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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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칼리슬: 오늘의 에세이-스피노자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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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1. 8.

 

 

스피노자, 8부: 윤리학 읽기

Spinoza, part 8: Reading the Ethics

 

―― 클레어 칼리슬(Clare Carlisle)

 

이 마지막회분에서는 <<윤리학>>이 철학적 저작일 뿐 아니라 철학적 삶의 방식을 위한 교육 지침서인지 다룬다

 

이 연재글에서 우리는 스피노자 철학의 여러 요소들을 검토했다. 스피노자의 전통적인 종교적 신조들에 대한 비판, 인간 삶의 형이상학, 인간 감정론, 그리고 미덕에 대한 설명을 비롯하여 스피노자 철학의 여러 요소들을 검토했다. 그렇지만, 그의 위대한 저작 <<윤리학>>의 독특한 철학적 방법과 문학적 양식에 관해 언급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 마지막회분에서 나는 이 쟁점을 다루고 싶다.

 

<<윤리학>>은 유클리드의 <<원론>>의 유형을 따른다는 점에서 더 이전의 스피노자의 저작들과 다르고, 그래서 사실상 그것의 방법은 흔히 "기하학적"이라고 서술된다. 공리와 정의들로 시작하여 스피노자는 일련의 번호가 매겨진 서로 연결된 명제들로 자신의 철학적 견해들을 차근차근 해명한다.

 

스피노자의 논변의 연역적인 유사수학적 구조 때문에 <<윤리학>>은 처음 읽는 독자들에게 꽤 벅차다. 그것은 냉정하고 비인격적으로 보일 수 있는데, 데카르트의 <<성찰>>의 친숙한 고백조 또는 플라톤의 <<대화편>>의 극적인 대화적 문체가 없다. 그러나 사실상 스피노자는 자신의 독자들과 직접적이고 심층적인 방식으로 소통하기를 원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기하학적 방법을 택했다. 그는 자신의 책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뿐 아니라 그들이 사는 방식에 진정한 차이를 만들어내기를 원했다.

 

공리들, 정의들, 명제들, 그리고 예증들을 빈번히 교차 참조하는 <<윤리학>>의 논증 방법은 스피노자 사상의 기본 원리―우주 만물은 연결되어 있다―를 반영한다. 지난 몇 주 동안 살펴보았듯이, 유한한 개체들―인간들을 포함하여―은 별개의 자율적 실체들이 아니라 신 또는 자연으로 불릴 수 있는 단일한 실체의 양태들이다. 그 자체로, 모든 존재자는 더 큰 전체의 일부이고, 그래서 그 전체 속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자리가 파악할 때에만 제대로 알 수 있다. 그리고 스피노자의 경우에는 이런 종류의 지식이 좋은 유덕한 인간 삶의 기초라는 점을 알았다.

 

그런데 사물들은 정확히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스피노자가 말하는 "관념들의 질서와 연결"은 무엇이며, 그리고 우리는 이 질서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스피노자는, 경험론 철학자들이 주장했듯이, 우리는 세계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세계에 관해 알게 된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리고 이런 경험들은 변하는데, 모든 종류의 인자들에 의존하여 우리 각자는 상이한 사물들을 상이한 질서로 만난다. 여러 해 동안 개인의 상상력과 기억은 연상과 의미들의 복잡한 연결망에 따라 발달하고, 이것이 그가 생각하는 방식을 구성한다. 스피노자가 서술하듯이,

 

우리 각자는 연상이 육체에서 사물들의 심상들을 배치한 대로 한 생각에서 다른 한 생각으로 넘어갈 것이다. 예를 들면, 사막에서 말의 족적을 본 병사는 즉각적으로 말에 관한 생각에서 기병에 관해 생각으로, 그리고 그 생각에서 전쟁에 관한 생각으로 계속 넘어갈 것이다. 그러나 농부는 말에 관한 생각에서 쟁기에 관한 생각으로, 그 다음에 밭에 관한 생각으로 계속 넘어갈 것이다. 그래서 각자 자신이 늘 하던대로 이런저런 식으로 사물들의 심상을 결합하고 연결하는 방식에 따라 한 생각에서 다른 한 생각으로 넘어갈 것이다.

 

그래서 습관 또는 관습이 개인의 정신에 있어서 관념들의 어떤 질서를 낳는다. 그런데 이 질서는 우연한 경험들과 만남들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우리는 흔히 이런 경험들을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우리에게 뜻밖에 일어날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확실히 그것들은 우리가 언제 그리고 어디에서 우연히 태어나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양육되는지에 의존한다. 물론 관념들의 이런 주관적인 배치들은 세계에서 사물들이 정말 배치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는 방식과 전적으로 다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관념들의 참된 질서와 연결은 경험과 습관이 아니라 이성을 통해서 알게 된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윤리학>>의 연역적인 기하학적 구조로 되돌아간다. 이 텍스트에서 실재의 본성에 관한 주장들은 엄격한 논리적 질서를 좇는다. 스피노자는 1660년대 동안 자신의 철학적 견해를 어떻게 발전시켰는지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그는 그 견해가 자체의 합리적 구조에 따라 펼쳐지게 내버려 둔다. 그는 사람들이 <<윤리학>>을 읽음―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써 점진적으로 그들의 정신을 재교육하여 그것의 논리적 구조를 좇을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들의 생각들이 습관, 관습, 그리고 상상에 의해 배치되게 내버려 두는 대신에, 그들은 사물들의 진정한 질서에 관해 점점 더 계몽될 것이다.

 

지난 몇 주 동안 살펴보았듯이, 스피노자는 어떤 관습적인 믿음들을 특히 오도된 것들이라고 규정한다. 예를 들면, 창조자 신이라는 관념과 자유의지라는 관념, 그리고 개인이 자체적으로 충분한 별개의 실체라는 견해가 그렇다. <<윤리학>>에서 겨냥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뿌리 박힌 사유 습관이다. 이것은 그 책이 철학적 저작일 뿐 아니라 철학적 삶의 방식을 위한 일종의 교육 지첨서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윤리학>> 읽기는 정신을 변형시키는 훈련이다. 독자들이 그 텍스트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획득함에 따라, 그들 자신의 사유 활동은 지배적인 미신과 편견들의 수동적인 수용을 대체하게 되어야 한다. 그리고,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런 전환은 항상 능력을 강화시키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그리고 유쾌한 것이라고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