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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칼리슬: 오늘의 에세이-스피노자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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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1. 2.

 

 

스피노자, 6부: 감정을 이해하기

Spinoza, part 6: Understanding the emotions

 

―― 클레어 칼리슬(Clare Carlisle)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간에 우리의 감정들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능력이 증가하고, 그래서 행복이 증가한다고 스피노자는 주장한다

 

<<윤리학>>의 3부에서 스피노자는 인간의 감정들을 "선, 면, 또는 입체들의 표면들인 것처럼" 간주할 작정이라고 적고 있다. 다른 모든 양태들과 꼭 마찬가지로 감정들도 자연적이고 법칙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수학적으로 정확히 연구될 수 있다고 그는 시사한다. 그리고 이것은 감정에 의해 매우 흔히 촉발되는 인간 행동이 완전히 이해될 수 있고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스피노자는, "인간은 자연의 질서를 따르기보다 오히려 교란하며,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음으로써 오도된 도덕적 태도를 택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그들은 인간의 나약함과 부정합성의 원인을 보편적인 자연의 일반적인 힘들에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몹시 슬퍼하고, 비웃고, 경멸하고, 또는 더 자주 혐오하게 만드는 인간 본성 속의 악덕을 모르는 것에 있다고 간주한다." 스피노자는 우리의 감정과 행동을 혐오하거나 조롱하는 것보다 그것들을 이해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생각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무엇이 그것을 초래하고, 그리고 어떻게 초래하는지 알 때 무언가를 완전히 이해한다. 그의 철학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은 꽤 어려운 주문이고, 그래서 무엇이든 어떤 특수한 현상의 원인들은 대단히 복잡하다. 사실상, 무언가를 궁극적으로 이해하기는 그것이 부분을 이루는 전체를 아는 것, 달리 말해서 신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스피노자는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는 작업을 더 쉽게 갈 수 있는 행로로 접근한다. 그의 첫걸음은 능동성과 수동성을 기본적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그것의 적절한 원인인 무언가가 우리 내부에서 또는 우리로부터  일어날 때, 즉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그 본성만으로 분명히 이해될 수 있는 무언가가 우리 내부에서 또는 우리로부터 도출될 때 우리는 능동적이라고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우리가 부분적인 원인에 불과한 무언가가 우리 속에서 또는 우리 본성으로부터 도출될 때 우리는 수동적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자유의지에 대한 스피노자의 부정과 상반되지는 않는다. 능동적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에 의해 규정되는 반면에, 수동적일 때는 어느 정도 다른 무언가(또는 누군가)에 의해 규정된다.

 

그 다음에 스피노자는 모든 개체가 자체의 현존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고 주장한다. 살기 위해 우리는 능력 또는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다양한 외부적 영향이 우리의 능력을 감소시킬 수 있기 때문에 이 능력을 유지할 뿐 아니라 증가시키려고 노력한다. 스피노자는 그런 노력을 코나투스(conatus, 의지 또는 욕구를 의미하는 라틴어)라고 부르고, 이 코나투스는 "사물의 실제 본질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특이한 방식으로 본질이라는 전통적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스피노자는 그것에 능동성과 역동성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의 철학에서, "사물의 정체"는 자체의 능력, 에너지, 생명력과 동일하게 된다.

 

유한한 개체의 능력―정신의 사유 능력과 육체의 운동 능력―은 시간에 따라 변동한다. 스피노자는, 기쁨이라는 감정은 능력이 증가하는 느낌으로 일어나고, 슬픔이라는 감정은 능력이 감소될 때 일어난다. 이것은 계속 존재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동시에 기쁨 또는 쾌락의 추구이기도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능력을 증가시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며, 이것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좋은 것으로 가치있게 여기게 된다.

 

스피노자는 기쁨과 슬픔을 두 가지 기본 감정으로 여기고, 다른 모든 감정 상태들은 그것들을 초래하는 특수한 대상들에 대한 관념들과 결합된, 두 가지 기본 감정의 변양태들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사랑은 그것의 원인에 대한 관념과 결합된 기쁨의 느낌―그리고 증오는 슬픔의 느낌―이다. 스피노자는 그런 느낌들이 실재보다 상상과 더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사실상 내 본질을 약화시킬 수 있을 것인데―특히 이 사랑이 불안하거나 강박적이라면―그가 내 삶을 증진시킨다고 잘못 믿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감정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의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은 기쁨과 슬픔 둘 다, 그리고 그것들의 변양태들도 개인이 그것들을 의식하는지 그리고 분명히 이해하는지 여부에 의존하여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일 수 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이해는 인과관계에 대한 지식을 포함한다. 우리는 무엇이 상이한 느낌들을 일으키는지 알 필요가 있으며, 그리고 이것은 우리 자신의 본성에서 도출되는 것들과 외부적 영향들의 복잡한 조합일 것이다. 그런 지식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감정들을 그저 겪을 뿐이지만, 그것들에 대한 이해는 변형 효과를 낳는다. "정념으로서의 감정은, 우리가 그것에 대한 명료하고 뚜렷한 관념을 형성하자마자 더 이상 정념이 아니다." 슬픔 또는 비탄 같은 고통스러운 감정도 정신이 그것을 철저히 안다면, 그 앎의 활동은 기쁨이라는 느낌을 유발하는 능력 증가의 전조가 된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대상에 무관하게 이해란 본질적으로 즐거운 것이라고 시사하고 있다.

 

감정에 관한 자신의 사유에서 스피노자는 더 오래된 철학적 전통들―특히,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스토아 학파의 도덕 이론들―의 영향를 받았다. 그러나 또한 그는 결국 꽤 근대적인 듯 들리게 되는데, 우리 감정들의 원인들을 이해하는 것에 대한 그의 강조는 다양한 형식들의 심리치료법과 공명하고 심지어 얼마간의 현대 자조론 문헌과도 공명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증가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번성하게 돕는 것은 그들을 명료함 또는 치료의 수동적인 수혜자들로 취급하기보다 그들이 더 능동적으로 되도록 강화시키는 것을 의미해야 한다. 스피노자는 바로 이런 식으로 자신의 독자들을 강화시키려고 시도하고 있을 것인데, <<윤리학>>은 확실히 통상적인 자조론 지침서가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렇지만, 현대적 형식으로, 이런 종류의 자기 강화 및 삶 향상의 윤리는 흔히 개체주의적 사유 방식과 연결되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스피노자의 경우에, 우리가 별개의 자율적인 존재자들이라는 관념은 그의 철학적 비판의 핵심 대상이다. 다음 주에 도덕과 좋은 삶의 문제를 다루면서, 모든 존재자는 나름의 행복을 추구하고 자체 능력을 극대화시키려고 노력한다는 스피노자의 주장과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그의 단언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에 관해 생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