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스티브 풀러: 삶의 기예로서의 과학-인터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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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5. 13.

 

- 아래 글은 스티브 풀러(Steve Fuller)가 자신의 책 <<삶의 기예로서의 과학(Science: The Art of Living)>>에 관한 열 가지 질문에 답변하는 인터뷰 내용을 옮긴 것이다.

 

 

1. <<삶의 기예로서의 과학>>이라는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그 자신이 한때 신학생이었던 마크 버논(Mark Vernon)이 제게 연락을 취해 영국의 저명한 철학서 출판사인 아큐멘(Acumen)에서 펴내는 자신의 '삶의 기예' 총서를 위해 이 책을 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저의 과학학 작업, 특히 과학적 권위의 민주화, 그리고 창조론과 지적 설계론이 어떻게 그런 조류에 도움이 되는 역할을 했는지―미국에서는 확실히, 그리고 영국에서는 점점 더―에 대한 제 자신의 관심에 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저는 '프로트과학(Protscience)'이라는 술어를 만들었는데, 그것에 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거의 틀림없이 그 개념이 이 책의 중심을 이룰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크는, 제가 꽤 어렵고 문제가 있는 신학적 개념들―성체 성사, 은총, 그리고 섭리와 같은―까지도 과학적 기획에 동기를 부여하는 데 수행해 온 긍정적 역할을 그렇게 많이 강조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은 제게 제 자신의 종교적 뿌리와 다시 연결될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저는 결코 열심히 교회에 나가거나 특별히 독실하지 않습니다. 확실히, 제 어머니는 인격적 강함의 원천으로서의 신에 관해 항상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제가 항상 매력적이라고 깨닫는 관점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결코, 매우 많은 거듭난 무신론자들이 행한 듯한 그런 식으로, 신과 사랑에 빠지고 신과의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는 신학을 추상적 형이상학이 생생한 인격적 성질을 획득하는 일종의 3-D 판본의 철학으로 여겨왔습니다. 이것은 저의 고등학교(뉴욕시의 레지스 고등학교) 시절 예수에서 마르크스와 테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로의 전환을 솔기가 없는 듯 보이게 한 탁월한 예수회 선생님들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제게 모든 신학―좋기만 하다면―은 궁극적으로 해방 신학이며, 거기서는 과학이 변화의 행위자로서 중심 역할을 수행합니다. 저는 오늘날 사람들이 과학-종교 관계를 훨씬 더 적대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깨닫고 있지만, 제가 처음 신에 관심을 둔 1970년대에는 그것이 그렇게 명백하지 않았습니다. 제게, 과학의 신학적 기반을 회복하는 것은 전적으로 세상에서 과학이 수행해야 하는 진보적 사명을 회복하는 것과 관련된 일입니다.

 

2. 독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곰곰이 생각해볼만한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많은 것이 독자의 출발점에 달려 있습니다. 기본 메시지는, 아브라함적 종교들이 없었다면, 특정적으로,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우리는 '신의 이미지와 모습'으로 창조된다는 교리가 없었다면 과학이 현재 지니고 있는 중요성을 지니거나 획득한 방식을 개발했을 것 같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교리에 대한 과학친화적 해석은 가장 대범한 것, 즉 우리는 신과 재결합하기 위해 타락한 상태에서 회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속적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궁극적인 만물 이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의 마음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무신론자들과 신자들, 신학자들과 과학자들 모두가 이런 등식을 거부하고 싶어 할 이유는 많이 있지만, 거부의 대가는 꽤 큰데, 특히 과학의 경우에 그렇습니다. 목적이 수단을 참으로 정당화하도록 훨씬 더 숭고한 어떤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면, 20세기에 과학이 주도한 정책 결정들에 의해 인류와 자연 둘 다에 저질러진 모든 폭력과 파괴를 우리가 참아온 점에 대한 어떤 다른 정당화도 정말 없습니다. 신의 섭리라는 신학적 교리는 정확히 이런 시각―적대를 직면했을 때 인내를 촉구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습니다. 과학에 대한 우리의 줄지 않는 믿음―특수한 과학적 권위들을 의심할 때에도―은 비슷하게 섭리주의적 심성을 반영합니다. 어떤 의심이라도 있는 경우를 생각하여, 저는 이 시각을 지지합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눈을 뜨고 추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집단적인 도덕적 나침반을 재조정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책을 위한 기획입니다.

 

3. 생략해야만 했던 것이 있습니까?

 

이 책은 제가 과학-종교 관계에 관해 쓴 세 번째 책이며, 저는 책마다 반복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제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항상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페이지 수 제한과 넓은 독자층을 유지할 필요 때문에, 과학을 사용하여 우리의 영적 야망을 더 잘 실현할 수 있게 하려는, 발생기에 있는 '트랜스인간주의(transhumanism)' 운동뿐 아니라 과학의 중세 시대 전(前)사를 더 폭넓게 다루지 못했습니다. 특히, '문자 그대로의' 성경 해석에 대한 매우―그리고 제 생각에는 부당하게―악의적인 탐구의 기원에 관해 훨씬 더 많은 것이 언급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문자주의는, 실제로 그것의 단점들이 무엇이건 간에, 지식 주장들의 시험가능성과 단단한 사실들에 대한 근대적 집착을 낳은 것과 같은 정신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것 모두는 십사 세기의 위대한 프란체스코회 철학자 존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와 관련된 '일의적 서술'이라는 교설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 교설에 따르면 우리가 신은 절대적으로 선하고, 강력하고, 알고 있다고 등등 말할 때, 우리는 '선한', '강력한', '알고 있는'이라는 단어들을 우리가 인간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와 정확히 같은 의미―물론 신은 이런 성질들을 무한한 정도로 지니고 있다는 점은 제외하고는―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스코투스는 한 존재 내에 있는 이런 성질들 모두의 최대 판본을 상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신을 알게될 것이라고 도발적으로 제시합니다. 이런 제안을 매우 도발적이게 하는 것은, 신은 우리의 일반적인 언어 채널들, 특히 성경을 통해 그의 현존을 소통하기를 원하고, 그리고 소통할 수 있기 때문에 궁극적인 영적 탐구는 얼마간의 진지한 노력으로 성취될 수도 있다고 시사하는 점입니다.

 

4. 당신의 주제에 관한 가장 큰 오해들 가운데 몇 가지를 말씀하신다면 무엇입니까?

 

많이 있지만 세 가지가 두드러집니다. 첫째, 단순하게 과학과 종교는 자연적인 적대 관계에 있거나, 아니면 평화로운 평행 우주라는 생각입니다. 둘 다 참이 아닙니다. 사실상 과학과 종교는, 대체로 서로 보완적이었지만 때때로 심한 갈등을 낳은, 다소 다른 제도적, 기술적, 그리고 언어적 수단들을 사용할지라도 실재를 설명하고 제어하는 것에 관해 제기되는 정확히 같은 질문들을 다룹니다. 이런 점에서, '종교'가 심리학적으로 '과학'에 대립되는 것―최선의 경우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의식, 최악의 경우에는 미신의 원천―이라고 가정되는 한, 종교의 신경학적 또는 유전적 기초에 대한 오늘날의 탐색은 완전히 잘못 판단한 것이다. 두 번째 오해는 오늘날 많은 '반(反)과학적' 정서가 진행중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에 대한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과학 전문가들이 저지러는 명백한 실패와 과도함을 고려하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그들에 대한 상당한 의심입니다. 이 현상은, 기독교도들이 성직자들과 승인받은 신학자들의 손에서 자신들의 신앙의 교리를 빼앗기로 결심했을 때인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본보기로 삼으면 가장 잘 해석됩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프로트과학'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세 번째 오해는 과학의 신학적 차원의 회복이 통상적인 종교적 신앙에 이익에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반대로, 역사가 우리의 안내자라면, 과학적 정신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던 그런 종류의 종교성은 이단적이었으며, 당대의 종교 기득권층에 반대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주변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 책에서 강조하듯이, 그런 입장들의 정신은 무신론의 정신과 본원적으로 다릅니다. 올바른 신을 알고 있기 때문에 독실한 신자들이 잘못된 신을 숭배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 만킁의 차이가 있습니다.(그런데, 종교 신자들은 후자의 의미에서의 순수한 무신론이 사실상 과학의 역사에 아무 기여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5. 특정한 독자층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까?

 

저는 프로트과학을 폭넓게 지원하기 때문에 제가 목표로 삼은 독자층은 지적으로 교양있고 모험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책은 서양 지성사에 대한 기본적 이해―너무 많은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까?―를 전제하지만, 학술적 주석들이 많이 들어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책은 독자들이 제가 제기하는 큰 주장들을 다른 곳에서 더 알아보게 하도록 계획된, 확장된 참고문헌 에세이로 결론을 맺습니다. 지적인 일반 독자층을 대상으로 하는 글쓰기의 큰 미덕들 가운데 하나는 자기 자신의 역할을 전면에 내세우고 지원 배역은 무대 중앙에서 벗어나게 두도록 고무된다는 점입니다. 매우 흔히 학술적 글쓰기는, 독자들에게도 궁극적인 목적이 흐릿하게만 보이도록 유지하는, 비계 설치하기와 절차 결정하기의 정교한 수행에 불과합니다.

 

6. 독자들에게 그저 정보를 전달하기만을 원하고 있습니까? 그들에게 쾌락을 주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그들을 화나게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제가 이해하기에, 독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목적에 대한 수단일 뿐입니다. 흔히 그것이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곤 하지만 말입니다. 특히, 독자가 부실하거나 잘못된 정보를 지닌 채 주제를 직면한다―'과학'과 '종교'가 같은 문장에 사용될 때에 일어나는 경향이 있습니다―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저는 제 모든 글쓰기를 자극제, 결국 진주가 되는 진주 조개 속의 모래로 여깁니다. 저는 제가 실제로 말하는 것을 다루지 못하고, 오히려 제가 다루는 주제에 정통한 누군가가 말할 것이라고 서평자가 추정하는 것에 대응하는, 제 저작에 대한 서평들에 가장 실망합니다. 과학과 종교의 문제에 관하여, 자칭 '자유주의자들'이 그런 상투화의 잘못을 저지르기 가장 쉽습니다. 저는 그것이 현재 예의 바른 세속 문화에서 용인되는 반종교적, 특히 반기독교적 정서의 정도를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대응에서 우려스러운 점은 그것의 부정성보다는 무반성적 특질입니다. 저는 예수회 수사들의 훈련을 받았지만 열심히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거나 특히 독실한 신자가 결코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편견의 쉬운 목표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근대과학에 기독교의 유산이 없었다면 근대과학은 엄청난 수준의 사회적 지원을 향유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은 전적으로 명백하다고 느낍니다. 배경과 믿음의 이런 조합이 일반적인 세속적 자유주의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7. 이 책의 제목을 바꾼다면 어떻게 정하겠습니까?

 

그 제목은 편집자가 총서('삶의 기예'와 관련된 단일한 단어들로 구성된)에 맞추도록 제게 강요한 것이었습니다. 1997년에 저는, 같지만 다르게 활용된 쟁점들 가운데 많은 것을 다룬, 똑같은 한 단어 제목―'과학(Science)'―의 다른 책 한 권을 출판했었습니다. 더 영리하고 서술적인 제목―그러나 아마 불투명한―은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신을 믿기: 과학의 숨겨진 역사(Believing in God Literally: The Hidden History of Science)>>입니다. 그 점을 포착했었을 누군가는 사이버네틱스의 아버지(그리고 유니테리언파 교도), 수학자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입니다. 이 책의 제사는 그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과학은 인간들이 자유롭게 신앙을 가질 때에만 번성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다'.

 

8. 표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느낍니까?

 

제가 원고를 제출하기 전에 만들어진, 처음에 제안된 표지보다는 훨씬 더 좋다고 느낍니다. 그것은 공중에서 바라본, 페트리 접시 속에 배양된 박테리아였습니다. 그것은 과학문화를 조사하는 철학자-사회학자의 완전한 상투적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원고를 일단 넘긴 후에 아큐멘 출판사의 누군가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가, 최소한 두 가지 층위에서, 제 테제의 핵심을 훨씬 더 잘 나타낸다고 깨달았습니다. 가장 명백하게, 그것은 뉴턴의 중력 발견의 신화를 떠올리게 하며, 이 책은 서로 강화하는 뉴턴의 과학적 관심과 신학적 관심을 21세기에 과학에 대한 우리의 신념을 갱신하기 위한 모형으로서 강조합니다. 그러나 더 미묘하게, 또한 저는 우리 시대의 이른자 '반과학적' 정서 대부분―뉴에이지 의학에서 지적 설계론까지―이 사실은 사회 전체의 과학적 감성의 성숙을 특징짓는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것을 '프로트과학'이 포착합니다.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과학에 머리를 조아리는 대신에, 사람들은 스스로 과학를 배워서  자신들의 육체적 삶과 정신적 삶에 대한 과학의 적실성에 관해 나름의 결론들을 이끌어 내도록 점점 더 고무됩니다. 자기를 키워준 가지에서 떨어지는 완전히 모양을 갖춘 사과가 그런 전환을 상징합니다.

 

9. 당신은 어떤 책을 썼기를 바랍니까?

 

그것은 까다로운데, 내용과 구성에 관해 너무 많이 걱정하지 않는 채 그것이 끼친 영향과 효과로 책을 평가하는 것은 너무나 쉽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같은 관행이 '문학' 작품에 적용되면 추문이 될 그런 식으로 철학자들이 자신들이 '고전'이라고 부르는 것을 쉽게 발췌하고 주석을 다는 행위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한 가지 좋은 해독제는 움베르토 에코의  <<애석하지만 출판할 수 없습니다>>에 수록된 칸트와 카프카와 같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가짜 출판업자의 거절 편지 모음입니다.) 그 점을 염두에 두며 저는, 수 세기 동안 플라톤의 대화편이 영구적인 쟁점들에 관한 새로운 논증들과 관점들을 위한 계속되는 다시 읽기에 그럭저럭 보답해 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작품이 완전히 실현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대본에 쓰여진 역할들에 몰입하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사실상 저는 연극이 사상을 전달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삼 년 동안 저는 연극 대본을 써서 매년 개최되는 영국 과학 페스티벌에서 연극을 상연하였습니다. 이것은 제가 링컨과 다윈(둘 다 1809년 2월 12일에 태어난)이 그들의 200번째 공동 생일에 회견을 하는 가상적 토크쇼의 대본을 썼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제 글쓰기에 도입된 이런 극적인 측면은 저와 배우들과 참석한 관객들 모두에게 매우 큰 충족감을 주었습니다. 또한 저는 그것이 나중에 '실제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일종의 총연습처럼 잠재적으로 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성서 '문자주의'를 강조한 점은 정말로, 성서가 신의 한 대본인 것처럼, 텍스트에서 묘사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역할들에 몰입하게 되는 성서 독자들에 관한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10. 당신의 다음 책은 무엇입니까?

 

<<삶의 기예로서의 과학>>은 제 열일곱 번째 책입니다. 현재 두 권이 열여덟 번째 자리를 두고 다투고 있습니다. 하나는 <<휴머니티 2.0(Humanity 2.0)>>(팔그레이브 맥밀란)라는 것이며, 그 책은 우리 종의 본성에 관한 미래의 이해에 대해 트랜스인간주의가 제기하는 도전을 면밀히 검토합니다. 나머지 하나는 <<소크라테스 대 예수: 삶의 의미 추구(Socrates vs. Jesus: The Struggle for the Meaning of Life>>(아이콘)인데, 그 책은 기본적으로 소크라테스를 부드러운 세속적 감성에 대한 '그리스도-라이트(Christ-Lite)'로서 묘사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 이상 말하는 것은 독서 경험을 망칠 것입니다.

 

번역: 김효진