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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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칼리슬: 오늘의 에세이-스피노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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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0. 31.

 

 

스피노자, 4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이다

Spinoza, part 4: All there is, is God

 

―― 클레어 칼리슬(Clare Carlisle)

 

무한하고 영원한 신은 아무 경계도 없고 세계의 모든 것은 이 신 안에 존재해야 한다고 스피노자는 주장한다

 

이 연재물에서 여태까지 나는 당대의 종교적 세계관과 철학적 세계관에 대한 스피노자의 비판에 집중했다. 그런데 그는 초월적 창조자 신에 대한 인간형상론적, 인간중심적 믿음 대신에 무엇을 제안하는가?

 

스피노자는 몇 가지 기본적인 철학적 술어들―실체, 속성, 그리고 양태―을 정의함으로써 <<윤리학>>을 시작한다. 이런 정의들을 제시할 때, 사실상 그는 당대의 선도적 사상가였던 데카르트가 실재를 개념화하는 데 사용했던 철학적 어휘에 대한 본원적인 수정을 시도하고 있다. 우리가 이 술어들을 적절하게 이해한다면, 오직 하나의 실체―그리고 이것은 신이다―가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고 스피노자는 주장한다.

 

실체는 독립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논리적 범주인데, 스피노자가 서술하듯이, "나는 자체를 통해서 잉태되는 것을 실체로 이해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속성과 양태들은 실체의 특성들이고, 그래서 논리적으로 이 실체에 의존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한 특수한 물체를 하나의 실체로 여길 수 있고, 이 물체는 개념적으로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게와 색깔과 모양 같은 그 물체의 특성들은 별개로 존재한다고 간주될 수 없는 성질들이다. 그것들은 어떤 물체의 무게, 색깔, 그리고 모양이어야 한다.

 

데카르트의 세계관은 개별 존재자들을 독자적인 실체들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이상학과 스콜라 철학적 신학에 의존한다. 예를 들면, 인간들은 유한한 실체들인 반면에 신은 무한하고 영원한 특수한 실체이다. 사실상, 데카르트는 개인이 두 개의 실체―사유라는 주요한 속성을 지닌 정신과 연장 또는 물리성이라는 주요한 속성을 지닌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 견해는, 이 상이한 실체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지에 관한 어려운 문제, 즉 "심신 문제"로 알려진 것을 낳는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실체, 속성, 그리고 양태라는 철학적 술어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꽤 전문적이고 추상적인 듯 들리게 된다. 그런데 데카르트적 형이상학은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이 공유하는, 세계에 관해, 그리고 또한 우리 자신들에 관해 생각하는 하나의 방식을 나타낸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가 이산적인 객체들, 개별 사물들로 가득 차 있다고 여긴다. 이곳에 이 사람, 저곳에 저사람, 탁자 위에 이 컴퓨터, 바깥에 저 나무와 그 나무의 줄기를 타고오르는 다람쥐 등이 있다. 이런 개별적 존재자들은 나름의 특질 또는 특성들―크기, 모양, 색깔 등―을 지니고 있다. 그것들은 뜨겁거나 차가울지도 모르고, 조용하거나 시끄러울지도 모르고, 정지해 있거나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르며, 그런 성질들은 다소 변화될 수 있다. 실재를 개념화하는 이런 방식은 언어의 구조에 반영되어 있다. 명사들은 사물들이 무엇인지 말하고, 형용사들은 사물들이 어떠한지 말하며, 동사들은 사물들의 행위, 움직임, 그리고 변화하는 상태들을 가리킨다. 명사, 형용사, 그리고 동사의 친숙한 구분은 실체, 양태, 그리고 속성이라는 철학적 개념들에 대한 근사적인 지침을 제공한다.

 

스피노자가 주장하듯이, 오직 하나의 무한한 실체―신―가 존재한다면, 이 신 바깥의 존재자 또는 이 신과 별개의 존재자는 전혀 존재할 수 없다. 신은 무한한, 경계 없는 총체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신은 외부가 없는 전체이어야 하고, 그래서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어야 한다. 물론, 우리가 나무와 그것의 녹색, 그리고 녹색과 청색을 구분할 수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 유한한 존재자들은 신과 구분될 수 있으며, 그리고 또한 서로 구분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간주할 수 있는 별개의 실체들에 대한 구분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이번에도 이것은 꽤 추상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사하듯이, 우리는 이미지 없이 생각할 수 없고, 그래서 나는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을 파악하는 데 바다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깨닫는다. 대양은 유일한 실체인 신을 나타내고, 개별적 존재자들은 파도들―이것들은 바다의 양태들이다―과 같다. 각 파도는 얼마동안 유지되는 자체의 모양을 갖지만, 그 파도는 바다와 분리되지 않으며 바다와는 별개로 존재한다고 간주될 수 없다. 물론 이것은 은유일 뿐이다. 무한한 신과 달리, 대양은 경계가 있고, 게다가 바다의 이미지는 연장이라는 속성에서만 신을 나타낸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신의 정신―말하자면, 사유의 무한한 총체―을 바다와 같은 것으로, 그리고 유한한 존재자들의 사유들을 생겨나고 사라지는 파도와 같은 것으로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의 세계관은 생명의 두 가지 특징―의존성과 연결성―을 부각시킨다. 각 파도는 바다에 의존하고, 그리고 그것은 바다의 일부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파도와 연결되어 있다. 한 파도의 움직임은 나머지 모든 것들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마찬가지로, 각 존재자는 신에 의존하며, 그리고 신의 일부로서 그것은 다른 모든 존재자와 연결되어 있다. 세계에서 우리가 돌아다니고 행동할 때 우리는 다른 존재자들에 영향을 미치고, 그리고 결국 우리는 우리가 접촉하게 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이런 기본적인 통찰이 스피노자의 철학에 종교적 특징과 윤리적 특징을 부여한다. 전통적 종교에서 의존성과 연결성은 흔히 가족이라는 은유를 사용하여 표현되는데, 성부가 있고, 일부 사례들에서는 성모가 있으며, 그리고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스스로를 형제와 자매로 서술한다. 이런 어휘는 기독교, 불교, 그리고 이슬람교 같은 문화적으로 다양한 전통들이 공유한다. 스피노자의 경우에, 가족 은유는 이미지라기보다 이성을 통해서 철학적으로도 전달될 수 있는 진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