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스티븐 샤비로: 오늘의 인용-크툴루의 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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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5. 5.

 

- 아래의 글은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의 <<접속, 또는 네트워크 사회에서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Connected, or What It means to Live in the Network Society)>>(2003)의 166-168쪽에 실린 글을 옮겨 놓은 것이다.

 

 

크툴루의 부름.

마르크스는 흡혈귀 전설의 과정을 자본주의와 관련시키지만, 흡혈귀의 실제 모습은 전(前)자본주의적인 것과 비슷한 것으로서 더 잘 이해된다. 흡혈귀들은 귀족적이지 부르주아적이지 않다. 그들은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한다. 그들의 탐욕은 성적으로 고조되어 있는데, 그것은 경제적 계산보다도 열정에서 나온다. 브램 스토커(Bram Stoker)의 소설에 대한 자세한 분석에서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Kittler)는 드라큘라 백작이 어떻게 십구 세기 말의 과학기술과 특히 당시의 새로운 "기계적 담론 처리" 장치, 타자기와 축음기에 의해 패배당하는지 보여준다. 이런 장치들 덕분에 흡혈귀적 피의 흐름은 "정보의 흐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환원된다. 그 자체로 그것은 꼭 어떤 다른 비트 다발처럼 계산될 수 있고 조작될 수 있다. 이것이 흡혈귀 사냥꾼들로 하여금 드라큘라를 포획하고 파괴할 수 있게 하는 것인데, 상품 형식에 의해, 그리고 보편적 등가물로서의 화폐와 정보에 의해 균질화된 세계에서 "대타자는 더 이상 피난처가 없다". 드라큘라가 영국에 처음 출현한 순간인 1897년에조차도 그는 이미 구식이다. 스토커의 소설에서 그는 서유럽의 식민주의적 기획에 희생된다. 또한 이것은, 마르크스가 자본에 의한 노동의 형식적 포섭이라고 부르는 것―"자본이 그것의 영역 밖에서 생성된 노동 실천들을 그것 자체의 생산관계 아래로 편입시키는 과정들" 가운데 하나―에 의해 그 백작이 포획당함을 의미한다. 드라큘라는 봉건 영주이지 자본가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참화는 자본주의적 세계 시장에 의해 포획되어 그것의 범위 안에 편입된다. 오늘날 상황은 늙은 백작에게 훨씬 더 슬프다. 그가 자본의 기술을 처음 만난 지 일 세기도 더 지난 후에 드라큘라는 복고풍의 아이콘으로서만 생존한다. 이것은 우리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와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가 시사하는 것처럼,  "포섭이 더 이상 형식적이 아니라 실제적이다. 자본은 더 이상 그것의 영역 외부가 아니라 오히려 내부를 바라보며, 따라서 그것의 팽창은 외연적이라기보다는 집약적이다...근대적 기술 전환 과정들을 통해 자연 전부가 자본이 되었거나, 또는 최소한 자본에 복속된" 시점에 이미 이르렀기 때문이다. 오늘날 흡혈귀들은 인기있는 상품, 어느 때보다도 더 인기있는 상품일 것이지만, 그것들은 더 이상 정말 공포스러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안전한 용량의 퇴마 의식에 대한 우리의 소박한 굶주림을 충족시킨다. 그것들은 아직 모든 것이 상품 형식에 의해 포섭되지는 않았던 시기에 대한 우리의 향수 어린 갈구를 역설적으로 구체화하는 상품이다. 네트워크 사회에서 자본이라는 흉물은 흡혈귀의 순전히 아늑하고 편안한 모습을 띨 수 없다. 자본은 절대적으로 비인간적이고 인식불가능한 것―스토커의 드라큘라보다는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으로 묘사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