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오늘의 인용-누옥의 이상

댓글 0

카테고리 없음

2012. 9. 23.

 

- 아래의 글은 1931년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 <<포럼 앤드 센츄리(Forum and Century)>> 제84권에 기고하여 실린 글 <내가 보는 세상(The World As I See It)>에서 일부 인용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글을 읽다보면, 그를 왜 "철학자-과학자(philosopher-scientist)"―'연구비'를 일용할 양식으로 삼는 '과제책임자'라는 종이 득세하고 있는 지금은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된―라고 부르는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

 

"나에게는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의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묻는다는 것이 객관적인 견지에서 항상 어리석게 보였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은 자신의 노력과 판단의 방향을 좌우하는 어떤 이상을 지니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안락과 행복 그 자체를 인생의 목표로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이런 인식의 윤리적 바탕을 나는 누옥의 이상[ideal of a pigsty]이라 부르고 싶다.

 

내가 나아갈 길을 밝혀 주고 인생을 유쾌하게 받아들이도록 새로운 용기를 되풀이 안겨 준 이상은 친절과 아름다움 그리고 진실이었다. 비슷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과의 동류 의식이 없었다면, 예술과 과학적 노력 분야에서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객관적 세계에 몰두하지 않았더라면 나에게 인생을 공허하게 비쳤을 것이다. 사람들이 얻으려고 애를 쓰는 진부한 대상―재산과 외형적 성공 그리고 사치―이 나에겐 언제나 경멸의 대상으로 보였다.

 

나는 사회 정의와 사회적 책무를 강하게 느끼고 있지만 이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 또는 공동체와 직접적인 접촉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기 못한 것과 항상 묘한 대조를 이뤘다. 나는 진짜 '외로운 여행자[lone traveler]'로서 지금까지 진심으로 내 조국, 내 가정, 내 친구, 심지어 내 직계 가족의 일원이 되었던 적이 없다. 나는 이런 온갖 유대관계 속에서도 거리감과 홀로 있어야 할 필요성을 한번도 떨쳐 버리지 못했는데, 이런 느낌은 해가 갈수록 커졌다.

[...]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체험은 신비감이다. 신비감은 참된 예술과 진정한 과학을 낳는 근원적인 감정이다. 신비감을 알지 못해 더 이상 경이를 느낄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든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고 그의 두 눈은 침침한 상태일 것이다. 종교를 탄생시킨 것은―비록 두려움과 뒤섞인 것이긴 하지만―신비감의 체험이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인식이나 심오하기 짝이 없는 이성과 더할 수 없이 눈부신 아름다움―가장 원시적인 형태로서만 우리의 마음에 와 닿을 수 있는―에 대한 우리의 지각, 바로 이런 인식과 감성이 참된 신앙심을 형성해 낸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고 이런 의미로서만이 나는 독실한 신앙인이다.

 

나는 피조물에게 상을 주고 벌을 내리거나 우리 내면에서 겪는 것과 같은 형태의 의지를 지닌 신을 머리에 떠올릴 수 없다. 나는 사람이 육체적 죽음을 극복하고 살아남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도 없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나약한 영혼들이 두려움과 터무니없는 이기심에서 그런 생각을 품을 것이다. 나는 생명의 영속성을 불가사의한 채로 바라보고, 현존하는 세계의 경이로운 구조를 인식하고 일별하는 데 만족하며, 또 아무리 사소하지만 자연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이성'을 그 일부나마 이해하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데 만족하고자 한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아인슈타인의 나의 세계관>>(홍수원, 구자현 옮김, 중심, 2003), pp. 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