은폐하고, 그것의 애국적이고 종교적인 제의에 동참하며, 암호화된 비의적 방식으로 그들의 가장 어려운 진리들을 작성해야 하는 것인 듯 보입니다. 이것은 지성사에 대한 그들의 관계도 관장하는데, 여기서 그들은 각주와 의도적으로 터무니없는 논증들에서 저자의 '진짜 견해들'을 탐지하려고 노력합니다. 저는 수업 시간에 데카르트의 초상을 꺼내들고 대충 이렇게 말한 스트라우스주의자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주장했지만, 그냥 그의 얼굴을 살펴 봅시다. 그는 명백히 무신론자이고, 그는 대단히 엉큼한 듯 보입니다'. 개별적 사례들에서 이것은 강력한 기법일 수 있는데, 권위주의적 역사 시대 동안, 그리고 아마도 현재까지도, 암호화된 글쓰기에 대한 많은 사례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스트라우스주의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단순한 의견보다 더 훌륭한 지식, 지혜를 갖추고 있는 어떤 권위 있는 선생들이 존재한다고 실제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익적 판본의 진리 정치이며,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그들의 영웅이라는 것이 기묘한데, 소크라테스는 정치 혹은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진리를 알고 있다고 결코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권력 정치는 어떤 진리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념입니다. 대충 서술하자면, 누구든지 이기는 자가 무엇이 진리인지 결정합니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진다.' 논쟁의 이 측면이 애초에 라투르의 고향입니다. 그는 의기양양한 홉스주의자, 심지어 무모한 홉스주의자로 시작합니다. 라투르는 항상 홉스에게 이질적인 방식으로 정치적 풍경에 생명 없는 객체들을 더하지만 말입니다. 슈미트도 라투르의 수수께끼의 한 조각인데, 특히 나중에 그렇습니다. 나치의 일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슈미트는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에 대한 반대에 힘입어 오늘날 좌파에게도 매우 인기가 있습니다. 슈미트는, 헤겔적 의미에서, 부르주아적 자유주의를 정치에서 생명과 신체를 위태롭게 하기를 바라지 않고 그저 물질적 이득을 허용하는 정치적 안정성을 갖고 싶어하는 자들의 입장으로 규정합니다. 정치에 관한 표면적으로는 딱딱한 견해에도 불구하고, 홉스의 목적은 자연상태에서 발견되는 편재하는 전쟁을 종식시키는 것이기에 그는 때때로 자유주의의 창시자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홉스는 국가가 폭력뿐 아니라 진리 자체에 대한 독점권도 갖기를 바라는데, 어떤 종교, 어떤 과학도 국가를 초월할 권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슈미트는 이런 사상을 완전한 인간의 삶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하기에 좋아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은 자신의 본질을 위한 투쟁과 관련이 있으며, 이것은 주권자가 적과의 실존적 투쟁을 천명하는 유명한 '예외상태'에서 가장 생생하게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슈미트가 자유주의자들이 항상 행한다고 주장하는 바와 같이, 정치적 행위에서 근절될 필요가 있는 것은 도덕적으로 사악한 적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미합중국 외교 정책의 경우에 사실임이 확실합니다. 미합중국인들은 누군가를 그저 패배시킬 필요가 있을 뿐인 적으로 간주하는 일에 힘겨워하면서 일반적으로 적을 근절될 필요가 있는 도덕적 악으로 서술합니다. 슈미트는 홉스처럼 정치적 영역에서 폭력을 제거하려고 시도하기보다는 오히려 폭력을 회복시키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좌파는 이것을 좋아하는데, 그들은 자유주의에 의해 단적으로 억제당하거나 무시당하고 있는 계급 적대가 아주 많이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좌파의 경우에도 모든 종류의 '진리'에 대해서 회의적인 그런 유형의 권력 정치인들이 존재합니다. 자신을 진리 혹은 현실에 대한 어떤 소박한 믿음도 넘어선 사람으로 간주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선호하는 집단들이 더 많은 '권력'을 획득하도록 투쟁하는 많은 탈근대적 이론가들이 떠오릅니다.

 

청년 라투르는 가차없는 권력 정치인입니다. 그는 '나는 생명 없는 객체들의 마키아벨리다' 또는 '홉스가 옳다'라는 정신으로 다양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일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1991)에서 라투르는 갑자기 자신의 곡조를 바꿉니다. 그는 보일과 홉스 사이의 갈등에 대한 스티븐 섀핀과 사이먼 섀퍼의 논의에 관한 이야기로 그 책을 시작합니다. 물론 보일은 근대 초의 위대한 과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고, 대단한 진리 추구자입니다. 보일은 펌프를 사용하여 진공을 만들어내는 것과 관련된 예증 가능한 진리를 확인하는 훌륭한 목격자들과 함께 자신의 실험을 설정합니다. 그 다음에 홉스가 등장하는데, 그는 더 상위의 진리에 대한 호소와 그로 인한 내전의 개시를 피하기 위해 국가가 종교를 독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홉스는 과학이 초월적 지식에 직접 호소함으로써 국가와 충돌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모든 것에 대한 최종 권위일 필요가 있는데, 그렇지 않다면 자연상태의 경우와 꼭 마찬가지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일이라는 이 자식이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심지어 홉스는 보일을 잉글랜드 정부에 신고합니다. 홉스는 보일이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해주기 위해 실험을 수행하고, 그런 다음에 과학이 국가보다 더 상위의 진리를 주장할 것이기 때문에 그냥 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섀핀과 섀퍼는 보일보다 홉스가 더 옳았다는 결론을 내리는데, 무엇이 좋은 과학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규정은 사회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회가 과학과 자연 둘 다를 능가합니다. 그리하여 이런 사태가 라투르에게 전환점인데, 홉스가 옳았다는 의견에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십오 년 이상 동안 명시적인 홉스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1991년에 라투르는 홉스가 틀렸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정치는 특권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과학이 진리에 직접 접근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도 진리에 직접 접근하지 못합니다. 과학에서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에서도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라투르가 폴리스는 순전히 내재적이지도 않고, 결코 자기완결적이지도 않다고 깨닫게 되는 핵심적인 지점입니다. 우리가 계속 주시해야 하는 외부, 폴리스가 아직 인식하지 못한 외부가 존재해야 합니다. <<자연의 정치>>(1999)에서 이것은 두 가지 기본 집단, 즉 과학자들과 도덕주의자들의 과업이 됩니다. 과학자들의 일은 정치권이 아직 고려하지 않은 생명 없는 객체들을 탐지하는 것입니다. 기후변화가 그것에 대한 매우 좋은 일례일 것입니다. 나머지 한 집단은 도덕주의자들입니다. 초기의 라투르는 도덕주의자들이 억압당하고 패배하는 모든 사람의 문제를 두고서 푸념할 뿐이기 때문에 그들을 측은하게 생각했으며, 그리고 초기 라투르는 정의를 뒷받침할 힘을 갖지 못한 채로 정의롭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에 이기고자 분투하는 것이 당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연의 정치>>에서 라투르는 갑자기 도덕주의자들에게 반하게 되는데, 그들이 여전히 편입되지 않은 폴리스의 외부를 탐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라투르의 정치적 궤적의 다음 단계는 누르츠 마레(Noortje Marres)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데, 마레의 박사학위 논문이 라투르의 정치철학에 실제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마레의 박사학위 논문의 제목은 <<쟁점이 없다면, 공중도 없다(No Issue, No Public)>>이었고, 2006년에 완성되었습니다. 마레는 미합중국에서 학자들에게는 알려져 있지만 일반 대중들은 알지 못하는 리프먼-듀이(Lippmann-Dewey) 논쟁에 대한 재해석을 제시하는데, 미합중국은 두 저자 리프먼과 듀이의 모국입니다. 명백히 존 듀이는 가장 중요한 미합중국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교육 분야에 미치는 국제적인 영향력으로 유명합니다. 반면에 월터 리프먼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주요한 저널리스트였지만 아무튼 잊혀졌습니다. 당대에 그는 널리 친숙한 저자였으며, 미합중국 민주주의에 관한 몇 가지 냉소적인 글을 적었습니다. 미합중국이 정치적으로 자술하는 이야기는, 미합중국의 체제는 시민들이 스스로 지배하는 민주주의이기에 시민들이 현명하게 투표할 수 있도록 탁월한 공공 교육이 대단히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물론 실제로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사실상 정책의 미묘한 점들에 아무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선동가들의 조작과 근시안적인 이기심에 의거하여 투표하는 무지하고 무식한 잉여 인간이 존재합니다. 지금까지 미합중국 대중에 의해 꽤 많은 어리석은 결정들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리프먼은 미합중국이 기술관료에 의해 지배받을 수 밖에 없다는 약간 냉소적인 노선을 취하게 됩니다. 상황을 이끌기 위해서는 전문가들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관련 정보가 너무나 없기 때문에 스스로 지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있는 척할 것이지만, 실제로는 민주주의가 없습니다. 그런데 기질적으로 더 낙관적인 듀이는 이것을 읽고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책은 정말로 자극적인 책이지만, 리프먼은 틀렸다. 그는 사람들에게 너무 높은 빗장을 설정하고 있다. 사람들은 모든 쟁점에 관해 심층적인 교양을 결코 갖출 수가 없는데, 그것은 불가능한 요구다. 리프먼조차도 모든 쟁점을 숙지할 시간이 없으며, 그리고 그는 생계를 위해 정치를 다룬다'. 그 대신에, 듀이는 정치적 쟁점들이 각각의 경우에 독자적인 공중을 생성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일곱 가지 정치적 쟁점에 깊은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저는 국가의료보험에는 관심을 가질 것이지만, 동성애 결혼에는 관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면 정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논쟁에는 관여하지만 저 논쟁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저는 제 관심을 끄는 쟁점들에 관해서 정통해지는 데 수고를 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듀이와 마레가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라투르는 이것을 '객체지향 정치'라고 부릅니다. 공중을 만들어내는 정치적 객체가 존재하며, 그리고 공중에게 그 객체는 결코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객체와 관련하여 논쟁들이 존재합니다. 그것과 관련하여 타협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서로 권력 투쟁만을 벌이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은 진리가 무엇인지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가르쳐주는 대로, 인간들은 결코 진리에 이를 수는 없지만, 그것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라투르가 지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지점인데, 즉 그는 홉스에게 맞서서 이런 종류의 존재론적으로 실재론적인 정치를 지향하며, 정치를 침범하는 외부가 있고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집단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라도 환영받지만, 모든 사람이 모든 쟁점에 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 년 전에 가이아에 관한 기포드 강연에서 그러한 대로, 인류세라는 주제를 제기할 때 라투르는 다시 한 번 전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라투르는 자신의 옛 권력 정치 노선으로 복귀하는데, 이번에는 홉스적 형식이 아니라 슈미트적 형식의 노선을 취합니다. 이것은 라투르가 다음과 같은 식으로 말할 때 드러납니다. '우리는 기후변화 회의론자들과 관련된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 간에 우리는 그들을 납득시킬 수 없지만, 우리가 옳다는 것은 상당히 잘 알고 있습니다. 행성의 미래가 걸려 있습니다. 기후 모델링은 경사면 아래로 공을 굴리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기 때문에 과거에 과학자들이 할 수 있었듯이 그것을 전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라투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슈미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런 회의론자들을 굴복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적입니다. 증거에 의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견해를 바꾸라고 설득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다루는 데 진절머리가 납니다. 그들을 물리칠 때입니다.' 라투르는 폭력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을 굴복시키자. 그들은 적이다'. 슈미트와 마찬가지로, 라투르는 그들이 도덕적으로 사악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그들이 우리 모두에게 위협이 되고, 그래서 그들은 그저 굴복당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슈미트주의적 의미에서 전쟁을 선언해야 합니다.

 

LK : 패배와 적대관계에 관한 글을 쓰는 상탈 무페(Chantal Mouffe)와 보니 호니그(Bonnie Honig)와 얼마간 유사합니다 ...

 

GH : 저는 무페의 사상과 라투르의 사상 사이의 관계에 관한 논의가 더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두 인물을 특정적으로 다룬 상세한 글이 발표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흥미로울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슈미트의 정치 이론과 흥미로운 관계를 맺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라투르는 결국, 제가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도, 권력 정치를 인류세를 다루는 한 가지 방법으로 간주합니다. 저는 어쩌면 어떤 다른 길, 라투르가 이미 취했던 그 길을 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는 실재와 그것의 놀라운 것들이 결코 순전히 내재적일 수 없는 정치적 영역에 속하는 외부를 구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